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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김사장 Aug 18. 2017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어딘가로 떠났다.

제주 한달살기를 결심하게 된 이유


이슬이 풀잎 새를 타고 흐른다. 고요한 안개가 짙은 새벽 여섯 시 반. 나는 누운 채 두 팔을 벌려 기지개를 켰다. 평소처럼 귀 끝을 찌르던 기상나팔이 더 이상 나를 에워싸지 않는다. 눈을 떠보니 모든 것이 낯설었다. 고요한 천장과 회백색의 벽,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 어지럽게 널브러진 방. 이 모든 걸 꿈꿔왔지만 낯설었다.  나는 어질러진 책상 앞에 맥이 풀린 놈처럼 쓰러앉아 어두운 방에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시계를 보았다.


2017년 07월 20일 06시 35분 : 내방

바로 어제 나는 21개월간 입어왔던 수의를 벗어놓고 군 생활을 마쳤다. 길었던 시간만큼이나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과 들어오던 음악, TV 방송과 읽던 책들 대부분이 바뀌었다. 바뀌지 않은 것은 오직 나와 내 방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낯설게 느껴졌다. 오랜 기간 고립된 생활을 하다 보니 내가 어디에 위치한 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정체되어있었고 세상은 빠르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눈 앞에는 벗어둔 군복이 보였다. 저 옷을 입고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필요성을 느꼈다.


바뀌지 않은 것은 오직 나와 내 방 뿐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마저도 낯설게 느껴졌다.

숲을 보기 위해선 숲을 떠나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나도 나의 위치를 알기 위해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디로? 나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마음, 돈, 목적지 전부. 그때 나는 책상 앞에 놓인 편지 한 통을 집어 들었다. 제주의 사진이 새겨져 있고 Dear. My travel friend~  로 시작하는 편지였다. 2년 전 홀로 제주도 여행을 할 때 만난 중국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다. 나는 나를 찾겠다며 떠난 그때의 여행을 잠시나마 떠올렸다. 홀로 해변을 거닐었다. 스쿠터를 타다가 사고가 났고 버스를 놓쳐 히치하이킹을 했다. 새로운 사람도 만났었다. 나는 다시 어질러진 책상으로 돌아왔다. 내가 갈만한 곳은 제주도 말고는 없었다. 어디로 갈지 정해졌다. 명분도 생겼다. 여행은 명분과 장소가 생기면 떠나면 된다. 그래서 부모님에게는 생각정리가 필요하다며 "나 제주도 좀 다녀올게"라는 말을 남겨놓은 채 떠났다. 통보, 짐싸기, 출발, 도착. 이 모든 것이 24시간 안에 결정되었다.


2017년 07월 26일 19시 30분 : 공항

난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문제들을 떠안은 채 적막만이 맴도는 밤 비행기에 올랐다. 랜딩기어가 접혀 올라갈 때 비로소 내가 떠난 다는 것을 실감했다. 저녁 8시. 내가 탄 비행기는 보이지 않는 목적지를 향해 날았다. 어둠 속에 들어가자 고요한 기내에서 들리는 건 기체의 엔진 소리뿐이었다. 나는 오로지 비행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어둠속에 들어가자 고요한 기내에서 들리는건 기체의 엔진소리 뿐이였다. 나는 오로지 비행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한 달 후엔 뭐가 달라져있을까?"

어두운 구름 속에서 혼자 생각에 잠겼을 때 밝은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섬을 수놓는 불빛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반짝이는 빛에 홀렸다. 직업병을 가진 사람처럼 카메라를 꺼내 들어 찍었다. 화면에 맺힌 불빛들을 봤다. 이내 나는 다시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있는 그대로를 눈에 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메라가 아닌 눈으로 담아내기 시작했다. 불빛 하나하나를 눈과 마음에 새겨 넣었다. 그렇게 불빛에 홀린 지 10분 정도가 되었을 때 비행기는 땅을 향해 내려왔다. 랜딩기어가 마찰음을 내며 다시 제자리를 찾아 돌아갈 때 나는 스치듯 가져온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했다.

카메라론 담을수 없는 야간비행, 제주야경의 매력


2017년 08월 01일 : 제주

나는 여행을 떠날 때 항상 카메라를 챙겼다. 다시는 들여다보지 않을 사진과 영상을 만들어냈다. 이런 행동은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강제로 기억해 내기 위한 편법이었다.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내가 누군지 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야간비행을 통해서 이번 여행은 있는 그대로를 느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장면이 있을 때는 휴대폰이 아닌 눈으로 담았다. 물론 몸이 먼저 반응해서 사진을 찍을 때도 있었지만 최대한 눈을 통해서 의미를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몸이 무거워 피곤할 땐 하루 종일 두툼한 이불속에 몸을 담갔다. 사람들은 시간이 아깝다며 나를 닦달했지만 나는 게으름도 여행의 일부라며 즐겼다.


눈을 떴을때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면 나의 게으름도 여행의 일부이지 않을까.


2017년 8월 10일 8시 : 날씨 흐린 숙소 앞

비가 오고 적적 할 땐 카페와 술집으로 떠났다. 매일 새로운 사람과 만나 대화를 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일도 나에겐 여행의 일부였다.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선생님과 회사원, 바리스타와 사회복지사처럼 내가 접할일이 없는 사람을 만났다. 사표를 던지고 편도행 티켓을 끊어온 백수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과 대화를 했다. 대화를 하다 통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함께 여행을 다녔다. 새로운 사람들은 여행을 넘어 인연으로 자리 잡았다. 가끔 흥이날땐 가방을 메고 바다로 오름으로 떠났다. 그중에 선 별똥별을 보러 오름으로 갔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다른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일도 나에겐 여행의 일부였다.



2017년 8월 12일 22시 : 침대에서 오름에 가기까지

페르세우스 유성우가 떨어진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람들은 소식을 듣고 일제히 오름에 올라가 별을 보자고 말했다. 나는 밤 10시에 무슨 오름이냐며 생각했가.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때는 이미 설렌마음으로 맥주와 주전부리를 챙겨 들고 오름을 오르고 있었다. 정상에 다다랐을 때 별과 별똥별은 보이지 않았다. 실망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려보니 눈 앞에는 수많은 빛들이 길을 펼치고 있었다.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즉시, 우리는 정상에 있는 평상에 앉아 챙겨 온 먹거리를 펼쳐 놓고 낭만을 즐기기 시작했다. 일렁이는 불빛들을 보며 많은 대화를 했다. 우리는 여행에 대해서와 사람에 대해서, 분위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가 끝나자 우리는 야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내가 여행을 왜 오게 되었는지 생각했다. 명확하게 내가 왜 왔는지 말할 수 없다. 다만 그날의 분위기와 야경이 그 대답을 대신해주는 듯했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내가 떠난 것에 감사함을 느꼈던 때가. 굳이 목적의식, 목적지를 가지고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디로 갈지 모를 땐 어디론가 떠나면 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어딘가로 떠났고 그때가 처음이었다.
내가 떠난 것에 감사함을 느꼈던 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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