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루에 서서
내 몸이 아침 산행을 실천하기 위해 가장 큰 에너지를 쓰는 것은 방바닥에 달라붙은 정지마찰력을 떨치고 현관문을 나서는 것이다. 연인의 포옹처럼 포근한 이부자리를 걷어 젖히고 일단 숲길로 접어들면 그다음은 줄에 이끌리는 두레박처럼 산꼭대기를 향해 스르륵 당겨진다. 산마루에 다다르니 시야가 트인다. 주변의 숲 속과 먼발치의 산부리도 보인다. 이쪽은 지나온 오르막길, 저쪽은 지나갈 내리막길. 정상에 오르고서야 알았다, 산행은 오르는 등산으로 마치는 게 아니라 내려가는 하산으로 마친다는 걸.
산길을 오를 땐 각각의 나무만 보이더니 정상에 오르니 전체의 숲이 보인다. 떡갈나무와 잣나무가 어우러져 수풀을 이루었고, 골짜기와 등성이가 이어져서 산자락을 이루었다. 가쁘게 오른 그 비탈길을 돌이켜본다. 아울러 지난 내 인생도 돌이켜본다.
쉰을 넘긴 내 인생을 산행으로 견주자면 정상에 다다랐다. 풀씨보다 작은 수정체가 청년의 몸으로 자랐으며, 나름의 뜻을 세우고 자립하여 사회인이 되었고, 부모를 떠나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랐으며, 지금도 지방도시의 시골에서 살고 있다. 어릴 적에 산과 들로 쏘다니며 따먹었던 으름은 바나나보다 달콤했으며, 마을 주변의 숲정이는 아파트 놀이터보다 생기롭고 재밌었다.
공고를 졸업하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군에 입대했는데, 전역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던 중 농업분야로 정했다. 가진 땅이 없으니 직접 농사를 짓기는 어려워 농업직 공무원을 생각했다. 전역 후 독학학사학위 취득을 준비하며 7전 8기 끝에 국가 농업직 공무원이 되고 다시 농촌지도사로 이어진 진로는 시골을 그리는 연어와 같은 마음이었다.
나는 농업기술센터에서 근무하는 농촌지도사다. 농업기술센터는 작물 재배기술, 농촌관광, 생활개선, 토양검정, 병해충 진단 등 과학영농 서비스를 지원하는 곳이다. 내가 이곳에서 근무한 지도 20년이 넘었고, 몇 년 후에는 은퇴할 것이다. 은퇴 후 난 무얼 하고 있을까? 지금과 비슷하게 농업 언저리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농사짓는 농업인을 거드는 입장이지만 은퇴 후의 나는 직접 농사를 짓고 있겠지. 하지만 농사의 방향은 지금과 다를 것이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한 농사가 아니라 돈을 적게 쓰기 위한 농사일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전업농은 '생계'를 위해 농사를 짓고, 돈을 적게 써야 하는 은퇴자는 '생활'을 위해 농사를 짓는다.
전업농은 유행에 따라 작물을 선택하고, 각종 시설과 농기계를 투입하며 화학비료와 농약을 의지해야 하고, 대규모의 토지에서 농산물을 대량 생산해야 많은 돈을 벌어야 생계를 꾸릴 수 있다. 하지만 은퇴 후 텃밭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은 자기가 필요한 작목을 재배하여 자기가 소비하는 것이다. 이는 필요한 먹을거리를 직접 해결하기에 식료품 지출을 아낄 수 있으며 안전하고 싱싱한 친환경 농산물을 먹으니 의료비를 줄일 수 있다.
적도를 넘어서면 나침판의 바늘 방향이 바뀌듯 은퇴를 기준으로 돈 관리도 달라져야 한다. ‘더 버는 생산에서 덜 쓰는 소비'로 말이다. 텃밭농사는 규모가 작고 거리가 가깝고 투자가 적고 작목이 다양한 자연친화적 육체노동이다. 규모는 노년의 부부가 감당할만한 면적으로 10a(300평) 내외가 적당하고 거리는 집에서 걸어서 접근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많은 비용이 드는 농기계 구입 및 시설 설치를 꺼려야 하고 한두 작목을 대량 생산하기보다는 자기가 필요한 여러 작목을 두루 심어야 한다.
땅을 일구고 퇴비를 만들고 잡초를 뽑는 노동을 통해 몸에 근력을 유지하고, 흙에 지렁이와 미생물이 생존토록 하여 땅심을 기른다. 은퇴자에게 텃밭농업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해서 즐거운 일'이다. 가장 좋은 직업은 보수 없이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텃밭농사는 지위, 권력, 수입, 승진 같은 요소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즐거운 일이 아닌가?
<노후생활을 어디서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은퇴준비의 첫걸음이다. 주거지 성향은 도시생활형과 전원생활형으로 나눌 수 있다. 각종 편의시설 등을 이용하고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기 원하는 이들은 도시생활형이고, 한적한 전원생활을 누리고 싶은 이들은 전원생활형이다.
국토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은퇴 후 도시생활 희망자는 33.8%이고, 전원생활 희망자는 45.2%로 전원생활을 희망하는 이들이 더 많다. 자연 속에서 동식물과 어우러져 사는 노인들이 몸이나 맘이 더 풍요로워져서 수명이 증가하는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그러나 은퇴 후 주거지에 대한 결정은 부부의 동의가 필히 필요하다. 대체로 남편의 경우 전원생활형인 경향이 많으나 아내의 경우는 도시생활을 선호하는 경향이 많다. 내 아내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내기다. 시골뜨기인 나와 결혼 후에는 본인도 시골생활에 적응하려는 의지를 보이더니, 시골에 땅을 사는 데 있어서 나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어차피 남편은 은퇴 후에 시골로 갈 사람이니 조금이라도 젊은 때 가서 준비를 하는 것이 났다는 것이다.
30대에 결혼하면서 아내에게 말했었다. 40대에는 시골에 땅을 사고, 50대에는 그 땅에 집을 짓고, 60대에는 그 집에서 전원생활을 하자고. 이 말대로 우린 도시생활형 사람들의 희망인 아파트 구입을 접는 대신에 뒷산이 딸린 땅을 샀다. 그 땅엔 농막이 있고 은퇴 후에는 그 집에서 소일하며 노후를 보낼 생각이다.
지금 내 나이는 반백 살. 인생 후반기를 연착륙하기 위해서 노후생활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정리코자 한다.
행복하게 나이 드는 법은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배우기 위해 책을 읽고 배운 것을 나누기 위해 책을 내고자 한다. 평생 읽기와 쓰기를 할 것이지만 은퇴 전에는 읽는데 치중하고 쓰는 것은 은퇴 후에 하고자 한다. 많이 읽어야 잘 쓸 수 있고 아직은 눈이 어둡지 않아 글씨를 읽을 수 있을 때 더 읽어두려는 깜냥이다. 이미 노안으로 인해 책 읽기가 편치 않지만 지금보다 더 눈이 어두워지기 전에 많은 책들을 읽고 싶다.
얼마나 많이 읽어야 할까? 수불석권(手不釋卷),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게 읽고 싶다. 콩나물시루에 매일 물을 붓듯 책을 읽자! 콩나물에 날마다 주는 물은 모두 밑으로 빠져버려서 쓸모없어 보이지만, 그 쓸모없어 보이는 물 덕분에 콩나물은 자란다.
행복에 영향을 주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가족관계이며 인생의 말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경제적 빈곤이 아니라 사랑의 빈곤이다. 은퇴 후에 가장 가까운 친구는 배우자다. 부부가 같이 참여하는 활동은 돈독한 관계 형성에 도움이 된다.
최근에 아내와 같이 문화봉사단의 난타팀에 들어갔다. 난타팀은 지역행사, 경로행사, 사회시설 등에 초대되어 공연기부를 하고 있다. 우리는 직장생활을 하니 거의 기부 공연에는 참석하지 못하지만 나중에 시간이 많아지면 기꺼이 참여할 생각이다.
조지 베일런트 교수는 ‘50代 이후 삶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47세 무렵까지 만들어 놓은 인간관계’라고 했다. 같은 교회에서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여섯 가정이 모임을 만들었는데, 지난 20년간 여름휴가를 같이 보내고 있으며, 매달 집마다 돌아가며 모임을 갖고 있다. 이 모임의 부부들은 내 형제․자매와 같고, 태어나서 자라는 과정을 지켜본 그 아이들은 내 자식과도 같다.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교재 하며 지낼 것이다.
모 생명보험에서 노후에 월 생활비 예상금액을 물으니 중산층이 300만 원 내외라고 대답했다. 이를 대비하여 연금과 저축을 가입했다. 이런 일상적인 생활비 외에 노후에는 질병으로 인해 목돈이 들어갈 일이 있는데 이에 대한 대비는 별도의 암보험에 가입하고 있다. 그러나 내일을 위한 이런 연금과 저축 그리고 보험으로 지출되는 부분이 오늘의 생활에 무리를 줄 정도로 편성하지는 말자. 내일의 보장을 위해 오늘의 행복이 저당 잡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 이후로는 경제 축소의 시대이다. 2010년 ‘핵심 생산가능 인구’가 처음으로 감소하였고, 베이비부머가 완전히 은퇴하는 2018년 이후에는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이 하락하고 있다. 섣불리 투자하지 말고 알뜰한 지출관리를 해야 한다.
은퇴 후에도 일은 계속해야 한다. 노동은 몸과 마음을 활기 있게 한다. 다만 힘이 부치는 일은 지양해야 하며, 소득에 대한 기대도 낮춰야 한다.
내가 일하려는 분야는 ‘융합농업’이다. 내 전공분야와 관심분야를 접목한 일인데, 농업과 취미를 겸한 산업곤충, 농업과 미술을 겸한 압화공예, 농업과 식품을 겸한 산야초 효소 등이다. 노동과 비용은 적게 들지만 디자인과 창의력을 곁들이면 신나고도 살뜰한 경제생활이 가능하다.
은퇴 후 지낼 곳은 집 뒤에 산이 있기에 곤충과 산야초 등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산업곤충은 장수풍뎅이, 사슴벌레, 나비 등이며 이것들을 이용하여 생물 교육용 표본을 만들고 아이들의 애완용으로도 판매할 수 있다. 흙을 살리는 지렁이를 길러 텃밭농사를 거들게 하고 지렁이 분변토는 친환경자재로도 판매할 수 있다. 산에서 산나물을 뜯고 버섯을 채취하고 약초를 캘 건데 이런 것들은 많은 재미와 짭짤한 소득도 안겨줄 것이다.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산마루다. 챙겨간 물병도 비웠고 몸 긴장도 풀었고 마음 시름도 덜어냈다. 이제 산을 내려간다. 오를 때는 멍에 맨 황소처럼 발걸음은 무겁고 들숨이 버거웠지만 내려갈 때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발걸음은 가볍고 날숨이 가뿐하다. 산을 내려오면서 아내가 말했다. 만약 우리가 식물인간 상태가 되거나 소생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면 억지로 목숨을 붙잡지는 말자고.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사전의료지시서(Advance Directive)>는 본인이 의식이 없을 때를 대비하여 자신이 받을 치료 범위와 방법을 구체적으로 미리 고지하는 것이다. 죽음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은 죽음을 ‘당한다’라기보다는 '맞이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잘 죽는 법, 즉 웰다잉(well-dying)이다.
죽음에도 질의 차이가 있다. 40개국 나라를 비교해 보니 영국이 1위, 호주가 2위, 뉴질랜드가 3위이고 우리나라는 32위로 나타났다. 완화의료(Hospice)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원하는 방식으로 살다 갈 수 있도록 적절하게 통증을 조절해 주고 심리적 안정을 위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완화의료보다는 연명치료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말기암 환자들이 완화의료서비스를 이용하는 비율은 9%인데 비해 대만은 20%이며, 미국은 전체 질병 사망자를 기준으로 할 때 41%로나 된다.
젊은이에겐 채움이 자랑이지만 늙은이에겐 비움이 미덕이다. 비우는 과정에는 몸에 대한 내려놓음도 해당된다. 영혼이 몸을 떠나려 할 때 몸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것은 가뿐한 민들레 여행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이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집착이고 몽골의 풍장(風葬)이야말로 비움의 미덕이다.
내 몸이 늙어 결국에는 숨이 멈추더라도 그리 슬퍼하지 말자. 숯이 재가 된다고 슬퍼하던가! 숯은 사그라져 한 줌의 재가 되었지만 숯의 열로 인해 누군가의 시린 품은 포근해졌고 재는 식물의 양분이 되어 다시 생명의 일부가 되었다. 아내와 나는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 사후 각막과 장기를 기증했다.
홀가분한 산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