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은 처음이라
글쎄 뭐랄까. 묵묵하게 나의 일상들로 독에 물을 채우고 있을 뿐이었는데 도저히 차오르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내가 무얼 잘못하고 있는 걸까? 답답한 마음에 하루에 1번 붓던 물을 2번, 3번 부어보기도 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바가지를 쓰면 다를까 싶어 새로운 것들을 사서 채워보기도 했다. 온갖 노력을 쏟아봐도 차도가 없었다.
누구든 간에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그만큼 간절하고 절실했다. 멍청하게도 이 답답함을 적나라하게 터놓고 말할 용기도 없었다. 그럴 사람도 없었던 것 같고. (핑계를 대자면 망할 코로나 때문에 편히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다.) 그 빈 틈이 커질수록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나의 힘듦을 눈치채 주었으면 하는 마음. 어떻게든 한 발 먼저 다가와 괜찮다고 어루만져주었으면 하면 마음. 지금에야 스스로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힘듦을 그 누가 먼저 알고 도와줄 수 있겠냐는 생각을 하지만, (지금보다 한 스푼 더 멍청했던) 그때의 나는 그냥 그랬다.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나를 이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으면. 매일을 아득바득 힘내서 살아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끔 있는 즐거운 일들도 한 때의 위로일 뿐이었고, 기대감에 부풀었다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일들이 외려 나를 더 외롭고 힘들게 했다.
지친 마음에 털썩 주저앉아버렸고 그제야 보였다. 깨져있는 독이. 내가 열심히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음이. 미친 세상. 이런 망할. 난 그동안 아주 성실하고 착실하게 계획적으로 시간낭비를 한 거구나. 그것도 아인슈타인 뺨치는 아주 창의적인 갖가지 방법으로! 그런데, 애초에 나는 이 독을 왜 채워야 했던 거지?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일단 하기는 했는데 대체 무슨 연유로 이걸 붙들고 있었을까. 세상이 미쳐간다고 나도 덩달아 같이 미쳐가고 있었구나.
시월의 어느 날, S양이 호그와트 입학통지서를 손에 들고 왔다. 진격의 거인처럼 대문을 부수고 찾아온 해그리드를 만난 해리포터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녀는 해그리드만큼이나 해맑고 순수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게 들려준 소소한 행복의 원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깨달았다. What a whole new world! 이거구나. 해리포터가 동갑내기 사촌 생일에 들러리나 서는 소년이 아닌, 세상의 악을 물리칠 운명을 타고난 주인공일 수 있는 세계가 있었구나.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모험의 세계가.
S양이 풀어놓은 행복 보따리는 예컨대 이런 것들이었다.
기상-빨래-운동-정리-출근 준비로 빈틈없이 잘 짜인 아침 루틴.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되는 각종 기념수건 대신 차곡차곡 예쁘게 개어둔 수건 세트.
내 마음 가는 것들로 가득 찬 공간에서 보내는 나만의 시간.
하나하나 고르고, 고민하고, 사고, 채우는 시간들이 주는 행복.
코딱지 맛 젤리 같은 충격적인 느낌이었다. 그동안 나도 누구보다 열심히 젤리를 먹었는데, 아니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내가 상상도 못 할 맛이었던 거잖아! 한 번 맛보기를 본 이상 이제 더는 무를 수 없었다. 서랍 구석에 넣어두었던 오랜 고민을 S양 덕분에 그렇게 딱 하루 고민하고 결심했다. 이제는 독립을 해야겠다고.
결심이 어렵지 행동은 쉽다. 목표만 정했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는 일단 부딪혀 보면 되는 거니까. 고민과 진심이 담긴 이야기에 생각보다 쉽게 부모님의 재가를 받았다. 언젠가 해야 할 일을 그 언젠가의 일로만 두고 싶지 않다고.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건 너무 바보 같은 일인 것 같다고. 업무가 몰아치는 와중에도 집과 회사를 오가는 길에 계속해서 찾아보았다. 주어진 예산과 나의 선호와 편의를 고려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변수도 선택지도 너무 많아서 그 안에 나에게 베스트인 것이 무엇인지를 고르는 건 엄청나게 복잡한 사다리 타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머리만 백날 굴려봐야 소용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러다 지쳐 다시 또 서랍에 이 고민을 처박아두고 말 것 같은 생각에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내가 사는 물건들 중 제일 비싼 물건이 될 텐데, 그 날따라 본 매물도 중개인도 썩 맘에 들지 않았다. 뒤이어 결혼식에 가야 해서 시간도 많지 않은데 답답했다. 말이 오락가락하던 요상한 중개인은 먼저 떠났고 건설부터 관리까지 하는 업체 쪽에서는 방을 보여주고 가계약금은 돌려줄 수 있으니 우선 가계약을 걸고서 고민해보라는 말을 했다. 둘러보고 더 나은 곳을 보게 되면 가계약을 취소해도 괜찮다고 말이다. 등 떠밀려 가계약을 걸었지만, 보여준 방이 썩 맘에 들지 않았다. 그 안에서 내가 생활하는 모습도 영 눈에 그려지지가 않고 말이다. 고민을 가득 끌어안고 골목을 하나 돌아 나오는 길에 외관이 꽤나 마음에 드는 건물이 있었다. 건물을 기웃기웃 거리는 사이에 주차를 하고 나오던 부부가 말을 걸었다.
"혹시 부동산에서 오셨나요?"
"아뇨, 부동산은 아니고 개인인데... 주변 돌아다니다가 혹시 여기 빈 방이 있을까 해서 관리실에 물어보러 왔어요"
그렇게 건물 밑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오피스텔 몇 개를 가지고 있는 임대인이셨다. 원래는 대학생들이 많이 오는데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화상수업으로 진행되어서 수요가 없다고, 그래서 공실이라 잠시 정비를 하러 온 것이라고 했다. 코로나 때문에 미쳐가는 건 나뿐만은 아니었구나. 혹시 방이라도 볼 수 있냐는 말에 흔쾌히 응해주셨고 그렇게 들어간 공간은 내가 방을 구하면서 원했던 조건을 갖추고 있었고 동시에 골치 아플 수 있겠다고 생각한 지점이 싹 해결되는 조건이었다. 그렇지만 월세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서 고민이 되었다. 우선 연락처를 받았고 방을 나왔다.
잠시 고민했다. 3분 정도였을까, 방에서 엘리베이터 그리고 건물 앞 교차로까지 걸어 나오는 길목까지. 그리고 바로 결정했다. 그래 여기라고. 바로 전화를 걸어 이전의 가계약을 취소하고 방으로 다시 올라가 가계약을 걸었다. 길가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까지 이틀 사이에 모든 게 진행됐다. 속전속결이었다. 중요한 결정이라고 해서 오래 걸릴 필요는 없지. 때로는 결단이 필요한 일도 있는 거니까. 수많은 선택지에서 가장 좋은 안을 한 번에 골라내는 일은 확률의 문제고 어려운 일이지만, 주어진 조건을 가지고 Yes or No를 판단하는 건 쉬운 일이다. 그렇게 30분 만에 내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미쳐가는 세상을 바라보며 마냥 지쳐가는 일은 이제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더라도 여기저기 부딪히다 보면 출구는 찾게 되어있으니까. 이번 일처럼, 일은 되려고만 하면 길 가다가도 얻어걸려서 순식간에 해결될 수도 있는 법이니까. Who knows. 미친 세상은 미쳐가더라도 나는 이곳에 나의 세상을 만들어야지. 적어도 그 공간 안에서 나는 오롯이 나일 수 있을 거고 나만을 위한 시간으로 채울 수 있을 것이다. S양과 같이 나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친구들과도 함께 새로운 추억을 만들 수 있겠지.
이제 퇴근 후 나는 내 집으로 출근을 해야지.
첫 번째 브런치 글을 쓰는데 걸린 시간, 한 달
다시 두 번째 브런치 글을 쓰기까지의 텀, 일 년
두 번째 브런치 글을 쓰는데 걸린 시간, 하루
처음 본 사람과 집 계약을 하기까지 걸린 시간, 3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