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오는 전화는 좋은 내용일 수가 없다. 그렇게 부산과 서울을 오르내렸지만 결국 나와 동생은 아빠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물도 분노도 없었다. 그저 어딘가 허전했다. 슬픈 마음이 차오르지 않는 건 실감이 나지 않아서일까. 다 끝난 거야, 이제. 마음이 갑자기 차분해진 이유가 아무것도 소용없었다는 허무함인지, 죄의식 뒤에 숨은 안도감인지 더 깊이 생각하기에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빈소는 남천성당 지하 장례식장이었다. 아빠의 장례식은 아름다웠다. 성당에서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아빠를 위한 연도가 밤낮으로 끝없이 이어졌다. 나는 앉은 채 졸다시피 기도문을 외다가 견딜 수 없어지면 구석방에 들어가 쪽잠을 잤다. 사흘 내내 의식이 몽롱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하다가도 어떤 때는 천국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성당에서도 아빠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이, 아주 많이 오셨다. 첫 손님을 맞으려고 천천히 걸어 나오는 엄마는 슬픔에 잠긴 왕비처럼 보였다. 지금 이런 생각이라니, 뇌가 약간 이상해진 건가? 생존을 위한 호르몬 작용인가 봐. 내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 나이가 지긋하신 한 아주머니께서 엄마를 꼭 안아주셨다. 품 안에서 엄마가 뭐라고 웅얼거리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숨을 죽였다.
⌜언니...⌟
짧은 정적은 마치 영원 같았다.
⌜... 이게 다 꿈이었으면 좋겠어요.⌟
많아 봐야 스물두세 살이었던 내 손님들은 하나같이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직 장례식이 익숙할 나이가 아니다. 제일 친한 대학교 동기들이 도착했을 때 나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의자에 늘어져 있다가 무심코 어, 왔나, 하고 맞이했더니 한 친구가 움찔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내 부산 사투리를 처음 들었단다. 그제야 서울말 스위치가 꺼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통제 시스템이 여러모로 뒤죽박죽이었다.
밴드 동아리 선배들도 왔다. 항상 상냥했던, 베이스 치는 언니를 보니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한 달 전 헤어진 전 남자친구도 거기에 함께였다. 조용히 인사만 하고 돌아가려나 했는데, 잠깐 둘만 남았던 순간에 손깍지를 끼면서 다시 잘해보고 싶다는 얘기를 꺼내는데 뭐라 표현하기도 어려운 짜증이 났다. 그래도 부산까지 와준 게 고마워서 애써 웃으며 밀어냈다.
고등학교 친구가 왔을 때는 태연하게 장난을 쳤다. 친구는 당황해서 너 진짜 괜찮은 거냐고 말을 더듬었다. 내가 생각해도 좀 이상하긴 했지만 그 순간에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기분이었다. 슬픔은 그렇게 파도처럼 뚜렷한 이유도 없이 차오르다가 한순간에 사라지곤 했다. 하긴 믿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할 때 아주 잠깐이라도 그걸 잊을 수 없다면 사람은 더 금방 망가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