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서치의 전기수 이야기-1-
"나는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이다. 나는 성자보다는 사티로스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글만 읽는다. 어쩌면 이 글이 명랑하고 박애적인 방식의 정반대를 표현하는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데 성공을 거둘 수도 있다.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궁극적인 것은 인류를 개선하겠다는 말 따위의 것이라고. 나는 그 어떤 새로운 우상도 내세우지 않았다. 옛 우상들은 자신이 진흙으로 만든 다리를 갖고 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우게 될 것이다. 우상('이상'에 대한 나의 말)을 파괴하는 것, 이것은 이미 내가 하는 일에 속한다. p13
"내가 지금까지 이해해 왔고 또 살아왔던 철학, 그것은 얼음 속에서 그리고 높은 산 위에서 자유로운 의지로 살아가는 삶이다. 그것은 실존 속에서 모든 낯선 것과 의심스러운 것을, 도덕에 의해 지금까지 추방당했던 모든 것을 찾아가는 삶이다. 금지된 것 속에서 그러한 방랑생활을 하며 얻은 오랜 경험을 통해 나는 지금까지 도덕적이고 이상적이었던 원인들이 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배웠다. 즉 철학자들의 숨겨진 이야기, 그들의 위대한 이름의 심리가 나에게 빛으로 다가왔다. -하나의 정신이 얼마나 많은 진실을 견뎌 내고, 얼마나 많은 진실을 감당해 낼 것인가? 그것이 나에게는 항상 진정한 가치척도였다." p16
"위대한 개인들은 가장 오래된 사람들이다. 나는 알 수 없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내 아버지일 수도 있으리라.- 아니면 알렉산더 혹은 이 육화된 디오니소스가...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우편배달부는 나에게 디오니소스-머리를 전해 준다... "p41
"스스로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것, '다른' 자기 자신을 원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그런 상황들에서는 위대한 이성 그 자체이다." p56
"사람이 변화를 겪어서 어떤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자기가 누군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삶의 실수들조차, 예를 들어 가끔씩 옆길로 샌다든지, 잘못된 길로 접어든다든지, 망설인다든지, '겸손하게 대한다든지', 즉이 과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과제들에 쏟아 내는 잘못된 진지함 등도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된다.. 여기서 하나의 위대한 영리함이, 심지어 최고의 영리함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노스체 테 입숨Nosce te ipsum(너 자신을 알라)이 몰락을 향한 처방이 될 경우에는 자기 망각, 자기오해, 자기 왜소화, 자기 협소화, 자기 평범화조차 이성적인 것이 된다. 도덕적으로 말하자면, 이웃 사랑, 즉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들을 위한 삶을 가장 강한 자아를 유지하기 위한 방어 조치일 수 있다." p96
"거기서는 하나의 '이념'이, 디오니소스적과 아폴론적이라는 대립이,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옮겨졌다. 역사 자체가 이 '이념'의 발전 과정이라고, 비극 속에서 그 대립이 통일을 향해 지양되었다고 말이다. 이러한 광학 하에서 이전에는 결코 마주친 적도 없었던 것들이 갑자기 대립되었고, 서로를 조명하였으며, 또 파악되었다..."p143
"삶에 대한 궁극적이고, 가장 즐거우며, 넘칠 정도로 충일하면서도 극단적인 용기로 충만한 긍정은 최고의 통찰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진리와 학문에 의해 가장 엄격하게 확인되고 유지되는 가장 심오한 통찰이기도 하다. 존재하는 것에서 빼도 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없어도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ㅔ145
"'가장 낯설고 가장 가혹한 문제들에 직면해서도 삶을 긍정하는 것 자체, 이것이 바로 삶에의 의지이다. 즉 자신에게 있어서 최상의 모습을 희생시키면서도 자기 고유의 것이 대해 지칠 줄 모르고 환희를 느끼는 것, 이것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다. 또 나는 이것을 비극적인 시인의 심리에 이르는 다리로 이해했다. 공포와 동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다. 즉 감정을 격렬하게 방출시켜서 그 위험한 감정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정화시키기 위해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이런 식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오히려 공포와 동정을 넘어서서 변화의 영원한 욕구 자체가 되기 위한 것이다. 이 욕구는 게다가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욕구까지도 포함하고 있다.,,"p148-149
"'영원회귀'에 대한, 즉 무조건적이고도 무한히 반복되는 모든 사물들의 순환에 대한 가르침, 이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이미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해 먼저 가르쳐졌을 수도 있다. 거의 모든 근본적인 생각들을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았던 스토아학파는 적어도 그것에 대한 흔적을 갖고 있다.-"p150
"- 이 19세기 말에 강력한 시대의 시인들이 영감이라고 불렀던 개념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굴까? 그런 사람이 없다면 내가 그것을 기술해 보고자 한다.-자기 안에 미신의 찌꺼기를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자는 사실 신이 자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 자신의 입에 물려진 재갈, 초강력한 권력의 매개 등에 대한 상상을 물리칠 방법을 전혀 모른다. 계시라는 개념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고 정확하게 무언가가 갑자기 보이고 들리며, 무언가가 누군가를 그 심층에서부터 흔들어 놓고 전복시킨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사실을 기술하는 것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듣고는 있지만 그것을 찾지는 않는다. 받기는 하지만 누가 주는지는 묻지 않는다. 마치 필연성과 함께, 주저함이 없는 형식으로 하나의 생각이 번개처럼 번쩍하고 떠오른다.-"p195
"나는 무엇보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인간들 중에서 가장 끔찍한 인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내가 가장 좃ㅎ은 일을 하는 인간이 되는 것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파괴할 때의 즐거움을 파괴를 위한 나의 힘에 상당하는 그 정도만큼 알고 있다. - 이런 두 가지 측면에서 나는 나의 디오니소스적 본성에 복종한다. 이것은 부정하는 행위를 긍정을 말하는 것에서 분리시킬 줄 모른다. 나는 최초의 비도덕주의자이다. 이로 인해 나는 모범적인 파괴자가 되는 것이다.-" p250
내가 니체에 끌리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디오니소스의 제자이자 자식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필자가 이 블로그에 올리는 [관을 짜라]라는 글에서 '디오니소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겠다.
여기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디오니소스는 천상과 지상, 생과 사, 신과 인간이라는 양면성을 공유하고 있는 독특한 존재라는 데에 있다. 이것은 니체가 헤라클레이토스라고 하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를 흠모하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그 또한 사물 속에서 국어학으로 말하면 반의어를 본 사람이다. 살아 있는 것 속에서 죽어 있는 것을 보았고, 젊은이 안에 있는 노인을 본 사람이다. 이처럼 인생은 항상 양면성을 갖고 있다.
이는 동서양이 공유하고 있는 사고로,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만남이 있듯이, 즐거운 일이 있느면 화마가 찾아오고 고생 끝에 낙이 오는 법이다.
그래서 니체는 인간을 스스로를 극복해야 하는 존재로 봤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