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센토 Oct 13. 2024

불확실한 시대

@Harajuku


K는 성의 측량사로 초청되어 저녁 늦게 마을에 도착했다.  겨울이라 마을은 눈으로 깊이 덮여 있고, 성은 안개와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겨우 찾아 들어간 주막의 바닥에 짚을 깔고 잠이 들었지만 성의 집사의 아들이 숙박 허가증이 없으면 어디에도 숙박할 수 없다면서 그를 깨운다. K는 자신이 성의 초청을 받은 측량사라고 말해보지만 전화로 성에 조회해보니 그런 일이 없다고 말한다. 조금 뒤 사무국에서 다시 전화가 걸려와 K의 말이 사실이라며 말을 번복한다. 이렇게 성을 향한 K의 험난한 여정이 시작된다. 


다음날 K는 성을 향해 걸어가지만 도무지 닿을 수가 없다. 성 언덕으로 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길도 가까이 가면 휘어져버려서 "설령 성에서 멀어지진 않는다 해도 성에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눈 속을 헤매던 K는 농가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지만 외지인이라 쫓겨나고, 병색이 완연한 마부가 '위험을 쫓아내듯' 그를 여관에 데려다 준다.  심부름꾼 바르바나스가 K를 채용한다는 말과 함께 그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긴 성의 관리인 클람의 편지를 K에게 전한다. 


K는 성에 가기 위해 심부름꾼의 뒤를 따라가지만 정작 도착한 곳은 그의 누추한 집이었고,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바르바나스의 누나 올가를 따라간 또 다른 주점에서 여급으로 일하는 프리다를 만난다. 그날 밤, 클람의 애인이었던 프리다는 K의 애인이 되어 그를 따라 나선다. 


"거기서 두 사람의 호흡과 심장의 고동이 하나가 된 채 몇 시간인가 지나갔다. 그 시간 내내 K는 길을 잃었거나 아니면 멀리 낯선 곳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보다 앞서선 아직 아무도 와보지 않은 이방異方, 공기마저 고향 공기와 성분이 전혀 다르고 낯섦 때문에 질식하게 되고 말 곳, 엄청난 유혹 속에 그저 마냥 걷고 계속 길을 헤매는 수밖에 없는 곳에."


(....)


K는 결국 성에 이르는 길을 찾지 못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문장과 함께 미완성으로 끝난다. "그녀는 K에게 떨리는 손을 내밀어 자기 옆에 앉게 하고 간신히 말을 했으며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그녀가 한 말은" *




어느덧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코로나19를 생각해본다. ”팬데믹으로 전세계가 마비되었다. 경제 활동 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국가 간의 국경이 폐쇄되었다. 그러나 확실한 백신이나 치료제가 나오기 전에는 Covid-19의 전세계적 유행을 멈출 방법이 없어 보인다. (이제 백신은 공급되기 시작했지만 변이 바이러스로 인한 또 다른 팬데믹이 시작되있다). 모두들 펑범한 일상의 회복을 간절히 바라지만, 돌아갈 길은 아직 멀어 보인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출구가 보이지 않던 그 때의 우려와는 달리 우리는 일상을 회복했다. 하지만 세상은 이미 코로나 19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고, 아마도 팬데믹은 또 다른 얼굴로 우리를 다시 찾아 올 것이다. 이런 팬데믹에 대한 예언서처럼 보이는 <유동하는 공포>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게 말한다.


“밀란 쿤데라가 간결하게 요약한 것처럼, 세계화가 낳은 “인류의 단일화”란 근본적으로 “달아날 곳이 아무 데도 없다는 뜻”이다. 그 누구도 안전한 쉼터를 찾을 수 없다. 유동적 근대 세계에서는 위험과 공포조차 유동적이다. 아니면 유체라기보다 기체와 같을까? 위험도 공포도 흐르며, 스미며, 새며, 베어든다. 아직 그런 흐름을 막아낼 장벽은 발명되지 않았다.”


이는 지난 팬데믹으로 더욱 명확히 알게 되었다. 공포는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하고, 세계화로 지구가 하나로 연결된 지금 우리가 “달아날 곳은 아무 데도 없”다. 답답함에도 불구하고 상시 착용하는 마스크가 일종의 심리적 안정을 준다고는 해도 공포는 모든 장벽을 넘어 우리의 일상 속으로 “스미며, 새며, 배어든다.”


어떤 예술은 미래를 선취한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성>은 이런 '출구 없음 No exit'의 시대에 대한 일종의 우화로 읽히기도 한다. 밀란 쿤테라는 카프카의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의 물음은, 내면적 동기가 더 이상 아무런 무게도 지니지 못하게 될 만큼 외부의 결정이 압도적인 것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아직 인간에게 남아 있는 가능성이란 어떤 것이냐라는 것이죠."**


불확실한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급격한 변화의 흐름을 읽을 수만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 누구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던 문명이라는 것은 한낱 종이장처럼 얄팍한 것임을, 우리가 리스크(risk)라고 생각했던 것들 조차 통제가능한 상황에서의 사치이자 미사여구임을. 이처럼 사방이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겨우 “안개 속에 싸인 자유일 뿐”***이다.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내는 우리의 전략 중 하나는 미래를 미리 사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용_Credit’이다. 내일이 올지 어떻게 아는가. 그러니 오늘, 아니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만족을 연기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지금 당장 소비해라. 그 대가는 언제 올 지도 모르는 나중에 치루면 된다. 운이 좋다면 뜻밖의 ’레버리지’를 기대해볼 수도 있다.  


또 하나의 전략은 ‘지연_Delay’이다. 너무 큰 위험을 감수할 수 없기에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모든 결정을 연기하려 한다. 그래서 제대로 사는 것조차 뒤로 미룬다. 우유부단함과 결정 장애는 현대인의 징후이다. 우리는 연기한다.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죽음의 순간까지.


이 둘은 어떤 면에서는 동일한 전략이다. 바로 “‘시간 속여 넘기기.’ 만족이 아니라, 불만을 지연시키기.”**** 제대로 살지 않음을 통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는 것.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불투명하게 희석시킨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공포를 극복하고자 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전세계를 에워싼 위험과 공포처럼 희부윰한 안개가 되어 흐른다. 불확실한 미래처럼 어딘가로 스며든다. 배어들어 자신조차 잊는다,





*프란츠 카프카, <성>의 일부 줄거리


**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

“안개 속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안개 속에 싸인 자유일 뿐이다.” - 밀란 쿤데라,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


**** 지그문트 바우만, <유동하는 공포>


이전 09화 스펙타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