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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센토 Oct 14. 2022

바람이 분다

@ 통영


내 안에 일렁이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 속에는 산도 있고 하늘도 있고 물도 있고 바위도 있다. 그 속에는 나도 있고 너도 있고 한창 제철이라 살이 오른 민어와 농어도 있다.


아니, 다 거짓부렁이다. 바람이 멈추지 않아 파도가 자지 않으니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도통 알 제간이 없다. 답답하여 바닷 바람 속으로 들어간다. 미처 감추지 못한 분노와 주위의 시선에 신경쓰는 소심함. 아직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빌어먹을 두려움과 반복되는 일상의 남루함을 짊어진 채 길을 걷는다.


잔뜩 습기를 머금어 무거워진 공기에 영혼까지 흠뻑 젖었다.  많던 갈래 길들은 이제 모두 빗장을 걸어 잠궜다. 돌아가는 길의 끝에서 가로등은 검은 바다의  속에  머리를 , 성난 깃발은 바람의 반대 방향으로 날을 한껏 곧추세웠다.




모든 것이 뒤흔들릴 때가 있다.* 그 때의 내가 그랬다. 직장에서 하는 광고 기획이란 일은 알맹이 없이 포장만 화려한 빈 껍데기 같았고, 브랜딩과 마케팅이란 것은 과학적이길 바라지만 결국 어림짐작이나 말장난에 불과한 사기술처럼 느껴졌다. 직장 생활이 답답하여 다른 곳을 곁눈질하며 시간을 허비했고, 제대로 타오르지도 못한 젖은 장작과도 같이 삼심대도 어느덧 중반을 훌쩍 넘겼다.


코끼리 발자국처럼 묵직한 진통이 가슴을 꾸욱 눌러왔다. 황망히 외딴 무인도에 난파한 로빈슨 크루소가 파도에 떠밀려 온 배의 잔해를 살피듯 주변을 되돌아보았다. 지금 여기 서있는 것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회사원일 뿐 아무리 살펴봐도 내 삶의 이야기는 빠져 있었다. 짐짓 심각한 얼굴로 세상살이를 고민하는 듯 꾸며왔지만 실은 미지근한 물 속을 부유하는 해파리처럼 시류에 몸을 맡긴채 떠내려 왔을 뿐, ‘절대 반지’와 같은 단 하나의 정답이 어딘가에 운좋게 떨어져 있지나 않을까 여기저기를 기웃거렸을 뿐이었다.


싱클레어 루이스의 소설 속 배빗(Babbitt)의 고백은 곧 나의 것이었다. “평생동안 난 내가 원하는 일을 단 한 가지도 해보지 못했다! 그냥 시류를 타고 흘러가는 것 외에 뭘 성취했는지 모르겠어. 5미터 중에서 0.5센티미터쯤 앞으로 나아갔을까?”


알베르 카뮈는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이런 불편한 자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더러는 무대 장치가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기상, 전차,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의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화・수・목・금・토, 대개 이 노정은 수월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면서 모든 것은 놀라움이 옅게 배인 권태라는 감정 속에서 시작된다."


출근하고 일하고 밥 먹고 퇴근하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문득, 무너진 벽 틈새로 황량한 벽채와 앙상한 골조를 엿보게 되는 때, 한껏 분장한 얼굴로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이유없이 먹먹해질 때, 남들처럼 살기 위해 발버둥치다 아닌 밤 중 홍두깨처럼 거울 속의 자신이 낯설어지는 순간, 과거의 방향을 잃어버렸지만 앞으로 나야가야 할 새로운 길을 찾지 못했을 때 우리는 이를 방황이라 부른다. 길 위에서의 여행이라면 주변에 길을 묻거나 휴대폰이라도 꺼내들겠지만 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익숙한 쾌락에 몸을 맡긴 채 모든 것을 잊을 수도 있고, 위대한 종교를 찾아가 따뜻한 영혼의 위로를 받을 수도 있을 게다. 그러나 이러저리 흔들리는 삶, 즉 제정신이 아닌 상태(lost oneself)에서 남는 유일한 기준은 역설적이게도 자기 자신(oneself) 뿐이다. 이 곳이 모든 길이 시작되는 곳이자 끝나는 곳이다. 바람이 분다.** 거칠게 일렁이는 바다를 한참동안 들여다본다.



*

우리 인생길의 한중간에서

나는 올바른 길을 잃어버렸기에

어두운 숲 속에서 헤메고 있었다.

-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 지옥 편>


**

“바람이 분다. … 살아야겠다.(Le vent se lve! Il faut tenter de vivre!)” -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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