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p.20
하지만 너무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 혹은 특출하게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소설 쓰는 일에는 맞지 않을 거라고 나는 항상 생각합니다 소설을 쓴다는 -혹은 스토리를 풀어간다는- 것은 상당히 저속의 기어로 이루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실감으로 말하자면, 걷는 것보다는 약간 빠를지도 모르지만 자전거로 가는 것보다는 느리다, 라는 정도의 속도입니다 .의식의 기본적인 작동이 그런 느린 속도에 적합한 사람도 있고 적합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소설가는 많은 경우, 자신의 의식 속에 있는 것을 '스토릴'라는 형태로 치환해서 표현하려고 합니다. 원래 있었던 형태와 거기서 생겨난 새로운 형태 사이의 '낙차'를 통해서, 그 낙차의 다이너미즘을 사다리처럼 이용해서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상당히 멀리 에둘러 가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입니다.
자신의 머릿속에 어느 정도 윤곽이 선명한 메시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일일이 스토리로 치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윤곽을 그대로 곧장 언어화하는 게 훨씬 더 빠르고, 또한 일반인이 반아들이기도 훨씬 쉽겠지요. 소설이라는 형태로 전환하자면 반년씩이나 걸리는 메시지나 개념도 그걸 그대로 직접 표현하면 단 사흘 만에 언어화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마이크를 향해 생각나는 대로 말해버린다면 단 10분이면 끝날지도 모릅니다.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은 물론 그런 것도 가능합니다. 듣는 사람도 '아하, 그렇구나' 하고 공감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그런 게 바로 머리가 좋다는 것이니까.
또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일부러 스토리라는 애매모한fuzzy, 혹은 뭔가 정체를 잘 알 수 없는 '용기'를 꺼내 들 필요도 없습니다. 혹은 제로에서부터 가공의 설정을 만들어낼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지식을 최대한 논리적으로 조합해서 언어화하면 사람들은 수월하게 납득하고 감탄하겠지요.
p.40
원래부터 그룹에 소속되어 여러 사람과 함께 어울려서 뭔가를 하는 게 서툴렀고, 그래서 정치 모임에는 가입하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는 학생운동을 지지했고, 개인적인 범위에서 가능한 행동은 취했습니다. 하지만 반체제 파벌 간의 대립이 심화되고, 이른바 '내분'으로 사람 목숨을 어이없이 앗아 가는 사태가 벌어진 뒤부터는 다른 많은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그 운동의 존재 방식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거기에는 뭔가 잘못된 것, 옳지 않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건전한 상상력이 상실되어버렸다.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거센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우리 마음속에 남겨진 것은 뒷맛이 씁쓸한 실망감뿐이었습니다. 아무리 거기에 올바른 슬로건이 있고 아름다운 메시지가 있어도 그 올바름이나 아름다움을 뒷받침해줄 만한 영혼의 힘, 모럴의 힘이 없다면 모든 것은 공허한 말의 나열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그때 몸으로 배운 것은, 그리고 지금도 확신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말에는 확실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은 올바른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공정한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됩니다. 말이 본래의 의미를 잃고 제멋대로 왜곡되어서는 안 됩니다.
p.58
나는 나를 무슨 천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뭔가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물론 이렇게 삼십 년 넘게 전업 소설가로 밥을 먹고 있으니 전혀 재능이 없는 건 아니겠지요. 아마도 원래 어떤 종류의 자질, 혹은 개성적 인 경향 같은 건 있었던 모양이죠.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 내가 이러니저러니 궁리해봤자 아무 도움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판단은 다른 누군가에게 만일 그런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면 그렇다는 얘기지만 맡겨두면 될 일입니다.
내가 오랜 세월에 걸쳐 가장 소중히 여겨온 것은(그리고 지금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나는 어떤 특별한 힘에 의해 소설을 쓸 기회를 부여받은 것이다'라는 솔직한 인식입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든 그 기회를 붙잡았고, 또한 적지 않은 행운의 덕도 있어서 이렇게 소설가가 됐습니다. 어디까지나 결과적인 얘기지만, 나에게는 그런 '자격'이 누구에게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어진 것입니다. 나로서는 일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해 그거 솔직히 감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자격을 -마치 상처 입은 비둘기를 지켜주듯이- 소중히 지켜나가면서 지금도 이렇게 소설을 계속 쓸 수 있다는 것을 일단 기뻐하고 싶습니다. 그다음 일은 또 그다음 일입니다.
p.110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만일 당신이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파고들면 얘기는 불가피하게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야기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자유로움은 멀어져가고 풋워크는 둔해집니다. 풋워크가 둔해지면 문장은 힘을 잃어립니다. 힘이 없는 문장은 사람을 혹은 자기 자신까지도 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하면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나비처럼 가벼워서 하늘하늘 자유롭습니다. 손바닥을 펼쳐 그 나비를 자유롭게 날려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문장도 쭉쭉 커나갑니다. 생가해보면, 굳이 자기표현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사람은 보통으로, 당연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뭔가 표현하기를 원한다. 그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자연스러운 문맥 속에서 우리는 의외로 자신의 본모
습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나는 삼십오 년 동안 계속해서 소설을 써왔지만 영어에서 말하는 '라이터스 블록writer's block', 즉 소설이 써지지 않는 슬럼프 기간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쓰고 싶은데 써지지 않는 경험은 한 번도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나는 재능이 넘친다'는 식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럴 리는 없고요. 실은 매우 단순한 얘기인데, 내 경우에는 소설을 쓰고 싶지 않을 때, 혹은 쓰고 싶은 마음이 퐁퐁 샘솟지 않을 때는 전혀 글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쓰고 싶을 때만 자, 써보자' 라고 마음먹고 소설을 씁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대개는 번역(영어→일본어)을 합니다. 번역은 기본적으로 기술적인 작업이라서 표현 의욕과는 관계없이 거의 일상적으로 할 수 있고 동시에 글쓰기에 아주 좋은 공부가 됩니다(만일 번역을 하지 않았다면 뭔가 그런 쪽의 다른 작업을 찾아냈을 겁니다). 그리고 마음이 내키면 에세이 등을 쓰기도 합니다. 슬슬 그런 일을 해가면서 소설 안 쓴다고 죽을 것도 아닌데, 뭘 하고 그냥 모르는 척 살아갑니다.
하지만 한참 소설을 안 쓰다 보면 '이제 슬슬 써도 될 것 같은데'라는 기분이 들기 시작합니다. 눈 녹은 물이 댐에 고이듯이 표현해야 할 재료들이 안에 축적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느 날, 참을 수 없어서(라는 게 아마도 가장 좋은 경우) 책상 앞에 앉아 새 소설을 시작합니다. 지금은 별로 소설 쓸 기분이 아니지만 잡지에 보내야 하니 어쩔 수 없다. 뭐든 써야지' 같은 일은 없습니다.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으니까 마감 날도 없습니다. 그래서 라이터스 블록 같은 고통도 나와는 무관합니다. 굳이 말할 것도 없지만, 그것은 나로서는 정신적으로 상당히 편안한 일입니다. 글 쓰는 사람에게는 딱히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은데 뭐든 써야 하는 것만큼 스트레스 쌓이는 일도 없으니까요(그렇지도 않은가? 내가 오히려 특이한 경우인가?).
p.137
이건 오랜 나의 지론인데, 세대 간에 우열 따위는 없습니다. 어느 한 세대가 다른 한 세대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다, 라는 일은 일단 없습니다. 세간에선느 스테레오타입의 세대 비판이 자주 들려오지만 그런 건 전혀 의미 없는 공론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각각의 세대 간에는 우열도 없고 상하도 없습니다. 물론 경향이나 방향성에는 저마다 차이가 있겠지요. 그러나 질량 그 자체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혹은 굳이 문체로 삼을 만한 차이는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를 들어 요즘 젊은 세대는 한자를 읽고 쓰는 능력에 있어서는 선행하는 세대보다 약간 떨어질지도 모릅니다(실제로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를테면 컴퓨터 언어의 이해 처리 능력은 틀림없이 선행하는 세대보다 뛰어나겠지요.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런 것입니다. 각각 잘 하는 분야가 있고 잘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냥 그뿐입니다. 그렇다면 각 세대는 뭔가를 창조하는 데 있어서 각자 '잘하는 분야'를 척척 전면에 내세우면 됩니다. 자신이 잘하는 언어를 무기로 삼아서 자신의 눈에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것을 자신이 쓰기 쉬운 말로 써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세대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도 없고 또한 반대로 묘한 우월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p.150
장편소설을 쓸 경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를 쓰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 맥Mac 화면으로 말하자면 대략 두 화면 반이지만, 옛날부터의 습관으로 200자 원고지로 계산합니다. 좀 더 쓰고 싶더라도 20매 정도에서 딱 멈추고, 오늘은 뭔가 좀 잘 안된다 싶어도 어떻든 노력해서 20매까지는 씁니다. 왜냐하면 장기적인 일을 할 때는 규칙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쓸 수 있을 때는 그 기세를 몰아 많이 써버린다. 써지지 않을 때는 쉰다. 라는 것으로는 규칙성은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임카드를 찍듯이 하루에 거의 정확하게 20매를 씁니다.
그런 건 예술가가 할 만한 짓이 아니다. 그래서야 공장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요, 분명 예술가가 할 만한 짓은 아닌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왜 소설가가 예술가가 아니어서는 안 되는가. 대체 누가 언제 그런 것을 정했는가. 아무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방식으로 소설을 쓰면 됩니다. 우선 딱히 예술가가 아니어도 괜찮다'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훨씬 편안해집니다. 소
설가란 예술가이기 이전에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때에 나 좋을 대로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자유인의 정의입니다. 예술가가 되어서 세간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부자유한 격식을 차리는 것보다 극히 평범한,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자유인이면 됩니다.
이사크 디네센은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씁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매일매일 20매의 원고를 씁니다. 아주 담담하게, '희망도 절망도 없다'는 것은 실로 훌륭한 표현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네 시간이나 다섯 시간, 책상을 마주합니다. 하루에 20매의 원고를 쓰면 한 달에 600매를 쓸 수 있습니다. 단순 계산하면 반년에 3,600매를 쓰게 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해변의 카프카'라는 작품의 초고가 3,600매였습니다. 이 소설은 주로 하와이 카우아이 섬의 노스쇼어에서 썼습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곳이고 게다가 비가 자주 내려서 그 덕분에 일은 잘됐습니다. 4월 초에 쓰기 시작해 10월에 다 썼습니다. 프로야구 개막과 동시에 쓰기 시작해 일본 시리즈 시작할 때쯤에 끝냈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합니다. 그해에는 노무라 감독 휘하의 야쿠르트 스왈로스가 우승했습니다. 나는 오랜 세월 야쿠르트 팬이라서, 야쿠르트는 우승하지, 소설은 다 썼지, 아주 싱글벙글했던 게 기억납니다. 대체로 내내 카우아이 섬에 가 있었기 때문에 정규시즌에 진구 구장에 거의 가지 못했던 것은 유감이었지만.
p.157
그녀(출판사의 편집자)의 비평에는 아닌 게 아니라 그렇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고 수긍이 가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게 수긍하기까지 며칠씩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또한 '아니, 그렇지 않아. 내 생각이 옳아'라고 생각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제삼자 도입' 과정에서 내게는 한 가지 개인적인 규칙이 있습니
다. 그것은 '트집 잡힌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 어찌 됐건 고친다'는 것입니다. 비판을 수긍할 수 없더라도 어쨌든 지적받은 부분이 있으면 그곳을 처음부터 다시 고쳐 씁니다. 지적에 동의할 수 없는 경우에는 상대의 조언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고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방향성이야 어찌 됐든,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그 부분을 고쳐 쓴 다음에 원고를 재차 읽어보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전보다 좋아졌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생각건대, 읽은 사람이 어떤 부분에 대해 지적할 때, 지적의 방향성은 어찌 됐건, 거기에는 뭔가 문제가 내포된 경우가 많습니다. 즉 그 부분에서 소설의 흐름이 많든 적든 턱턱 걸린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은 그 걸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제거하느냐는 작가 스스로 결정하면 됩니다. 설령 '이건 완벽하게 잘됐어. 고칠 필요 없어'라고 생각했다고 해도 입 다물고 책상 앞에 앉아 아무튼 고칩니다. 왜냐하면 어떤 문장이 '완벽하게 잘됐다'라는 일은 실제로는 있을 수 없으니까.
이번의 고쳐 쓰기는 처음부터 순서대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가 된 부분, 비판받은 부분만 집중적으로 고쳐나갑니다. 그리고 고친 부분을 다시 한 번 읽어달라고 하고 그것에 대해 다시 토론을 해서 필요하다면 또 고칩니다. 그것을 다시 읽어달라고 해서 아직도 불만이 있다면 또다시 고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참에 다시 처음부터 수정해서 전체적인 흐름을 확인하고 조정합니다. 여러 부분을 세세하게 손질한 탓에 전반
적인 톤이 흐트러졌다면 그것을 고칩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편집자에게 정식으로 읽어달라고 합니다. 그 시점에는 머리의 과열 상태는 어느 정도 해소된 참이라 편집자의 반응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쿨하게 객관적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p.164
그렇게 나는 장편소설을 씁니다. 사람마다 각자 마음에 드는 작품도 있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도 있겠지요. 나 스스로도 과거에 쓴 작품에 대해 결코 만족하는 건 아닙니다. 지금이라면 좀 더 잘 쓸 수 있을 텐데' 하고 통감하는 일도 있습니다. 다시 읽어보면 여기저기 결점이 눈에 띄어서 뭔가 특별한 필요가 없는 한 내가 쓴 책을 손에 드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작품을 써낸 시점에는 틀림없이 그보다 더 잘 쓰는 건 나로서는 못 했을 것이다. 라고 기본적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그 시점에 전력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쏟아붓고 싶은 만큼 긴 시간을 쏟아부었고, 내가 가진 에너지를 아낌없이 투입해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말하자면 '총력전'을 온 힘을 다해 치른 것입니다. 그러한 '모조리 쏟아부었다'는 실감이 지금도 내게 남아 있습니다. 적어도 장편소설에 있어
서는 청탁을 받아서 쓴 적도 없고 마감에 쫓겨서 쓴 일도 없습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때에 쓰고 싶은 만큼 썼습니다. 그것만은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 부분은 이렇게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라고 후회하는 일은 일단 없습니다.
시간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매우 소중한 요소입니다. 특히 장편소설에서는 사전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내 안에서 나와야 할 소설의 싹을 틔우고 통통하게 키워가는 '침묵의 기간'입니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기분을 내 안에 서서히 만들어 갑니다. 그런 사전 작업에 들이는 시간, 그것을 구체적인 형태로 일으켜나가는 기간, 일어선 것을 냉암소에서 진득하게 '양생하는 기간, 그것을 밖으로 꺼내 자연의 빛을 쏘이고 단단히 굳어져가는 것을 세세히 검증하고 쿵쾅쿵쾅 망치질을 하는 시간…… 그런 과정 하나하나에 충분한 시간을 들였느냐 아니냐는 오로지 작가 본인만이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작업 하나하나에 들인 시간의 퀄리티는 틀림없이 작품의 '납득성'이 되어서 드러납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는 역력한 차이가 발생합니다.
p.167
그래서 나는 내 작품이 간행되고 그것이 설령 혹독한 -생각도 못 할 만큼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고 해도 '뭐, 어쩔 수 없지' 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할 만큼은 했다'는 실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전 작업에도 양생에도 진득하게 시간을 들였고, 망치질에도 충분히 시간을 들였다는. 그래서 아무리 혹독한 비판을 받아도 그것 때문에 위축되거나 자신감을 잃는 일은 일단 없습니다. 물론 약간 불쾌해지는 정도의 일
은 가끔 있지만, 그리 대단한 건 아닙니다. 시간에 의해 쟁취해낸 것은 시간이 증명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면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 그러한 확신이 내 안에 없었다면 아무리 배짱 좋고 태평한 나라도 어쩌면 침울해졌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은 똑 부러지게 했다'는 확실한 실감만 있으면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게 없습니다. 그다음은 시간의 손에 맡기면 됩니다. 시간을 소중하게, 신중하게, 예의 바르게 대하는 것은 곧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성을 대할 때와 똑같은 일이지요.
p.169
내 작품이 우수한지 어떤지, 만일 우수하다면 어느 정도나 우수한지, 그런 건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건 본인이 나서서 이러니저러니 할 일이 아니지요. 작품에 대한 판단은, 말할 것도 없이,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내립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명확하게 판정해주는 것은 시간입니다. 작가는 입 다물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현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그 작품들에 아낌없이 시간을 들였고, 카버의 말을 빌리자면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한 것'을 써내려고 노력했다는 정도입니다. 나의 어떤 작품도 '시간이 있었으면 좀 더 잘 썼을 텐데'라는 것은 없습니다. 만일 잘 못 쓴 것이 있다면 그 작품을 쓴 시점에서 내가 아직 작가로서의 역량이 부족했다 - 단지 그것 뿐입니다. 유감스럽기는 해도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부족한 역량은 나중에 노력해서 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번 잃은 기회를 돌이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p.175
소설을 쓴다는 것은 밀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한없이 개인적인 일입니다. 혼자 서재에 틀어박혀 책상을 마주하고 (대부분의 경우) 아무것도 없었떤 지점에서 가공의 이야기를 일궈내고 그것을 문장의 형태로 바꿔나갑니다. 형상을 갖고 있지 않았던 주관적인 일들을 형상이 있는 객관적인 것으로(적어도 객관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환해간다 -극히 간단히 정의하자면 그것이 우리 소설가가 일상적을 행하는 작업입니다.
p.222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내가 어렸을 때는 사회 자체에 '발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인과 제도가 서로 다투는 듯한 문제도 그 공간에 쭉쭉 흡수되어 그다지 큰 사회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사회 전체가 둥글둥글 굴러갔기 때문에 그 동력이 다양한 모순이나 욕구불만frustration을 삼켜 들였습니다. 말을 바꾸자면, 난처할 때 도망칠 수 있는 여지나 틈새 같은 것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도성장 시대도 끝나고 거품경제 시대도 끝나버린 지금은 그런 피난 공간을 찾아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큰 흐름에 내맡기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식의 대략적인 해결 방법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습니다.
'도망칠 곳이 부족한' 사회가 몰고 온 교육 현장의 심각한 문제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든 새로운 해결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만한 장소를 우선 어딘가에 마련한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어떠한 장소인가.
개인과 시스템이 서로 자유롭게 이동하고 온건하게 협의negotiate하면서 각자에게 가장 유효한 접점을 찾아나가는 것이 가능한 장소입니다. 말을 바꾸자면, 한 사람 한 사람이 그곳에서 자유롭게 팔다리를 쭉쭉 펴고 느긋하게 호흡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제도, 엄격한 상화 관계hierarchie, 효율, 따돌림, 그런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소입니다. 누구라도 그곳에 자유롭게 들어가고, 거기서 자유롭게 나오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개인'과 '공동체'의 완만한 중간 지역에 속하는 장소입니다. 그곳의 어디쯤에 자리를 잡을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재량에 맡겨집니다. 우선 나는 그곳을 '개인 회복 공간'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p.224
개인적인 얘기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학교 시절의 나에게 가장 큰 구원은 그곳에서 몇몇 친구를 사귄 것, 그리고 많은 책을 읽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아무튼 실로 다양한 종류의 책을 불타는 가마에 삽으로 푹푹 퍼 넣듯이 닥치는 대로 허겁지겁 읽었습니다. 책을 한 권 한 권 맛보고 소화해나가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너무 바빠서(미처 소화해내지 못한 것도 많았지만) 그것 이외의 일에 대해 머리를 굴릴 만한 여유는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나로서는 그게 오히려 좋았는지도 모른다고 이따금 생각합니다. 내 주위의 상황을 둘러보고 그곳에 있는 부자연스러움이나 모순이나 기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을 정면으로 따지고 들어갔다면 아마 막다른 곳에 내몰려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와 동시에, 다양한 종류의 책을 샅샅이 읽으면서 시야가 어느 정도 내추럴하게 상대화'된 것도 십 대의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책에 묘사된 온갖 다양한 감정을 거의 나 자신의 것으로서 체험하고, 상상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오고 가면서 온갖 신기한 풍경을 바라보고 온갖 언어를 내 몸속에 통과시키는 것으로 내 시점은 얼마간 복합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즉 현재 내가 서 있는 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다른 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나 자신의 모습까지 나름대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가능해진 것입니다.
어떤 일을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아무래도 세계가 부글부글 끓어서 바짝 졸아듭니다. 온몸이 긴장하고 발걸음이 무거워져 자유롭게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시점에서 자신이 선 위치를 바라보게 되면, 바꿔 말해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뭔가 다른 체계에 맡길 수 있게 되면, 세계는 좀 더 입체성과 유연성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건 인간이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자세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독서를 통해 그것을 배운 것은 나에게는 큰 수확이었습니다.
만일 책이라는 게 없었다면, 만일 그토록 많은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썰렁하고 뻑뻑한 모습이 되었을 것입니다. 즉 나에게는 독서라는 행위가 그대로 하나의 큰 학교였습니다. 그것은 나를 위해 설립되고 운영되는 맞춤형 학교고, 나는 거기서 수많은 소중한 것들을 몸으로 배워나갔습니다. 까다로운 학칙도 없고 수치에 의한 평가도 없고 격렬한 순위 경쟁도 없었습니다. 물론 따돌림 같은 것도 없습니다. 나는 커다란 '제도' 안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책을 통해 그러한 나 자신만의 별도의 '제도'를 멋지게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머릿속에 그리는 ‘개인 회복 공간'은 바로 그런 것에 가까운 곳입니다. 아니, 꼭 독서만은 아닙니다. 현실의 학교 제도에 잘 섞이지 않는 아이라도, 교실에서의 공부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아이라도, 만일 그런 맞춤형 개인 회복 공간'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에게 맞는 것,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것을 찾아내고 그 가능성을 자신의 공간에서 키워나갈 수만 있다면, 훌륭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도의 벽'을 극복해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마음의 존재 방식 개인으로서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평가해주는 공동체의 혹은 가정의 뒷받침이 필요합니다.
p.228
어떤 시내에나 어떤 세상에나 상상력이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상상력과 대척점에 잇는 것 중의 하나가 '효율'입니다. 수만 명에 달하는 후쿠시마 사람들을 고향 땅에서 몰아낸 것도 애초의 원인을 따져보면 바로 그 '효율'입니다. '원자력발전은 효율성이 높은 에너지고 따라서 선이다'라는 발상이, 그런 발상에서부터 결과적으로 날조되어진 '안전 신화'라는 허구가,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을, 회복하기 어려운 참사를, 이 나라에 몰고 온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가진 상상력의 패배, 라고 말해
도 무방할지 모릅니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효율'이라는 성급하고 위험한 가치관에 대항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고와 발상의 축을 개개인 속에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축을 공동체-커뮤니티로 키워나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학교교육에 바라는 것은 아이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키워주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키워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아이들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도 아니고 교육 설비도 아닙니다. 더더구나 정부나 지자체의 교육 방침 같은 건 결코 아닙니다. 아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달리기를 잘하는 아이가 있고 그 한편에는 달리기를 별로 잘하지 못하는 아이가 있는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들이 있고 그 한편에는 상상력이 별로 풍부하다고는 할 수 없는 하지만 아마도 다른 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할 아이들이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그것이 사회입니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키워주자'라는 것이 하나의 정해진 '목표'가 되어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또 일이 이상해질 것 같습니다.
내가 학교에 바라는 것은 '상상력을 가진 아이들의 상상력을 압살하지 말아달라'는 단지 그것뿐입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하나하나의 개성에 살아남을 수 있는 장소를 부여해주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학교는 좀 더 충실하고 자유로운 장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병행해 사회 자체도 좀 더 충실하고 자유로운 장소가 될 것입니다.
나는 한 사람의 소설가로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긴 내가 이런 생각을 해봤자 당장 뭐가 어떻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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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왜 당신과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이 주인공인 소설은 쓰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이를테면 내가 지금 육십 대 중반인데, 왜 그 나이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쓰지 않느냐. 자기 또래의 삶에 대해 말하는 것이 작가로서 자연스러운 일 아니냐, 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는 좀 잘 모르겠는데, 작가가 왜 자신과 같은 나이 대의 사람에 대해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요. 왜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일까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내가 소설을 쓰면서 가장 기쁘게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왜 그 멋진 권리를 스스로 내던져야 하는 걸까요.
『해변의 카프카』를 썼을 때, 나는 쉰을 좀 넘은 나이였지만 주인공을 열다섯 살 소년으로 설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글을 쓰는 동안 나 자신을 열다섯 살 소년처럼 느꼈습니다. 물론 그것은 지금 현재 실제로 열다섯 살인 소년이 느낄 만한 '느낌'과 똑같은 것은 아니겠지요.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열다섯 살이었던 때의 감각을 가공으로 '현재'에 옮겨 온 것입니다. 하지만 소설을 쓰면서 나 자신이 열다섯 살이었던 때에 실제로 숨 쉬었던 공기나 실제로 보았던 빛을 거의 그대로 생생하게 내 안에서 재현할 수 있었습니다. 아주 깊숙한 곳에 오래도록 감춰져 있던 감각을 문장의 힘으로 멋지게 끌어낸 것입니다. 그건 뭐랄까, 정말로 멋진 체험이었습니다. 이런 것은 어쩌면 소설가가 아니고서는 맛볼 수 없는 감각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멋진 것'을 단순히 나 혼자 즐기기만 해서는 작품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상대화해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즉 그 기쁨을 독자와 공유하는 형태로 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나카타 씨라는 육십 대 '노인'을 등장시켰습니다. 나카타 씨도 어떤 의미에서는 나의 분신입니다. 나의 투영입니다. 그 안에 그런 요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카프카 소년과 나카타 씨가 병행해 서로 호흡을 주고받는 것으로 소설은 건전한 균형을 획득합니다. 적어도 작자인 나는 그렇게 느꼈고 지금도 똑같이 그렇게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