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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뜨기 Oct 17. 2020

잠풍(1)_가로막힌 방충망은 목숨 지키는 보호망

단편소설 <잠자는 풍뎅이>

땅거미가 내린다. 거미줄처럼 보이지 않는 줄을 타고 눈물처럼 스르르 내려온다. 어스름 깔린 풀숲마다 고운 소리 삐죽삐죽 내비친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기 전에 조율하듯 풀벌레들이 잠시 숨 고르기를 하더니 저마다의 소리를 풀어헤친다. 


제멋대로인데도 귀에 거슬리지 않은 것을 보니 그들끼리의 어울림이 있나 보다. 누가 지휘자고 누가 연주자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청중임이 확실하다. 눈물겹게 기꺼운 청중이다. 혼자 듣기에 너무 아깝고 버겁지만 이 숲에 인간이라곤 나밖에 없으니 홀로 감상을 할 수밖에.


어그러진 뼈들이 제 자리를 찾는 것 같고, 굳어진 근육들이 부드럽게 풀리는 듯하다. 옹달샘에서 얼음장 같은 샘물을 한 움큼 떠 마신 양 머리는 맑은 유리처럼 말짱해졌다. 밝은 낮을 닫고 어두운 밤을 여는 어귀에서 나는 기지개를 켜고 새 세상의 빗장을 풀었다.


병풍처럼 지그재그로 난 비상계단을 따라 도서관 3층으로 올라간다. 한 발씩 내딛는 발길에 부러 힘을 줬다. 힘이 들기에 그러했다. 내 발은 종일 시달린다. 학교 골골샅샅이 다니며 나무를 다듬고 잡풀을 제거한다. 몸은 젖은 빨래처럼 후줄근해진다. 그래서 일부러 종아리에 힘주며 계단을 오른다. 도장 찍듯이 꾹꾹 밟으며 오른다. 그러면 오히려 힘이 생긴다. 비쩍 마른 수수 줄기를 꽉 비틀면 찔끔 즙이 스미듯 지친 다리 근육에 힘이 생긴다.


도서관 한 켠의 내 자리, 늘 그 자리다. 그 자리에 앉으면 피로가 풀린다. 눈 익은 책이 꽂혀있고, 손 익은 필기구가 자리한 내 자리. 칸막이가 되어있어 나만의 작은 공간이 마련된다. 아파트 화장실 안의 작은 욕조에 따뜻한 물을 채우고 몸을 담그듯 난 엉덩이를 의자에 바투 붙이고 쉬는 것이다.


책상 앞 책꽂이에 꽂여 있는 책을 꺼냈다. 낮 내내 고스란히 서있었던 그도 나처럼 피곤하지 않았을까? 난 비스듬한 독서대에 그 책을 살포시 눕혔다. 그리고 펼쳤다. 두 팔 벌리고 벌러덩 누워 천정을 바라보듯 책은 제 앙가슴을 드러내 보였다. 내 눈길은 책을 알뜰살뜰 더듬으며 가슴에 박힌 글자들을 쪼아 먹었다. 창고에 볏가마  쌓이듯 머릿속에 글자들이 차곡차곡 쟁여갔다. 정수리 위의 형광등은 하얀 불빛을 내리쏘고, 그 불빛은 하얀 종이를 비추고, 하얀 종이는 그 빛을 내 얼굴에 되비쳤다. 내 얼굴이 환해졌다.


여름의 막바지, 밤이면 제법 선선한 기운이 감돈다. 밤하늘의 백조자리도 나그네새처럼 철 따라 떠날 채비를 하고, 새로운 별자리들이 그 자리를 자리하려 한다. 아직도 모기들은 극성이지만 오갈 든 풀잎처럼 기운 잃어 보인다. 불빛 따라 실내로 들어온 날벌레들이 형광등에 자꾸 부딪치며 징징거린다. 내일 아침이면 그네들은 죽어있을 것이다. 내일이 아니라도 모레면 죽을 판이다. 이 건물 안에서 맥없이 죽어야 하는 그들이 측은하다. 그들은 건물 안이 아니라 수풀 속에서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인공 불빛에 꾀여 문틈 사이로 겨우 들어왔지만 통발 안의 물고기처럼 다시는 나갈 수는 없는 날벌레의 운명. 형광등 주변만 맥없이 맴돌다 지쳐 죽을 가련한 삶이다. 달빛과 별빛 따라 날갯짓을 하며 짝을 만나고 후손을 남긴 후 죽어야 하는데, 마약에 중독된 듯 강한 인공 빛에 홀려 자꾸만 모여드는 어리석은 이들. 날벌레야, 너희들을 가로막는 건물의 방충망은 오히려 너희들을 살리는 보호막이란다! 장작개비가 불똥 튀기며 타닥거리듯 자꾸만 형광등에 부딪치며 다닥거리는 날벌레들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다시 책을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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