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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버 Oct 24. 2021

한 사람을 몇십 년간 함께 지켜온 사람들





⌜느그 아빠는 이제 하느님 아들로 돌아갔다.⌟


할머니는 자꾸 이런 말을 했다. 시선은 맞닿아 있어도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눈은 아주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사실 모두가 그랬다. 스스로 듣고 싶은 말, 혼자서는 참기 힘든 말을 우리는 자꾸만 허공에 던졌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할머니는 누구에게 당부하듯이 조용히 되뇌었다. 마음이 강한 할머니는 항상 우리 집안의 중심이었다.


할아버지는 빈소에서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내내 술만 마셨다. 내 큰아들이 죽었는데 다 무슨 소용이고, 성난 투로 이렇게 말하며 술잔을 내려놓는 모습을 지나치다 언뜻 보았다. 아빠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도 할아버지는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 그 속을 생각하니 마음이 저렸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감당해야만 했다.




⌜니 아빠가 그래도 가장으로서 누릴 건 다 누리고 갔다.⌟


늘 쾌활한 고모는 그때도 긍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다. 가족들은 그렇게 다들 아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그때는 그랬지, 이때는 이랬지. 하지만 작은 아빠는 내내 조용했다. 아빠도 작은 아빠도 원체 말수가 적다. 형제가 참 닮았다. 아무리 오랜만에 만나도, 반가워도 두 분의 대화는 눈짓과 짧은 인사가 끝이었다. 그저 지켜보다가 거들 일이 생기면 거드는, 그런 행동들이 마음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성당 사람들이 기억하는 아빠는 숫기가 없고 마냥 선한 사람이었다. 조용하고 차분하고, 어딘가 깊이가 있는 사람. 나는 잘 몰랐지만 아빠는 성당에서 봉사 활동도 많이 했었고, 공동체 안에서 꽤 인기가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와 동생은 장례식 내내 여기저기 손님들께 인사를 드리느라 바빴다. 한 아주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아빠가 하도 착해서 집에서도 느그한테 큰소리 한번 안 냈제?⌟


그 말씀에 나와 동생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건... 아닌데요...⌟




⌜아빠 잘생기지 않았나?⌟


손님이 거의 다 돌아간 늦은 밤이었다. 영정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던 엄마의 뜬금없는 말에 나는 그만 웃어버렸다. 사실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었는데, 사진을 다시 자세히 보니 눈썹이 짙고 머리칼이 굽이치는 아빠는 꽤 미남이었다. 무뚝뚝한 아빠도 엄마에게는 종종 로맨티시스트였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언젠가 아빠가 엄마에게 선물했던 시집 속표지에 적혀 있던 글귀를 봤으니까. '世界 最高의 詩人에게.' 아마도 엄마가 시인으로 등단하기 전이었으리라.


할머니는 엄마가 유난히 애틋하다. 결혼 후 두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이어진 아빠의 오랜 투병 생활, 두 번의 대수술과 신장 공여까지. 엄마는 그렇게 고된 세월을 지나며 시댁 식구들과 누구보다 가까운 가족이 되었다. 아빠는 이제 세상에 없어도 우리는 여전히 할머니 댁에 자주 들른다. 언제였던가, 엄마가 잠깐 부엌에 간 사이 내 귀에만 들려온 할머니의 중얼거림에 나는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다.


⌜옥이가 고생만 했지, 옥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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