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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센토 Oct 13. 2024

스펙타클

@Yokohama Arena


우리들은 행복했다. 적어도 그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빅 브라더는 미래를 향해 힘차게 전진해나가는 빛나는 비전을 모두에게 던져 주었고, 시민들은 그의 계획에 따라 적절하게 배분된 각자의 책임과 의무를 힘껏 다하기만 하면 됐다. 힘들고 골치 아픈, 가령 정치 같은 문제는 빅 브라더의 일사분란한 통치 아래에서 아무도 모르는 저 뒤편에서 매끈하게 처리되었다.  


합리적으로 정해진 법규와 각자의 양심에 따라 정직하게 행동하는 성실한 시민에게는 큰 축복이 따랐다. 직장에서는 많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살아갈만한 정도의 봉급이 매달 지급되었고, 퇴근 후 TV에는 늘 쇼와 오락물이 흘러 넘쳤다. 주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쇼핑몰과 테마 파크에서 적당한 소비와 안전한 모험을 즐겼고, 일상에 지치면 커다란 스크린에서 위안을 얻기도 했다. 가끔 작은 일탈이 필요할 때면 잘 짜여진 여행 프로그램을 선택해서 정기 휴가를 떠났다.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나타나면서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은 한 순간에 붕괴되었다. 난데없이 등장한 그녀는 경찰들의 철통같은 제지를 뿌리치고, 여느때와 다름없이 빅 브라더의 지령을 전달받는 커다란 스크린을 해머로 부셔버렸다. 스크린이 부서진 자리에는 앙상한 철골 구조의 뼈대가 그대로 드러났고, 무대 조명이 꺼지자 우리가 모여있는 강당의 남루함에 처연해졌다. 당황한 우리들은 사방을 둘러보며 ‘빅 브라더’를 애타게 찾기 시작했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절대 그럴리 없다.’ 패닉 상태에서 우리는 빅 브라더를 간절히 부르짖었다. *  




첫 직장에서의 마지막 프로젝트를 마쳤다. 늘 그러하듯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지만 끝이라는 생각에 더욱 더 마음을 쏟았다. 그런데 이 캠페인의 일부로 진행되었던 K-POP 아이돌의 콘서트 장에서 나는 도쿄의 일상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모습의 군중들을 발견했다. 장 내에서 그들은 시종일관 생기에 넘쳤으며, 무대 위에서 쇼가 진행되는 동안 아이돌의 일거수 일투족에 열광하고 춤과 음악에 환호했다.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기 드보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더 많이 관조하면 할수록 그는 더 적게 살아가게 된다. 지배 체제가 제안한 필요의 이미지들로 그가 자신의 필요를 더 쉽게 재인식하면 할수록, 그는 자신의 본재와 욕망을 더 적게 이해하게 된다. 활동하는 주체에 대한 스펙타클의 외재성은 개체 자신의 몸짓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고, 차라리 그에게 그것들을 대표해주는 다른 누군가의 몸짓이라는 사실로 설명된다. 구경꾼은 어느 곳에서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스펙타클은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기 드보르가 말하는 ‘스펙타클(Spectacle)’은 쉽게 말하자면 우리들을 쉴새 없이 유혹하는 볼거리와 즐길거리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제공한 ‘스펙타클을 보고 즐김으로서 구경꾼, 즉 ‘스펙타뙤르(Spectateur)’가 된다. 현대인의 일상은 이러한 스펙타클로 가득차 있으므로 이를 향유하고 소비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욕망 대신 ‘사회에서 규정해준 필요’를 충족시키고, 자신의 스타일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몸짓’을 흉내내게 된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산을 내려온 차라투스트라는 시장통의 군중들에게 ‘초인(위버멘쉬)’를 설교하며, 그 대극에 위치한 ‘최후의 인간(작은 인간)’에 대해 말한다. 그가 그토록 경멸하며 묘사했던 더이상 올라갈 곳도 내려갈 곳도 없는 작고 소심한 군중의 모습은 세련되었지만 어딘가 거세된 듯한 현대인들의 모습과 오버랩되기도 한다. 


"사랑이 무엇이지? 창조가 무엇이지? 동경이 무엇이지? 별은 또 무엇이고?’ 이렇게 물으며 그들은 눈을 깜박인다. 이들은 돌에 걸리거나 사람에 부딪혀 비틀거리지 않도록 아주 조심조심 걷는다. 자신의 일에 매달리지만, 이런 소일거리로 건강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주의한다. 
이들은 너무 귀찮고 힘들기 때문에 더이상 가난해지거나 부유해지려 들지 않으며, 남들과 다투기는 하지만 위장에 탈이 날까 이내 화해한다. 불면을 잠재우기 위해 얼마간의 독의 힘을 빌리고 또한 편안한 죽음에 이르기 위해 끝내 많은 독을 마신다. 낮은 낮대로, 밤은 밤대로 조촐한 환락을 즐기는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마침내) 행복을 찾아냈다." **


니체는 ‘위버멘쉬’와 짐승 사이에 놓인 외줄을 건너다 나락없는 심연으로 떨어져 내렸지만, ‘작은 인간’인 우리들은 아이돌의 쇼를 보고 셀레브리티의 가십을 즐기며 누구에게도 상처주지 않고 편안하게 꿈을 꾼다. 자우림이 언젠가 노래***했듯이, 세상이 "날 꿈꾸게 해주지 않고", "현실은 아픈 것"이니 작은 인간인 우리들은 가상의 존재인 아이돌을 필요로 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사방에 선을 긋고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둔 채 부디 오늘 하루도 무사하고 평안하게 지나가기를 기대해 보는 것이리라.





* 애플 매킨토시 ‘1984’ 광고에 덧붙임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 자우림, <아이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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