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내려 생존 올려 신혼여행 청기백기
1.
아이슬란드를 혼자 여행했다면 어땠을까.
하루 수백 킬로를 운전하면서도 겨우 혼잣말만 하고 있었을 듯. 밥을 해 먹고, 하루를 정리하고, 밤을 기다리는 시간에 적적하고 무료해서 유튜브를 켰을지도 모르겠다. 서울에서 그토록 갈망하던 적당한 고독은 금방 지루한 외로움으로 바뀌었겠지.
광활한 땅, 척박한 자연, 쌀쌀한 날씨인 이곳, 아이슬란드에서 7일은 혼자 있기엔 다소 길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지금 신혼여행을 왔고 내 옆에는 24시간 동반하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 우린 휴양지에서나 호텔에서 누릴 수 있는 안락함도 마다하고 굳이 캠핑카를 선택했다. 그러니 한창 좋을 신혼이라고 해도 싸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 (뒷말 생략)
묵직한 캠핑카 뒷 좌석엔 두 명 분량의 짐, 매일 밤마다 접었다 폈다를 반복해야 했던 이불과 베개, 렌터카 업체에서 넣어준 식기와 가스버너 한 바구니, 끼니를 해결할 식량과 술, 카메라와 전자기기의 충전기와 충전선이 복잡하게 각자의 자리를 차지했다. 도로를 한참을 달리다 보면 엉성하게 구역을 나눠 정리했던 짐은 다시 뒤엉켜있기 마련이었고, 밤이면 뒷 칸에 다리 뻗고 누울 자리를 마련하고자 그 짐들을 앞 좌석이나 한쪽으로 모아 다시 정리했다. 그리고 이 행위는 매일 아침과 밤에 반복되었다.
아무리 야생이라고 해도 샤워는 매일 했다. 캠핑장 6곳 모두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점점 꼬질꼬질.. 해지는 우리. 한국에서 챙겨 온 선크림 SPF 50+ PA++++으로는 아무래도 태양이 더 가까운 이곳 북유럽의 자외선을 막지 못했다. 하루에 두 번 선크림을 덧발랐음에도 피부는 점점 발갛게 태워지고 기미도 눈에 띄게 올라왔다. 드라이기는 당연히 없기에 대충 자연 건조한 뒤 늘 모자를 눌러썼고, 화장도 물론 할 필요도 없었다. 한국에서 캠핑해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우리의 신혼여행은 거의 생존에 가까웠다. (참고로 한국에서 캠핑 안 해봤다..)
2.
호텔 숙박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아무래도 캠핑은 다른 여행객들을 관찰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여러 캠핑장을 다니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어린아이와 함께 여행하던 가족들의 모습이다. 캠핑가 대신 텐트를 치던 가족도 많았다. 아이들은 캠핑장에서 부모를 도와 텐트를 치고, 함께 밥을 하고, 설거지를 돕고, 신나게 뛰어놀았다. 어린 자녀와 호텔 수영장에서 물놀이하며 모든 것을 한 곳에서 해결할 수 있는 호캉스 대신 그들은 이렇게 조금 불편하고 조금 고생해도 자연 속에서 함께 생활하는 시간을 택했다.
이곳에 있는 7일 동안 핸드폰이나 패드를 손에 쥐고 있는 아이를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아이들은 참 신기하게도 자연에 있는 것들로 충분히 잘 논다. 보이는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질 수 있고 주어진 것들로 역할 놀이를 하며, 혹은 만들기 대회라도 하며 창의적으로 각자의 놀이를 만들어 낸다. 몸으로 경험하는 여행은 아무래도 조금 더 오래 기억되기 마련. 어른인 나도 캠핑카를 타고 다니며 몸으로 고생한 이번 여행은 좀처럼 잊힐 것 같지 않은데 어린이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이때를 이야기하며 지낼 수 있을까.
텐트를 치며 자연스레 '어디서 오셨어요?' 대화를 시작하는 무리들. 이탈리아에서 오고 또 어디 유럽에서 왔다고 했다. 어른들의 대화 속에 아이들도 덩달아 갑자기 친구가 되어 서로 뛰어다니며 술래잡기를 한다. 뛰다가 지치면 텐트 쪽으로 와서 잠깐 어른들을 돕는다. 텐트가 설치되고 어느새 식사준비가 시작되었다. 인사를 나눈 가족들은 이제 식사도 함께 한다. 음식을 나눠 먹고 각자의 여행 이야기를 식탁 위로 꺼낸다.
내가 관찰한 캠핑장의 모습. 책이나 유튜브로 배우는 사회생활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정말 훌륭한, 살아있는 교육이다.
3.
캠핑카로 로드트립을 하다 보면 또 하나의 묘미가 있는데, 바로 계획되지 않은 여행이라는 점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극 J라서, 완전 무계획은 용납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도 P 남편을 만나니 변하긴 하더군요. 대충 '링로드 7일 완주'라는 큰 틀 안에서, 가고 싶은 지점을 구글 맵에 표시해 두고, 대에충 '여기에서 저기까지 구경하다 보면 하루가 끝나니까 잠은 여기서 자야겠군, ' 싶은 지점 근처로 캠핑장을 찾는다. 한국에서부터 미리 찾아두고 온 것은 아니므로, 어느 캠핑장에서 잘 것인지는 당일 결정된다. 하루치의 관광을 끝나고 이동하는 길 위에서 남편은 운전, 나는 캠핑장 검색. 당일 숙소는 당일 검색한 결과였고, 그렇게 6번 곳의 캠핑장을 경험했다.
그중 한 곳, 미바튼 (Myvathn) 캠핑장에서의 일이다. 저녁 7시 40분쯤이었다. 동선이 긴 하루여서 얼른 씻고 쉬고 싶었다. 저녁도 먹지 못한 상태라 배도 매우 고팠다. 분명 구글에 최신 리뷰도 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이유는 몰랐지만 영업을 안 한다면 얼른 다른 곳을 찾아야 했는데, 근처에는 캠핑장이 많이 없었고 그나마 있는 곳은 처음 찾은 곳에 비해 후기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래도 뭐 어쩔 수 있나, 열린 곳이라면 아무 데나 가야지.
단념하고 돌아서려 난 찰나, 차 한 대가 들어오더니 우리 옆에 섰다. 운전석에 있던 할아버지가 창문을 내리며 "캠핑장 찾으러 왔어?"라고 말을 건넸다. 누군데 이런 걸 물어보지? 싶어서 얼떨결에 "네.." 대답만 하고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쉽게 우리를 보내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가셨다. 혹시 여기 캠핑장 사용하고 싶으면 8시에 다시 오라고. 일찍 문을 열면 캠핑카가 너무 많이 들어와서 8시에 문을 연다고 하셨다. 아 주인이셨구나.. 다른 곳은 별로 성에 안찼으므로 20분 정도 기다리기로 했다. 근처에서 드라이브하면 되니까.
8시에 맞춰 돌아왔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 한국에 오신 적이 있단다. 그리고는 캠핑장 이용료를 안 받으시겠다며, 대신 리뷰를 잘 써달라고 하셨다. 오늘 첫 손님이 우리였긴 해도, 캠핑장 이용료를 안 받으시면 어떡하나 괜히 이상하다 생각했다. (그 짧은 시간에 속으로 미스터리 추리소설하나 뚝딱 완성할 정도)
너무 놀라 당황하고 불편해하는 기색이 얼굴에 다 드러나자 할아버진 말씀하셨다.
"이런 서비스 처음 받아보는 건가?"
"네..."
"지금이 처음이면 이제 이후론 두 번째가 생길 거야."
굉장한 호의였다. 은퇴하시고 여름과 겨울 성수기에만 캠핑장을 운영하며 적당히 벌고 쉬면서 살고 계신 듯했다. 성수기 관광객이 한 무리 빠져나간 8월 마지막주에는 사실상 캠핑장을 닫으려고 했기에, 우리에게서도 굳이 돈을 받지 않으셨던 것이다.
계획하지 않았고 예상할 수 없었기에 더 감사한 호의였다. 심지어 유일하게(!) 드라이기가 있던 캠핑장. 구글에도 별 다섯 개 남겼다.
어느 캠핑장엔 샤워가 유황온천물로 나왔고, 어느 캠핑장엔 여행객들이 나누고 간 음식들이 가득했다. 어느 캠핑장은 가는 길에 무지개를 만났다. 쉬러 왔다면 이렇게 여행할 수 없었겠지만, 이런 방식의 여행에도 마음이 차오른다.
이래서 캠핑을 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