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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뜨기 Jul 06. 2020

끝물로 만든 고추부각

어머니

 

어쩌다 시골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올 때면 어머니와 실랑이를 벌인다. 어머니는 하나라도 더 싸주시려고 이것저것 챙기고, 나는 그것들을 안 가지고 가려고 마다한다. 어머니는 고추장, 된장, 김치, 참기름, 고춧가루, 당근, 양파, 배즙 등등 주섬주섬 챙기셔서 비닐봉지에 겹겹이 싸신다. 나는 갖은 핑계를 대며 그것들을 안 가지고 가려고 한다. 김치는 냄새가 난다, 참기름은 가다가 흘릴 수 있다, 양파는 우리 동네 슈퍼마켓이 더 싸다, 된장은 맛이 없다 등등. 하지만 어머니는 내 말을 귓등으로 흘러들으며 주섬주섬 싸서 내 차에 실으려고 하신다. 난 큰소리로 화를 내며 어머니를 말린다. 제발 그런 것 좀 싸지 마시라고.


정말 화가 난다. 

저 참기름을 짜기 위해 땡볕에서 참깨를 기르고, 저 김치를 만들기 위해 추운 마당에서 김장을 하고, 누가 어머니 드시라고 준 배즙도 아꼈다가 내게 챙겨주시는 것을 알기에 화가 난다. 심지어는 과자까지도 챙겨주신다. 본인은 읍내에 나가려면 하루에 서너 번 밖에 다니지 않는 버스를 타고 시간 반을 나가서 겨우 마트에서 몇 개 사 오는 과자마저 날 챙겨주시려 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비닐로 싸고 보자기로 묶고 종이상자에 담은 그것들을 마루에 그대로 두고 올라온다. 어머니는 이왕에 싼 거니 이번만 가져가라고 하소연을 하시지만, 난 매정하게 그것들을 뒤로하고 그냥 올라간다. 다음에 내려가면 또 어머니는 이것들을 주섬주섬 챙기신다. 난 더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래도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러기를 몇 년 하니 이제는 어머니도 포기하신 듯하다. 아니, 이제 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난해에 가볍게 넘어지셨는데 어깨뼈가 부러지셨다. 뼈가 잘 붙었다고 하는데도 거동은 예전만큼 못하신다. 그런데도 또 집 뒤의 밭을 갈고 씨를 뿌리시려 한다. 화가 치민다. 제발 본인 몸을 챙기시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귀에 경 읽기다. 평생 자식들 뒷바라지하셨으면 이제 그 수고를 놓아도 되련만, 여든이 넘어서도 자식 입에 먹을 거 하나라도 챙기시려고 저러신다. 



이렇게 어머니가 챙겨주시는 것을 다 마다하는 나도, 하나만은 못 이기는 척 챙기는 것이 있다. 바로 고추부각이다.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고추부각을, 완고한 나도 어쩔 수 없이 최면에 걸린 듯 슬쩍 받는다. 어머니의 고추부각은 시장의 반찬가게 고추부각과 다르다. 반찬가게 고추부각은 큼직한 고추를 반으로 갈라서 말리고 튀긴 후 설탕을 뿌렸다. 어머니의 고추부각은 그리 크지도 않고 달지도 않다.


어머니는 끝물의 고추를 거두어 부각을 만드신다. 끝물은 볼품없다. 고추 농사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농사꾼은 서리 오기 전에 다 커서 붉게 익을 고추만 챙긴다. 보통 끝물 고추는 거두는 이 없어 방치되었다가 서리 맞고 주눅 들어 고춧대와 함께 버려진다. 어머니는 그런 끝물 고추를 거두어서 반찬을 만드신다.

어머니가 거둔 고추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반찬으로 거듭난다. 어머니에게 있어 가장 귀한 존재는 자식인데, 그 자식이 가장 좋아하는 반찬은 당연히 가장 귀한 반찬이 되는 것이다.


귀하지 않은 것을 귀하게 만드신 것은 어머니의 솜씨다. 

어머니가 그 볼품없는 끝물 고추를 가지고 어떻게 아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는지, 그 솜씨에 대해서는 별도로 설명하지 않겠다. 아니,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버려지는 자투리 천 조각을 기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알록달록 조각보를 만드는 것과 같다.


귀하지 않은 것을 귀하게 만드신 것은 어머니의 맘씨다. 

상품이 되지 못하는 끝물 고추를 다 외면할 때, 어머니는 그것들을 거두셨다. 그 마음은 길가의 풀 하나도 허투루 보시지 않는 어머니의 생각이다. 어머니는 남들이 다 잡초라고만 여기는 민들레, 씀바귀, 쑥, 우슬 등을 반찬으로 해 드신다. 어머니의 손을 거치면 들풀이 보약이 된다. 어머니는 끝물 고추를 보면서 안쓰러운 마음을 가지셨을 것이다. 저것이 비록 고춧가루는 못 되어도 다른 것으로는 쓸모가 있을 텐데 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 작고 어린 끝물 고추를 거두어 부각으로 만드신 것이다. 


‘거두다’라는 단어에 울컥했다. 

거두는 것은 챙기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챙겨주는 것은 암탉이 병아리를 품에 모으는 것과 같다. 땡볕 내리쬐는 한터에서 아무리 삐악 거려도 아무도 챙기지 않는 병아리가 떠올랐다. 하늘에선 솔개가 빙빙 돌며 노려보고 있다. 언제였는지, 꿈이었는지 모르지만 내게 그런 상황이 있었던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어머니와 관련한 일들이 몇몇 스쳤다. 울컥 복받치는 감정에 글쓰기를 멈칫했다. 찡하다. 어렴풋이 생각나는 일들은 내가 알고 느끼는 것들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것은 새발의 피만큼도 안 될 것이다. 어머니가 날 기르시며 안타까워하신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어머니는 늘 날 거두신 것이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속담이 있듯, 내가 어머니를 생각하는 맘은 어머니가 나를 위하는 맘을 따라갈 수 없다. 도저히. 


고추부각을 프라이팬에 살짝 볶아서 먹는데, 흐뭇하다가 문득 슬퍼졌다. 내가 이 고추부각을 앞으로 얼마나 더 먹을 수 있을까? 언젠가는 어머니는 내 곁을 떠나실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 슬픔도 아물 즈음에, 밥을 먹다가 우연히 고추부각 반찬을 보면 어머니 생각이 왈칵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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