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를 떠올리면 코 끝에서 병원 냄새가 난다. 부자연스럽게 깨끗한 소독약 냄새가 나는, 새하얀 중환자실의 무거운 공기. 그래서 꽤 오랫동안 알코올 냄새만 맡으면 아빠 생각을 했었다. 중환자실 침대 옆에 혼자 망연히 서서 이상할 만큼 조용하다는 생각을 하던 순간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매일 여기저기서 소독약 냄새를 맡다 보니 이제는 어쩐지 흐릿해졌다. 기억이 덧씌워지다 보면 무엇이든 결국에는 잊히는 걸까.
기억 속의 아빠는 늘 아팠다. 거뭇하고 거친 손목에는 흉터와 주사 자국이 가득했다. 아빠가 7살일 때 이 병원 저 병원을 돌아다니다 '신부전'이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으니 평생을 환자로 살았다. 오래 앉아있기가 힘들어서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로, 대학교는 띄엄띄엄 휴학을 해가며 졸업했다. 엄마는 아빠의 병을 알면서도 결혼했고, 나와 동생이 차례로 태어났다.
내가 유치원에 다닐 무렵 고모가 한쪽 신장을 아빠에게 떼어줬다. 어둑한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아 땅에 닿지도 않는 짧은 다리를 흔들며 엄마를 기다렸던 날이 혹시 그때였나. 병원 침대 머리맡에서 환자복을 입은 아빠와 양갱을 나눠 먹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아무것도 모르던 나이였으니 불안하지도 않았다. 그게 동생이 태어나기 이전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집 식탁 위에는 항상 아빠 이름이 적힌 약봉지가 있었고, 운전을 하던 아빠가 갑자기 통증으로 움직이지 못해서 병원으로 옮겨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빠의 병에 대해서 누구도 나와 동생에게 정확히 얘기해준 적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엄마가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며 우리를 불러 앉혔다. 동생이 1지망이었던 대학교에 합격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아빠가 많이 아파서 이제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그래서 엄마가 그동안 신장 기증을 준비해왔다고. 엄마가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동안 옆에 앉은 아빠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속에서 요동치는 불길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다 괜찮을 거라는 엄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결국 아빠의 지친 몸은 두 번째 신장 이식 수술을 견뎌내지 못했다.
몇 달, 아니 몇 년 동안 아빠를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찢긴 상처가 터지고 다시 터져서 피가 흐르는 것처럼 한 번 눈물이 나기 시작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아빠를 잊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도 할 수 없었다. 추억을 감당하기에 나는 너무 나약했고, 그래도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야 했으니까.
아빠의 장례식 이후 엄마는 오랫동안 누워 지냈다. 갓 대학생이 된 동생은 아무렇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 사이에서 눈치만 봤다. 몇 해가 지나면서 우리의 상처는 흉터로 아물었다. 언제였을까, 정말 오랜만에 셋이서 '아빠는 이랬지, 아빠라면 이렇게 말했을 거야'하는 얘기를 나누다가 웃었던 날, 엄마는 잠깐 침묵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 이렇게 웃는 날도 오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