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번 색을 정해 각자의 이야기를 적어봅니다
여승구님의 파란색 추억
느지막히 일어난 어느 날이었다. 시간은 정오를 훌쩍 넘어 오후 한 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공복이 길었던 탓에 일어나자마자 배가 고파왔다.
그래, 이런 날은 샌드위치가 딱이지...
대충 세수를 하고 집을 나와 근처 서브웨이로 향했다. 적당히 따뜻한 날씨였다. 샌드위치와 함께 먹을 커피도 내려놨고, 오랜만에 많이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몸도 상쾌했다. 늦었지만 기분좋은 하루의 시작. 얼른 먹을 것을 사서 집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으로 서브웨이에 들어갔다.
들어오기전 상쾌했던 기분도 잠시,주문이 끝날때쯤 내 마음은 불쾌함으로 꽉꽉 채워졌다.
퉁명스러움을 넘어 짜증에 가까운 알바생의 태도에 기분이 상했기 때문이다. 주문도 존댓말로 공손히 했고 그외에 다른 대화나 행동도 없었다. 아마도 내가 오기전에 무슨 일이 있었거나 짜증나는 일이 있었던건 아니었을까.
그래도 그렇지 상관도 없는 나한테 짜증을 낼걸 뭐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냥 감사하다고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매장을 나왔다. 그 분도 사정이 있겠지... 내가 봤던 모습이 전부가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내려놓은 커피와 함께 샌드위치를 먹으며 문득 옛날 일이 생각났다. 초중등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와 있었던 일이었다.
그 친구는 소위 말하는 문제아였다. 다른 친구들과도 툭하면 싸우기 일쑤였고, 자기보다 약한 친구들을 짖궃게 괴롭히기도 했었다. 학급에 한두명씩 꼭 있는 트러블메이커였다랄까.
어린 시절 학급반장이었던 나는 쌤들의 특별임무를 자주 부여받곤 했다. 이 말썽쟁이 친구를 잘 케어해주라는 특명.
한편으로 친구들사이에서 골목대장 노릇도 겸하고 있던 탓에 특명과 상반된 민원도 자주 들어왔다. 이 사납고 못된 친구를 응징해달라는 요청. 일종의 힘의 심판을 향한 갈구.
이 것은 마치 '아이스 아메리카노 따뜻하게요'와 같은 난이도 극상의 미션이었다.
반장으로서의 따듯함과 어른스러움, 골목대장에 걸맞는 차가운 응징과 힘의 집행을 적당히 녹여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뭐라고 그런 일을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험난한 초딩시절을 지나 중학교를 올라가면서 우리 사이의 관계에도 꽤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굣길이 같아져 서로 대화가 많아지면서 친해지기도 했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순해진 탓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친구네 집에 한 번 놀러갔다 온 것이 큰 계기가 됐다.
친구네 집은 마당이 있는 오래된 단독주택이었다. 회색 담벼락에 있던 파란색 철제대문이 또렸하게 기억난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보게 된 풍경은 문자 그대로 충격 그 자체였다.
이리저리 깨지고 나뒹구는 시멘트 바닥부터 무성하게 뻗은 나무들이 가득한 마당, 빛이 들지 않아 우중충한 집안 그리고 여기저기 맞아 상처투성이인채 묶여 있던 개까지.....
관리라고는 전혀 볼 수 없는 집상태에 충격을 받았고, 개의 상처를 묻자 별일 아닌듯 말안들어서 아빠한테 맞았다고 말하는 친구의 대답에 더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 만큼 오랬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친구의 사나움과 공격성이 이해가 됐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 뒤로는 그 친구가 공격성을 보일 때 더 이상 힘의 응징(?)을 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가엾음이나 동정보다는 비록 어린나이였지만 내가 봤던 친구의 모습이 그의 전부가 아니었음을 절절히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그저 파란 대문을 열고 친구네 집을 봤을 뿐인데, 친구가 살아온 더 큰 세상을 보게 된 기분이었달까. 아무튼 그 때의 일은 아직도 내게 큰 충격으로 남아있다.
요즘은 문득 이런 생각이 자주 든다. 삶이라는건 가깝게는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 친구부터 멀게는 가게의 점원이나 마주치는 사람까지 온통 타인에 둘러쌓여 있는 것이라는 생각. 그래서 타인을 보다 잘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과 보다 더 매끄럽게 대화할 수 있다면 훨씬 더 풍요롭고 행복한 삶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누군가를 이해하고 대화한다는 것은 분명 쉬운일이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그럴때마다 어릴적 친구집의 파란대문을 떠올리려 하곤 한다. 내가 전부라 생각했던 그 친구의 모습이 사실은 일부에 불과했고, 대문을 열고나면 그 보다 훨씬 큰 세상이 친구에게 있었음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됐던 그 날을.
오늘 점심도 근처 서브웨이 직원의 아무 이유없이 퉁명스러운 말투와 표정, 툭툭 던지듯 샌드위치를 만드는 모습에 잠시 빈정도 상하고 이해도 가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다시금 파란대문을 떠올려 봤다.
'그래, 누구에게나 파란 대문은 있는 법이니까.'
Blog에는 모임 기록과 정보를 남기고 Brunch에는 생각과 글들을 옮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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