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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과일을 먹긴 하지만

수박

by 시골뜨기

봄 초리이자 여름 어귀인 이즈막, 까까머리 모가 성깃한 논배미에 어스름이 어슬렁 내리면 제 세상 만난 악머구리가 볼때기를 부풀리며 개굴개굴. 오월, 아직은 봄이다.


시내에 나가니 횡단보도 옆 파란 트럭에 계란 모양 수박이 얼기설기 쌓였다. 잘 익은 맛보기 수박이 광대처럼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이끈다. 아내는 조금 싸기에 꼭지 없는 수박을 골랐지만 난 좀 비싸더라도 꼭지 달린 수박을 택했다.


짙은 솔빛 바탕에 삐뚤빼뚤 무늬가 또렷한 수박에 부엌칼을 들이댔다. 손에 힘을 주어 칼날의 절반을 수박 속에 찌른 후 반으로 갈랐다. 잘 익은 수박이라면 꽁꽁 언 저수지의 얼음장처럼 쩍쩍거리며 갈라질 텐데 이 수박은 질긴 고깃덩어리를 자르듯 힘겹게 갈라졌다.


겉 빛깔만 봐서는 잘 익어 보이지만 속을 보니 비곗살 같은 껍질은 너무 두껍고 속살엔 힘줄 같은 흰 띠가 있다. 이 부분은 씨앗이 생기는 곳인데 지게미 같은 덜 여문 씨가 듬성듬성 달렸다. 제대로 자란 수박이라면 씨앗이 까말 텐데 미처 익지 못한 것이다.


수박 속이 눈가루에 체리즙 물들인 듯 밝은 빛깔인 게 먹음직스럽지만 씨앗이 까맣고 통통하기보다는 하얗고 부실하다. 익어 보이지만 억지로 익힌 감이 든다. 어쨌거나 사람들은 봄에도 수박을 맛볼 수 있기에 만족스러워한다.


수박 제철은 팔월 여름이다. 내 고향은 수박 주산지인 고창이다.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이면 원두막에서 수박을 먹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조금 이른 칠월에 나온 수박은 귀한 대접을 받았다. 어른이 되어 시골을 떠나 도시로 오니 유월에도 수박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은 오월에도 수박이 나온다.


그래, 처음엔 봄에 수박을 맛볼 수 있어서 신기하게 생각했다. 이제는 겨울 수박도 낯설지 않다. 철 모르는 과일에 비커 속 개구리처럼 우리의 계절감도 무뎌져만 간다.


지금은 사철 내내 나물이나 과일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밥상에 오른 냉잇국을 보며 봄을 느끼거나 수박을 먹으며 여름을 실감하긴 어정쩡하다. 철 없이 나서는 과일이기에 어떤 과일을 제철과일이라고 부르기가 머쓱하다. 편리라는 이름으로 질서를 외면하는 우리는 과일이 철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는 먼산바라기다.


인위적으로 빛과 온도를 조절하여 식물의 생장을 조절하는 것은 비단 그 식물 하나만의 부자연스러움은 아니다. 중국 북경의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다음 달 미국의 뉴욕에는 폭풍이 일 수 있다는 나비효과(butterfly effect)처럼 내가 먹는 이 수박으로 인해 남극의 빙하가 녹는다고 주장한다면 지나친 억지일까?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것도 속담이 아닌 현실이 되어가는 과학의 시대에 오월 수박은 대수롭지 않은, 아니 당연한 현상이다. 수박은 참 맛있다. 철을 속은 줄 알면서도 철 모르는 수박을 우적우적 먹는다. 그 맛이 달곰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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