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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츄르 Dec 16. 2021

소공녀 마인드를 버리다

결론은 돈을 쓰고 싶다는 것

미취학 아동 시절 나는 <소공녀>라는 동화책을 무척 좋아했는데 내가 특히 좋아한 것은 주인공 세라의 고고한 가치관이었다.

'지금 내 상황이 거지 같고 내 옷차림이 거지 같아도 내 내면이 공주면 나는 공주다.'

이런 식의, 요즘말로 하면 '근자감'이 무척 멋있게 느껴졌고 그런 삶의 태도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하기엔 세라에겐 근거라는 것이 꽤 있었다. 일단 엄청난 부잣집에서 태어나 실제로 공주 대접을 받고 자랐고, 그 풍족한 환경에서 고급 교육을 충분히 받은데다 그 당시 고위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프랑스어를 마스터한 2개 국어 사용자이기도 했다. 물론 어린 나는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냥 거지같은 상황에서도 고고하게 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줄 아는 풍부한 미적 감각과 다방면의 독서에서 나오는 지식, 그리고 우아하고 상냥한 태도를 갖춘다면 내가 가난하고 입은 옷이 싸구려라도 빛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는 아주 최근 들어서야 이 착각에서 벗어났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서른 줄이 되고 보니 내가 그동안 인류라는 종족을 어느 정도는 과대평가 했다는 것을 훅 하고 깨닫게 된 것 뿐이다. '가난하고 후줄근해도 내면이 고급이면 고고할 수 있다.'는 그동안의 착각에 대해 지금 느끼는 단 하나의 감상은 이거다.

개뿔!

일단 인간을 고급, 저급으로 나누는 사고 자체가 저급하다. 남과 다르고 싶고 더 잘나고 싶은 마음 자체가 이미 유치하고 글러먹었는데 그 내면이 잘나봤자 얼마나 더 잘났겠나. 더군다나 요즘은 책 좀 읽어서 얻는 지식을 뽐내봤자 키보드 워리어 취급이나 당하지, 검증된 학위나 성적이 있는 것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다. 철학자 이름을 아는 것보다 명품 브랜드 이름을 많이 아는 사람이 더 대접받는 세상인데다, 우아한 것은 찐따라 불리며 상냥한 것은 호구라고 불린다. 나는 모두가 당연히 알고 있는 이 사실을 모르고 혼자만의 세상에서 살아왔던 것 같다. 난 당당하니까, 내가 싸구려가 아니니까, 싸고 질나쁜 옷을 입어도 길거리에서 파는 10대 20대 초반용 액세서리를 달고 다녀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는 당당하고 싸구려가 아니야!'라는 건, 세라의 고고함과는 달리 근자감이 맞다. 그리고 나 자신이 싸구려가 아니라는 말에는 다른 어떤 인간은 싸구려일수도 있다는 가정이 깔려 있기에, 그런건 앞서 말했듯이 고급일래야 고급일 수가 없는 마인드다.


어쨌든 나는 이제부터 근거없는 자신감을 조금 버리고, 입고 걸치는 것들에 조금 신경을 써보기로 했다. 예전에는 뭐, 들뢰즈가 생전에 낡아빠진 가죽자켓만 입고다녔다든가 이런 에피소드를 듣고는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니다. 들뢰즈는 들뢰즈고, 건강한 노인이 되고 싶은 사람으로서 자살한 사람의 삶의 태도를 멋있다고 따라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고보니 소공녀의 작가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도 노후에는 본인이 귀족이라고 말하고 다닌다든가, 근거 없는 허세가 심해져서 비웃음을 당했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물론 본인의 가치관이 확고하여 아무렇게나 아무거나 입고 걸치는 사람이 남의 시선 따위는 정말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정말 멋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루의 절반은 다른 사람들 감정을 살피는데 쓰고 사람들 시선이 신경쓰여 헬스장도 못다니는 나는 그런 인간이 되지 못한다. 그러고보면 내가 '여성스럽다고 흔히 정의되는 형태의 꾸밈'에 몰두하는 성향이 있는 것도 이것 때문인 것 같다. 갖고 있는 옷이며 액세서리가 전부 가격대 낮은 것들인데, 그나마 여성스러운 꾸밈을 하면 사람 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사실 몸에 달라붙는 원단이 별로 쓰이지 않은 원피스는 삼만원짜리나 삼십만원짜리나 그게 그거 같다. 그 옷을 걸친 몸의 형태가 중요하지 옷의 품질 따위는 아주 사소한 요소일 뿐이다. 한껏 여성스럽게 잘만 꾸미면, 싼 것만 걸쳐도 의외로 싼 티는 나지 않는다. 그래서 20대 전반을 매일매일 소개팅에 나가는 것처럼, 데이트를 하거나 클럽에 가는 것처럼 한껏 꾸미고 다녔다. 싼것만 입었지만 돈은 돈대로 들었던 것 같다. 이제는 옷 한벌을 사더라도 원단이 좋은 옷을 사고 심플하더라도 최소한 14k 소재의 액세서리를 걸치고 싶다. 


어제는 엄마에게 생일선물로 14k 귀걸이를 사달라고 말했다. 이 나이 먹고 엄마에게 갖고 싶은 걸 사달라고 말하는게 조금 부끄럽지만 적립해뒀다 나중에 효도하면 되니까, 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 액세서리는 대부분 써지컬 스틸이나 실버인데 이제 하나하나 바꿔 나가고 싶다. 

결론: 돈쓰고 싶다는 말을 이렇게 길게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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