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04
아무런 계획이 없다는 게 잘못된 걸까?
이렇게 멀리 와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있는 게 과연 잘하고 있는 걸까?
캘거리에서의 하루는 잠깐 외출했다가 다시 들어와서 한국에서 하던 일을 이어하고 있는 정도로 무난히 흘러가고 있다. 크게 지루하지도 않을뿐더러 적당히 밸런스가 잘 맞는 것 같았다. 이렇게 ‘관광하는 여행’이 아닌 ‘로컬처럼 살아보는 여행’은 처음인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러다 오늘, 같이 지내는 언니가 ‘이제 너 계획은 뭐야?’를 몇 차례 물어보았다. 그 질문을 받고 나서 사뭇 계획이 없는 것도 이상한 걸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애초에 나는 캐나다에 왜 온 것인가?
캘거리라는 곳을 온 이유는 아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지만, 온 김에 캐나다의 자연을 실컷 보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로라 투어와 반프(Banff) 국립공원 투어도 예약했다. 그러나 오로라를 보는 옐로우나이프(Yellowknife)에 가려면 비행기로 3시간 이동해야 하고, 반프도 캘거리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지역이다. 그렇다면 캘거리라는 목적지는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
막상 캘거리에 와 보니 이미 나뭇잎은 다 떨어지고 눈이 다 녹지 않은 흔적도 남아 있는 추운 겨울이었다. 내가 기대한 대자연은 뭔가 초록 초록하고 숲이 우거지고 경이로운 스케일이었던 것 같다. 겨우 남아 있는 낙엽 잎과 이미 휑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에서 자연의 웅장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멀리 보이는 록키산맥의 위엄은 눈으로 담을 수 있지만, 캘거리라는 도시에서 나는 어떻게 자연을 경험할 수 있는 걸까?
사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미디어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고, 그 결과 인식과 기준이 많이 흔들리고 있다. 여행을 다니는 모습을 TV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데, 보다 보면 ‘여행 가면 저렇게 해야겠다’고 어느덧 생각하고 있다. 어딜 꼭 가서 무엇을 꼭 먹어야 하고, 이거는 꼭 사 와야 된다. 는 식의 표준이 난무하는 여행 후기들. 그 속에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생각이란 걸 할 수 없었던 건 아닐까)
나는 무엇 때문에 여행을 하는가?
퇴사하고 3개월을 기다려서 온 여행인데, 무슨 목적으로 굳이 온 건가?
여행을 위한 여행이었나? 그렇다면 그것 역시 목적이 될 수 있나?
퇴사하고 여행도 안 가면 뭐했어라는 주변의 기대와 시선이 의식되었나? 그건 잘못된 것인가?
나에게도 여행이라는 행위, 자연이라는 개념에 대해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여행도 삶의 일부로 생각한다면 흘러가는 대로 놔두어도 그저 괜찮을 수 있다. 캐나다의 대자연을 보고 싶다는 기대도 꼭 캘거리에서 충족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 울창한 나무 숲이 있지 않지만, 집집마다 정원이 있고 곳곳에 공원이 있는 캘거리에서 오히려 삶과 더 밀착된 자연을 배울 수도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216쪽에 이런 글이 있다.
“다양한 유형의, 다양한 시간성의 사고방식이나 세계관이 잘 조합되었을 때 비로소 사회가 원활하게, 좋은 의미에서 효율적으로 돌아갑니다."
결국 여행의 목적은 ‘무언가를 한다’가 아니라 내가 한국에 돌아갔을 때 어떤 사람으로 변화하게 될지 새로운 경험과 시선을 갖게 해 주는 것이라 깨닫는다. 자유롭게 여행을 떠나 새로운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배워 온 사람들이 귀국하여 사회에 돌아왔을 때 비로소 사회가 더 원활하게 돌아갈 것이라는 하루키의 말에 공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