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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버 Oct 23. 2021

처음으로 현실을 감당할 수 없었던 날





엄마의 신장을 떼어서 아빠에게 이식하는 수술이니 동생과 내가 보호자 역할을 해야 했다. 수술 동의서에는 동생이 서명했고, 당일에는 다른 가족들과 함께 내가 곁을 지켰다. 수술이 끝나고 엄마 아빠가 차례로 실려 나왔던 순간은 아직도 선명하다. 마취 상태로 침대에 누운 엄마는 아야 아야, 하면서 앓았고 아빠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나는 수술이 잘 되었다는 이야기에 기대어 겁에 질린 마음을 애써 달랬다.


얼마 지나지 않아 3월이 되었다. 아빠도 엄마도 회복이 채 끝나지 않았지만 나와 동생은 새 학기를 맞이하기 위해 서울로 가야 했다. 병원은 기차역 근처였다. 아빠는 출입이 통제되는 1인 회복실에 있었다. 우리는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아빠 우리 갈게, 하고 쭈뼛거리며 인사했다. 아빠도 언제나처럼 어색한 눈짓과 함께 어어, 하고 소심하게 대답했다. 햇볕이 잘 드는 병실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그동안 불안에 시달려 황폐해진 마음속에 조금씩 작은 희망이 싹트는 듯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아빠는 뇌출혈로 쓰러졌다.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아빠를 처음 봤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슬픔도 좌절도 아니었다. 분노.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갈 곳 잃은 분노밖에 없었다. 머리를 밀리고 입에는 산소 호흡기를 낀, 얼굴이 퉁퉁 부어서 얼핏 봐서는 알아보기도 힘든 아빠의 모습을 보니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침대 머리맡에서 덜덜 떨던 내가 이를 악물고 끄집어낸 첫마디는 겨우 이거였다.


⌜이게 뭐야...? 뭐냐고!⌟





아빠는 예민해서 다른 사람과 몸이 닿는 걸 아주 꺼렸다. 그래서 첫 번째 이식 수술 때에도 간병인 대신 엄마가 머리를 감겨주러 와야 했다. 그런 아빠의 얼굴을 매일 남이 닦아주어야 하는 상황이 불편했다. 중환자실 앞에 붙은 이름 중 아빠 나이가 제일 젊다는 사실도 싫었다. 다 화가 났다. 어느 날엔가 동생이 잠깐 외출했다가 술에 잔뜩 취해서 돌아왔다. 몸도 제대로 못 가누던 동생은 침대에 엎어져서 자기는 새내기라며 옹알거렸다. 가슴이 찢어졌지만, 엄마가 그 소리를 들을까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나는 그날 동생을 때렸다.

중환자실 면회는 한 번에 한 명씩만 할 수 있어서 가족들은 늘 교대로 들어갔다. 나는 그 시간에 절박하게 매달렸다. 언제가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평생 해본 적 없었던 모든 말들을 쏟아냈다. 부쩍 거칠어진 손을 붙잡고 있으면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았다. 그래도 우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아서 눈물을 억지로 삼키곤 했다. 몇 번째였던가, 나는 중환자실을 나서다가 우리 가족이 다시는 한 공간에 모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절망했다.




부산과 서울을 오가는 동안 1학기는 무정하게 흘러갔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오는데 고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제는 며칠 넘기기 어려울 것 같으니 오늘 내려오라고. 그런 전화도 두 번째였다. 아니, 세 번이었던가.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방금 들은 얘기를 되풀이하다가 나는 계단에 선 채로 목놓아 울고 말았다. 다음 수업으로 종종걸음 치던 학생들의 당혹스러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알 게 뭐야. 내 세상이 다 무너지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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