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kkaido
‘하, 바람 한 점 없다.’ D는 한여름 땡볕 아래, 달걀프라이는 물론 오징어 한마리 쯤은 너끈히 구워낼 수 있을 듯 뜨겁게 달궈진 철판 위에 서있다. 그의 앞에선 Y가 갈색 보호 마스크를 든 채 구부리고 앉아 시퍼런 불꽃을 튀겨가며 용접 작업 중이다. 닭똥같은 땀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리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Y는 연신 D에게 짜증을 내고 있다. 덕분에 D에겐 오늘 하루가 유난히 길다.
Y는 한참동안 언성을 높인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잠시 쉬자’면서 담배를 한대 빼어 물고 그늘을 찾아 나선다. 프라이팬처럼 달궈진 이곳에 있는 것보다는 나을테니 D도 하는 수 없이 밉살맞은 Y의 뒤를 따른다. D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누른 채 뜨거운 열기와 폭언으로 잔뜩 상기된 얼굴로, 방금까지 자신이 머물던 저 뜨거운 철판 상자가 어쩌면 자신들을 가둬놓고 사육하는 가축 우리 같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채 금속 상자 속에 갇혀서 용접을 하는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숨이 턱, 하니 막혔다.
이제 잠시 철판 위를 벗어나 보다 위쪽으로 시선을 옮겨 보자. 흔히 TV 음악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듯 크레인이 무대에서 관객석 쪽으로 카메라를 회전하며 붐 업(Boom up)하는 것을 연상하면 되겠다. 저 멀리 부두에는 커다란 배들이 늘어서 있고, 그 아래에는 지금 막 D가 빠져나온 수많은 직육면체의 철판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다. 상자 밖의 상자와 또 다른 상자들, 이 수십 수백 개의 철판들 상자들이 한데 조립되어 거대한 한 척의 배가 완성되는 것이다.
더위를 먹은 탓에 정신이 혼미해진 탓일까. 방금 전까지 죽도록 싫었던 Y의 땀에 쩔은 뒷모습이 괜시리 짠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좋든 싫든 다음 주면 일이 끝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싱거운 안도감마저 찾아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자 밖에는 또 어떤 상자가 있는 것일까. ‘하, 출구가 없다.’
‘Just do it’이란 나이키의 슬로건은 자본주의의 순환을 위한 달콤한 주문이다. ‘Just do it’이란 가슴 뛰는 구호가 그저 새로운 운동 기어를 사고 마는 ‘Just buy it’의 현실로귀결되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지금 당장 시작한다고 해도 얼마 가지 못해 그만둘 것임을 우리는 경험과 학습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출된 시간과 비용, 실패에 대한 책임과 청구서는 고스란히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자신을 바꾼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새해가 되면 많은 이들이 ‘시작이 반’이라며 새로운 프로젝트에 착수해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친숙한 실패로 귀결되곤 한다. 그리고는 ‘이번 생은 틀렸어’라며 자책의 나날을 며칠 보낸 뒤 상처입은 자존감을 겨우 일으켜 세워 익숙한 일상으로 복귀한다.
많은 자기 계발서들은 우리가 바뀌지 않는 이유가 ‘시작하지 않기’ 때문이라 말한다. 뒤이어 다소 뻔한 듯 하지만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삶의 지혜’들과 당장 써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다양한 ‘실행 지침’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아무리 멋진 인생 레시피도 일상 속에 스며들어 지속되지 못한다면 그저 겉보기만 화려한 매장용 디스플레이나 단기 판매를 위한 광고 문구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우리가 속해있는 상황과 환경의 변화없이 자신의 삶에 대한 모든 책임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것은 온당치 않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둘러싼 상황의 지배를 받는 약한 존재이다. 많은 연구 결과가 말해주듯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의지가 강한 존재도, 그다지 합리적인 존재도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주체란 생각은 문법적 착각”에 불과하고,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자크 라캉의 말처럼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존재이다.
움직이는 모든 것은 ‘자유 의지’가 아닌 일종의 궤도를 따라 이동한다. 지구가 태양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궤도를 그리듯, 태양계가 다시 우리 은하 중심의 블랙홀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궤도를 그려 나가듯, 무한히 자유롭게 보이는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 또한 다른 존재의 영향을 받아 정해진 궤도를 따라간다. 만일 우리가 따라가는 그 궤도가 잘못되었다면, 무엇보다 먼저 해야할 일은 일단 운행을 멈추는 것이리라.
“마르크스는 혁명이 세계사의 기관차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쩌면 사정은 그와는 아주 다를지 모른다. 아마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 브레이크일 것이다.” *
발터 벤야민은 19세기 말, ‘테이 만 기차 참사’에서 영감을 받아 위의 글을 썼다고 한다. 사나운 폭풍우 속에서 기차가 지나가다 철교가 무너져내려 200여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한치 앞이 안 보이는 악천우 탓에 참사의 기미라고는 약간의 화염 밖에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이를 모르고 출발한 다음 기차는 사고 지점 1킬로미터 전에 이르러서야 사태를 파악하고 비상 브레이크를 당겨, 또 다른 대형 참사를 면할 수 있었다.
*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