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번 가을 처음으로 시집을 한 권 샀다. 서점에 가면 대개 시집 한 권을 사서 오곤 했다. 그러나 근래 도통 서점을 찾지 못했다. 그 탓에 시집을 새로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책은 주로 온라인으로 주문한다. 하지만 시집은 마음을 울리는 한 편의 시를 직접 찾아 울린 마음으로 들여야 한다는 생각에 서점에서 직접 사곤 했다. 이번 가을의 첫 시집을 온라인으로 구매한 것은 퍽 낯선 일이었다.
김연덕 시인의 <폭포 열기>라는 제목의 시집이었다. 사랑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는 이 시집에 대한 이야기를 어딘가 접한 기억이 있었다. 그러나 시인의 시를 읽은 것은 처음이었다. 가을에 시집 한 권 사 읽고 있지 못한 내 처지에 대한 자기 연민 때문이었을까. 가을이면 한두 권씩 시집을 사던 익숙한 일상을 잃는 것만 같은 생각에 스민 불안 때문이었을까. 살피지 못한 시집을 그렇게 들였다.
늦은 밤 배달된 시집을 받아 들고, 전체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시집을 읽을 때, 전체를 먼저 한 번에 훑어보고 흐름을 마음속에 정리한 후에, 끌리는 시를 중심으로 천천히 곱씹으면 읽는 편이다.
이 시집은 사랑과 사랑이라는 개념 속에서 분열되는 아(我)와 피아(彼我), 자아와 세계 등으로 구획화된 요수의 접촉과 파열을 읽을 수 있는 시집이라는 인상을 처음 받았다. 다만 그 분열은 정교한 갈림이나, 어떤 이유에서건 최종의 갈림은 아닌 것 같았다. 각각의 시에 담긴 사랑에 관한 서사가 어딘가 열려 있으며 불가피한 지속을 예감하게 하고, 묘한 희망마저 체감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뻗어나가는 세계는 완전히 갈릴 수 없다.
시집을 훑듯이 읽고 난 후에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을 다시 찾아 읽었다. <폭포 열기>가 1995년생인 김 시인이 2024년 내놓은 시집이고, <이 시대의 사랑>이 1952년 생인 최 시인이 1981년 내놓은 시집이니까 시인들이 모두 서른이 되던 해에 내놓은 시집이었다.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시집은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도 어딘가 대조되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이 시집과 차이가 나는, 최 시인의 시집에 담긴 그것은 아득한 극단의 느낌으로 전해지는 사랑에 대한 서사였다. 두 시집의 차이를 확인함으로써 김 시인의 이 시집이 내게 무엇을 두었는지 정리하고 싶었다.
김 시인의 시들은 어느 지점에서 본 적 있는 진행 중인 서사 같았다. 이와 달리 최 시인의 시들은 정의(definition) 같았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구획화하면서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이 시대의 사랑>의 가장 유명한 시 중 하나인 "내 청춘의 영원한"에서 시인은 다른 것을 갖고 싶고, 다른 곳으로 향하고 싶으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마음을 토로한다. 그것은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으로 청춘의 삼각구도(시인의 표현으로는 트라이앵글)를 이루는 것이다. 시인은 그것들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안다. 이와 달리, 김연덕 시인의 시들은 대개 사랑의 순간과 과정에서 풀지 못한 의문, 그것에 대한 알 수 없음을 토로하면서도 어떤 귀결을 단정하지 않은 인상을 준다. 그래서 내게 김 시인의 시는 진행 중 서사와 같고, 최 시인의 시는 정의와 같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 시대의 사랑>은 워낙 오랫동안 좋아한 시집이다. <폭포 열기>도 좋아하게 될 것 같다. 다만, 서로 다른 의미로 두 시인을 두 시인이 쓴 사랑의 서사를 앞으로도 계속 읽게 될 것 같다. 최 시인의 시들을 극단을 가늠하며 오늘의 위치를 찾기 위해 종종 찾아 읽는다. 김 시인의 시를 그의 열린 세계가 사랑의, 사랑에 의한, 사랑을 위한 어떤 세계로 구축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종종 찾아 읽을 것 같다.
시집을 읽고서, 한 선배와 연락을 주고받다가 보낸 메시지가 생각났다. “계절이 더 아까워지기 전에 계절 속에 풍경처럼 들어가시길…”이라고 보냈다.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큼 풍경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도 필요한 계절 같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세상은 평안하도다(God’s in His heaven- All’s right with the world.”).”라는 <빨강머리 앤>에 나오는 "피파의 노래" 한 구절처럼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어서 느끼는 평온의 한 조각이 자신이라 느낄 수 있어야 안전한, 좋지만 스산한 계절이기 때문이었다.
가을에 새롭게 시집을 들이고, 낯선 시를 읽는 일이 내게는 내게 익숙한 풍경 속에 나를 두는 일 같다. 곧 내가 살아온 지난 과거에 쓴, 익숙한 서사에서 벗어나지 않는 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일인 것이다. 마음이 요동치는 가을에 새로운 시를 통해 새 공기를 마음에 넣는 것만큼이나 익숙한 공기 속에서 일상을 보내며 불안해하지 않고 하루를 묵묵히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다. 존재론적으로 안전하다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번 가을 시집을 들이며 내게 가을, 시집이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