Ⅰ.
작가라는 직업이 하늘에서 내려준 천명이라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작가의 작명(作命)은 공감이지 않을까. 글 속에 슬며시 감성이 짙은 활자를 나열해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내어 사람들을 웃고 울게 하는 일. 그런 일을 하는 작가는 하늘이 사람들에게 내린 축복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힘들 때와 기쁠 때, 그리고 공허할 때 작가에게 위로받는다. 면식도 없지만 어느새 그에게 위로받고 사랑받고 있다. 그렇게 활자로 위로받는다.
Ⅱ.
높은 창천이 시원한 바람과 함께한 작년 여름, 나는 박완서 선생님과 활자를 사이에 두고 대면했다. 튼튼하게 제본된 【기나긴 하루】는 그냥 책들과 달랐다. 기존에 읽어오던 책들이 딱딱한 아스팔트였다면 선생님의 활자는 투박한 땅을 뚫고 나오는 기운이 있었다. 처음 닿던 활자는 시뻘건 흙탕길처럼 어느 낯선 나라의 길로 보였다. 처음 겼는 형식의 글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책을 덮을 때쯤 밀려오던 막막함과 적막함의 스케일로 보았을 때 그것은 다름 아닌 향토였다. '향토작가' 나는 선생님을 그렇게 부르고 싶었다. 글이 그림이라면 박완서 선생님은 최고의 풍속화가이다. 일상적인 언어를 정갈스레 나열한다. 그 생동감의 정도는 눈을 감고도 풍경 묘사가 눈앞에 아른거릴 정도였다.
그날 밤도 저 산봉우리들은 저러했을까. 그날 밤의 산봉우리는 저렇게 무심하지 않았다. 암벽은 곤두서 있었고 숲은 선혈이 낭자해서 몸을 뒤틀었다. [기나긴 하루 中]
Ⅲ.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작가의 작명은 공감이다. 글 속에 슬며시 감성이 짙은 활자를 나열해 사람들을 웃고 울게 하는 일을 박완서 선생님을 글로서 보여주셨다. 책을 덮을 때 막막함이 스쳤다. 더 이상 선생님을 만날 수 없다는 점과 오빠를 향한 엄마에 광신에 가까운 애정은 단순한 소설로서의 소재가 아니라 본인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것이 나를 먹먹하게 했다. 이야기를 뛰어넘어 작가에게 공감하게 만드는 글을 보았을 때.
글은 [공감]이라는 작가의 작명을
하늘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지켰다는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