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던 배추 모종이 일깨운 것들

30대 직장인의 텃밭일기

by 아르페지오

일요일 근무를 했던 터라 텃밭을 찾았다. 오전 10시께 찾은 나의 텃밭은 조용했다. 밥 벌이를 위해 필사의 노력을 펼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마다 일터에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조용함 속에서 가을은 성큼 다가왔다. 위로는 높아진 하늘이 보였고, 발아래에는 폴짝폴짝 뛰는 메뚜기가 눈에 띄었다.

4일 만에 찾은 나의 텃밭 가족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가을 상추도 자신의 잎을 더 넓게 뻗어 내고 있었다. 곤충이 찾아와 잎을 갉아 먹은 가을배추도, 가을 무의 잎 부분도 자신의 존재감의 과시하고 싶었던지 초록 잎을 뽐냈다. 부추는 수직으로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었다. 없애면 또 자라나는 잡초를 하나 둘 없애면서 문득 지난주 내 눈에 띄었던 배추 모종이 눈에 들어왔다. 그 죽어가던 배추 모종 말이다.

놀랍게도 안간힘을 쓴 덕분인지 녹색의 숨을 내뿜으며 옆으로 자라고 있었다. 물론 다른 배추 모종보다 넓이는 부족해 보일지 몰라도 자신을 증명하고 있었다. 뿌듯하고 기뻤다. 이만큼 자라다니.

그래서일까, 때로는 모든 모종을 다 키울 수 없다는 나의 마음도 반성하게 됐다. 물론 마음에 갔던 터라 모종을 뽑아 버리진 않았다. 한 번 자라봐. 너 하는 거 보고 판단할게란 마음이 컸다. 인간은 누구나 사물에 마음을 투영할 수 있고, 나는 그 배추 모종에게 나의 1~2년 차 시절을 잠깐 스치게 느꼈던 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내가 지난주 줬던 영양제도 한몫을 했으리라.

효율과 인간애의 앞에서 참 많은 갈등을 한다. 인간으로 투사하면 인간의 존엄을 위해 저소득층에게 지원해야 한다는 논리 말이다. 한편으로는 지원을 받아도 그 모두가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선별과 구분이 필요하고 효율이란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갈등을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기분이 좋았다. 죽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을 깨고 그 모종이 살아났으니 말이다. 나의 경직된 사고를 일깨워 줬으니 말이다. 언어란 그 한 단어 안에 구분을 짓과 범위를 한정하기 때문에 모든 현상을 구분 지어서 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마치 물감이 번지는 듯한 그 순간을 정의하기 어렵고,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그 계절감을 표현하기 어렵다.

반면에 농사란, 그 자체로 언어를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유연함을 떠올리게 만든다. 모든 것은 1과 0 그 사이 어디에 해법이 있을 터인데. 누구나 자기가 심판자가 돼 결론을 지으려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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