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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뜨기 Jul 07. 2020

그 병을 물병이라고도 하죠

고추_역병

고추가 병들었다. 하나둘 시름시름 앓더니 한판 벌어진 전투장처럼 폐허다. 말라비틀어진 고추 열매는 피투성이처럼 검붉은 피딱지가 졌다. 풋풋함을 찾아볼 수 없다. 어쩜 온 밭이 이렇게 망가질 수 있을까?


역병은 돌림병이다. 

돌림병이 떠돌면 바짝 움츠려야 한다. 빗발치듯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기 위해 낮은 포복을 취해야 한다. 지금 지구는 돌림병의 기운에 잠겨있다. 

그러께 그리고 그끄러께부터 돌림병은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가축인 돼지에게는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돌았고, 과수인 사과나무에는 화상병이 돌았다. 아직도 이 돌림병이 끝나진 않았다. 그래도 이 돌림병이 온 국민을 엎드리게 하진 않았다. 관계기관과 농민들만 바짝 긴장하며 경계했을 뿐이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사람 사이를 맴도는 돌림병이다. 사람이라면 무서움이 감돌 수밖에 없다.


사람이든 가축이든 작물이든 역병이라는 이름이 붙은 병은 순식간에 퍼지는 것이 큰 문제다. 바다에 기름이 새면 오일펜스를 쳐서 가둬야 하듯, 역병이 발생하면 신속하고 빈틈없이 차단해야 한다. 이러면 역병은 통제가 가능하다.



고추에 역병이 발생하면 더 이상 번지지 않도록 조치해야 한다. 이미 병에 걸린 고추를 살리고자 헛된 애를 쓰기보다는 멀쩡한 고추가 병에 걸리지 않도록 보호를 해야 한다. 병은 나름의 수단으로 퍼진다. 어떤 병은 접촉을 통해서, 어떤 병은 공기를 통해서 퍼진다. 고추 역병은 물을 통해 번진다. 그러므로 물길을 잡아야 한다.


고추 역병을 물병이라고도 부른다. 물을 통해 번지기 때문이다. 6월 상순부터 발생하지만 고온다습한 장마철에 크게 번진다. 역병균은 알처럼 난포자 형태로 흙에 생존하는 토양전염성균이며, 물을 매우 좋아하는 반수생 곰팡이다. 수생균은 붕어처럼 물속에서만 사는 균이라면, 반수생균은 개구리처럼 물과 뭍을 오가며 물가에서 잘 사는 균이다. 역병균은 운동성이 있는 유주자가 만들어져 올챙이가 헤엄치듯 물속에서 움직일 수 있다.    




역병균은 흙에 있기 때문에 뿌리와 지표면의 줄기에서 병이 시작되고, 빗물에 흙탕물과 함께 튕겨 잎과 열매에도 병이 걸린다. 역병에 걸린 고추는 아래쪽 줄기가 잘록해지며 썩고, 줄기 위쪽으로 감염되면 포기 전체가 울긋불긋 검게 말라죽는다. 이 병을 방치하면 고추밭 전체가 병든 밭이 되기도 한다. 그해 농사는 망친 것이다.



역병균은 토양에 생존하는 균이므로 한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해에도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지난해에 역병이 발생한 밭에는 고추 대신 콩이나 옥수수 등 다른 작물로 심어야 한다. 토마토, 가지, 감자도 위험하다. 이들은 고추와 사촌지간이라서 고추와 마찬가지로 고추 역병에 쉽게 감염되기 때문이다. 

역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바닥에서 흙이 튕기지 않도록 부직포 등을 바닥덮기 하고, 비가 고이지 않고 바로 빠지도록 배수로를 갖춰야 한다. 이랑이 높고 고랑이 깊으면 물이 고이지 않아 역병 발생이 적다. 같은 밭에서도 물이 모이는 낮은 곳에서 역병이 먼저 발생한다. 


토질에 따라서도 다른데, 모래흙에 심긴 것보다 찰흙에 심긴 고추가 역병에 더 잘 걸린다. 우리나라 지역별 역병 발생을 살펴보면 모래 성분이 많은 경북 예천, 충북 충주와 진천은 역병이 적게 발생하지만, 찰흙 성분이 많은 경북 의성과 청송과 영양, 전남 해남, 전북 고창 등지는 역병 발생이 많은 편이다. 


역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장마 전부터 예방주사를 맞듯이 보호용 살균제를 주는 것이 좋으며, 역병이 발생한 후에는 침투이행성 살균제를 살포해야 한다.


보호용 살균제로는 쿠퍼, 코사이드, 쿠퍼사이드, 다코닐에이스 등이 있다. 


치료용 살균제로는 포름디, 차무로, 리도밀큐골드, 벨리스플러스, 미리카트, 명작, 오티바, 후론사이트, 프로키온 등이 있다.


농약 말고도 역병을 예방하는 방법이 있는데, 바로 아인산염이다. 아인산염은 축구선수로 비유하자면 미드필드에서 상황에 따라 공격도 하고 수비로 하는 미드필더다. 역병균의 인산 대사작용을 방해하여 병균이 자라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공격과, 작물이 인산을 흡수하여 병에 견디는 힘을 키워주는 수비를 한다.


아인산 P-H구조

인산(H3PO4) 은 인 하나에 수소 세 개와 산소 네 개인데, 아인산(H3PO3)은 인산보다 산소가 하나 적은 인 하나에 수소 세 개와 산소 세 개다. 아인산은 자연계에 드문 P-H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 P-H구조가 역병균이나 노균병균 등 유주자를 만드는 난균류의 인산 대사작용을 방해하여 균을 죽이거나 억제시키며, 작물의 방어시스템을 자극하여 병에 걸리지 않게 한다.


아인산염은 물에 잘 녹으며, 식물체의 목질부와 사관부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줄기와 뿌리에 발생하는 역병균을 효과적으로 방제할 수 있으며, 사람과 가축에 대한 독성도 매우 낮고, 환경오염의 우려도 거의 없으며, 일반 농약에 비해 가격이 매우 저렴하다.  


아인산염은 잎과 줄기보다는 물뿌리개에 담아 뿌리 부분에 부어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열흘 간격으로 두세 번 준다. 농도는 병이 발생하기 전에는 예방 차원에서는 2000배액을, 병이 발생한 후에는 치료용으로는 1000배액을 준다.  


아인산염을 만드는 방법은 쉽다. 아인산염과 수산화칼륨을 각각 물에 녹인 후 섞어주면 된다. 수산화칼륨을 섞는 이유는 산도(pH)를 맞춰주기 위함이다. 아인산은 황산이나 염산처럼 강산성 물질이다. 수산화칼륨을 섞어서 산도를 pH6 내외로 조정하여 사용하면 된다. 우리가 뜨거운 물을 마시면 입안이 델 수 있으므로 찬물을 섞어 미지근하게 하면 안심하고 물을 마실 수 있는 것과 같다. 


아인산염 1000배액을 만드는 방법이다. 물 20L에 아인산 20g과 수산화칼륨 18g을 혼합한다. 즉 물 한 말에 아인산과 수산화칼륨을 밥 수저로 각각 한 수저 양이다. 



고추 품종 중에선 역병에 강한 품종이 따로 있다. 바로 PR계통이다. 품종 이름에 PR이 붙은 것은 역병에 강하다는 뜻이다. 가령 PR조커, PR금강석, PR스마트, PR골리앗킹, PR건초왕 등등. 

PR(Phytophthora Resistance)은 역병(Phytophthora)에 저항하다(Resistance)는 뜻이다.



병은 치료보다 예방이다. 감기에 걸린 후 약을 먹기보다는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몸을 따뜻하게 하고 공기가 건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다. 모기의 애벌레인 장구벌레는 물에 산다. 그러므로 집 주변에 고인 물만 없애도 모기의 발생을 상당히 줄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밭에 물이 고이지 않게만 해도 고추 역병을 상당히 줄일 수 있다. 고추 역병은 물병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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