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받기 위한 30년 간의 사투
어렸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무렵 나는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아이였다. 엄마는 학부모 참관수업에 갔을 때 번쩍번쩍 손을 드는 내가 무서웠다고 하시니 말을 다했다. 답을 분명 모르는 것 같은데 자꾸 손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무렵 나는 무용을 배웠었는데, 뽐내며 무대에 서는 것을 좋아했다. 댄스면 댄스, 체조면 체조. 내가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라면 손을 들었다. “저, 여기 있어요!” 내 존재감을 세상에 각인시키기라도 하듯 나설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구 대표로 나간 ‘시 낭송 대회’였다. 학교 도서관에 가서 어떤 시를 읊으면 좋을지 살펴보았다. 그리곤 시 한 편을 골라 외웠다. 선생님께서는 그간 받으신 뇌물의 영향인 건지 아니면 내가 정말 잘해서인지 몰라도 나를 학교 대표로 뽑아주셨다. 큰 무대와 대조적인 작은 아이, 핀 조명을 온전히 받으며 서 있었다. 시를 낭송하던 찰나 찰나가 아주 선명히 기억난다. 그때에 나는, 외운 시를 틀리면 어쩌지 하는 긴장감을 느꼈다. 더불어 다른 사람이 모두 나를 보고 있는 순간을 즐기기도 했다. 앞사람도 잘 안 보일 듯한 강한 스포트라이트가 나를 비추던 그때, 강한 희열을 느꼈었다. 내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다.
시 낭송을 끝낸 후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아빠는 어린 딸을 매우 자랑스러워하셨다. 어린 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넓었던 공간을 모든 사람이 채우지 않아 실망했다고. 간이 큰 딸을 아빠는 더욱 맘에 들어하셨다. 아니, 아빠가 맘에 들어하실 간 큰 딸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딸은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선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없었다. 성적이라는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 한 번도 주목받지 못하면서도, 또 완전히 포기할 수 없는 아이로 자랐다. 말을 잘 듣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서 골칫거리였다.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생이 되었다. 아주 운이 좋게 교대에 입학했다. 아마 대학교에서 가장 낮은 성적으로 붙지 않았을까? 아빠는 또 한 번 좋아하셨다. 안정적이고, 여자라면 여러모로 적당한 직업을 갖게 될 딸이 자랑스러우셨다. 이번엔 엄마도 참 좋아하셨다. 나는 부모님에게 가슴에 꽂고 다닐 수 있는 작은 브로치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게 웬걸. 임용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서 딸은 그야말로 ‘무직’으로 어영부영 30살을 맞이하였다. 이런! 자랑이 짐 덩어리가 되어버린 순간이다. 불효 막심한 딸은 불효 막심하게도 이 모든 것이 괜히 억울하다. 부모님께 인정받고 싶었던 지난 세월이었는데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삽질하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아, 나는 더 나아가 패륜을 저질러버렸다. 세상 게으르게 용돈을 받아 쓰며 침대 위에만 누워있는 것이다. 공부도 하지 않고.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왜 내 눈은 부모님에게만 고정되어 있을까, 그렇게 인정받고 싶어 안달이 났을까. 그것은 평생의 족쇄가 되어서 내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부족한 나로서는 사랑받을 수 없다는 걸 일찍 알아버린 탓일 거다. 나는 가끔 꿈속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있다.
“저 여기 있어요, 저 살아있어요”
이 말이 꼭,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치던 내가 세상에 하는 말 같았다. 꿈에서 깬 나는 여전히 인정받고 싶다. 그러니 꿈속에 외치던 이 말은 내 절규가 맞다. 내 세상이자, 전부였던 부모님에게 30년간 인정을 갈구한.
나는 교사가 정말로 되고 싶은가? 잘 모르겠다. 엄마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진다. “내가 만약 올해 시험을 그만두면 어떨 것 같아? 나 기간제로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어.” 엄마는 불 같이 화를 내시며 자신의 잃어버린 10년을 이야기하신다. 네가 여기서 포기하면 너의 십 년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10년 모두를 날려버리는 것이라고. 정신 차리라는 말도 하셨다. 독립은 하고 나서 말하라고. 지당하신 말씀에 할 말이 없다. 맞다. 나는 엄마의 화만 돋웠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래, 그거다. 아빠, 엄마 저 이제 서커스 그만하고 싶어요. 안정된 직장 말고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싶어요. 기대를 충족할 능력이 없어서 죄송해요. 그래도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다면, 너무 욕심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