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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N 전기수 Mar 22. 2020

기도하는 대통령이 없어 코로나 재앙이 닥쳤을까

전북의 대형 교회 설교에 대한 나의 생각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예레이먀애가 3장 32~33-


Though he brings grief, he will show compassion, so great is his unfailing love.

For he does not willingly bring affliction or grief to the children of men.

-Lamentation 3: 32~33-


시국이 엄중한 때에 또 한 번 대형교회 목사님의 설교가 사람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이따금 이와 같은 비극을 곡학아세 해서 설교하는 바람에 세상의 공분을 사는 일들이 꽤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성시화'의 사고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과거 이명박 전 대통령도 서울 시장 시절, "서울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말을 한 걸로 기억합니다.

이를 '성시화'라고 하는데, 대한민국을 이스라엘로 동일시 하는 오류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전북 대형 교회 목사의 설교는 제게 성시화의 확장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서울시와 대한민국은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이 아니죠.


기독교인으로 지금 전국민, 전세계가 겪고 있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고난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설교도 그 교회 목사님이 코로나 재앙에 대한 해석에서 나온 말이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 엄중한 시기에 덕이 되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고린도전서 10:23-



제가 고난 중에 있을 때, 가장 가슴 깊이 와닿던 말씀이 위에서 인용한 예레미야애가의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지금 교회가 이 시기에 전해야 할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난 중에 섣부른 해석과 적용은 금물입니다. 자칫 사려 깊지 못한 말과 행동은 개인과 교회는 물론, 사회 전체에 깊은 상처를 줍니다. 자칫 욥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던 욥의 친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혹 지금 이 시국에 교회가 할 역할을 교회사에서 찾을 수는 없을가요.

로마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안위를 살피지 않고 시민들을 돌봤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다신교의 나라였습니다. 무수히 많은 이교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모든 비극이 황제가 기도하지 않아서, 혹은 시민들이 이방신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조용히 병자들을 섬겼습니다. 자칫 자신이 감염될 수도 있는 위험 속에도 천국과 부활의 소망이 있었기에 그럴 수 있었습니다. 



이번 코로나 감염으로 인해서 뜻하지 않게 널리 알려진 단체가 신천지 입니다.

저는 신천지의 확산의 이유도 교회사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트 어만은  [기독교은 어떻게 역사의 승자가 되었나]라는 책에서 고대 로마 시기 기독교가 융성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기독교 활동은 사뭇 양상이 달랐다. 그들이 뿌리를 둔 유대교 시나고그와 매우 비슷하게 기독교 교회에서는 주별 정기 모임이 있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그 하나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일, 개인의 영성 문제가 아니었다. 교회에 합류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교회는 장소가 아니었다. 우리가 아는 한 3세기 중반가지 기독교 회합을 위한 건물은 없었다. 그 전에는, 그리고 아마 이후에도 한동안, 대부분의 교회는 일반 가정집 아니면 묘지 같은 야외 장소에서 모였다. 교회는 장소라기보다 공동체였다. 그것도 아주 긴밀한 공동체, 핵가족만큼 유대가 단단한 공동체였다. 아예 신도들은 가족을 버리고 대신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가족처럼 여기라고 종용받곤 했다. 교회의 설립자나 지도자는 '아버지'였고, 동료 신도들은 하나의 대가족에 함께 속한 '형제'와 '자매'였다. 게다가 이들은 의식적으로 상호 애정과 존중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이기를 추구했다. 교회는 사정이 어려운 구성원들에게 물질적 지원을 해주었다. 그리고 교회로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정신적 지지도 제공했다. 201


이를 역으로 적용하면 신천지가 융성한 이유도 바로 신천지 신도들이 이와 같은 경험을 그곳에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 한 가지는 현대 한국 교회의 복음 부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단에서는 성경 대신 자기계발서에나 나오는 내용을 설교 시간에 전합니다.

교회 안에 번영 신학이 들어오면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교회는 가난한 청년들보다는 십일조를 내는 중장년 층에 집중했습니다.

외형의 확장에 집중하다보니 내실을 다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크기에 맞는 신학과 교리의 체계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대신 세상의 부와 번영의 신학이 강단을 점령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세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오해한 교회의 착각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신자, 특히 청년은 교회에서도 영적 갈급을 채우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욕망을 신천지는 채워주었었고, 그렇게 신천지는 성장했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은 여기에서도 적용 가능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무엇을 전해야 할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지금 일어나는 일은 앞서 인용한 말씀처럼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할 겁니다.

그 이유는 구약성경의 욥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욥기 40장 1절부터 4절-


저는 다만 이 잔이 속히 지나가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그리고 섣부른 해석이나 위로 대신 성육신이 주는 정신을 따르겠습니다.

가만히 고통 겪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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