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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Nov 17. 2019

건형이 행님

1년 간의 세계여행 기록 ⎪몽상가도 때로는 지구 나들이를 합니다.

  나와 함께 여행을 시작한 건형이는 고등학교 친구다. 입학 첫날부터 그는 시끄러웠다. 세상에 이렇게 가벼운 사람이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 덕분에 초면에 낯을 가림에도 불구하고, 그와 쉽게 친해질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의 말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얘기하자면, 항상 가장 먼저 독서실에 올 것처럼 말을 던져 놓고 오후 늦게 될 때까지 연락이 두절되고는 했다. 또 우리는 재수 학원을 일정기간 함께 다녔다. 그날그날 영어 단어를 외워서 귀가하는 시간에 서로 확인하기로 했었는데, 이때 또한 그는 번번이 그리고 당당히 단어를 외우지 않고는 했었다. 


  이렇게만 보면 서로의 동행이 맞을지에 대한 깊은 의심이 들 수 있다. 실제로 그는 말 뿐인 말을 적지 않게 했고, 한 때는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꾸준히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고민하는 친구였다. 물론 그 고민에 대한 변화가 단번에 극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앞으로는 꾸역꾸역 나아갔다. 고등학교 때는 정말 자신만 알던 친구였는데 많은 사회화 과정을 거쳐 지금은 자신의 성향을 파악할 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쓸 데 없는 말을 많이 하지만 적어도 그런 자신의 모습에 눈이 멀지 않도록 노력은 하는 친구다. 


  2017년 1월, 우연히 서울에 일이 있어서 간 김에 태릉입구에 있는 그의 자취방에서 하룻밤 자게 된 날이었다. 건형이는 당시 또 다른 고등학교 친구 민오와 함께 살았다. 우리는 5평 남짓한 작은 방에서 맥주를 한 잔 하고 누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러던 중 나는 그동안 그리고 있던 여행에 대한 계획을 얘기했고, 건형이는 평소와는 다른 집중력으로 내 이야기를 곰곰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재미있겠다며 그 자리에 서 바로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 그 또한 전공 관련 진로에 대해 갈팡질팡 고민을 하고 있던 차였다. 친구와 함께 하는 여행, 분명 즐거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단번에 승낙할 수는 없었다.

  

  이 여행은 단순히 며칠을 놀러 가는 개념이 아닌 하나의 생활을 하러 가는 것이었다. 또한 이 여행을 통해 기존 사회적 관계와 일시적 차단을 꿈꾸는 나로서 친구와 함께하는 것은 온전한 차단이 불가해짐을 의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당시 진짜 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기에, 친구와 함께 하는 것은 그 두려움을 조금은 없앨 좋은 계기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와 1년을 함께 하기에는 솔직히 좀 끔찍했다. 그래서 그에게 내 여행의 솔직한 뜻을 전하고, 언제든 생각이나 계획이 서로 달라지면 각자 여행을 하자고 했다. 나나 건형이에게나 함께 하는 것이 여행의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그는 답답하고 때로는 지루한 연구실에서 벗어나 '재미'를 느끼고 싶었고, 나는 그저 '나'를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은 다른 꿈을 가지고 한 배를 탔다.


  여행을 하면서 많은 이들이 친구와 여행을 하면 안 싸우냐고 물었다. 우리도 혹시나 안 맞을까 봐 출국 전에 내일로 여행을 함께 다녀와보기도 했다. 그런데, 싸우기에는 이미 서로의 성격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상태였던 것 같다. 웬만하면 무언가 기분이 상하기 전에 대처가 가능했고, 각자의 텐션 리듬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것이 갑자기 떨어진다고 해서 당황하지 않았다. 또한, 생각이 달라지면 깔끔하게 따로 여행을 하자고 미리 정했기에, 서로에 맞추는 것에 많은 힘을 쏟을 필요 또한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항상 죽이 잘 맞았던 것은 또 아니다. 건형이는 언제나 건형이다웠다. 어디서든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한 사람이 바로 내가 여행에서 느낀 그였다. 나는 온전히 여행지에 푹 빠지고 싶어서 심카드를 사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에게 그것은 지옥과도 같았다. 그는 대부분의 경우에 심카드를 샀고,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온라인의 많은 이들과 소통하였다. 예를 들어 로컬 분위기의 야외 테라스에서 맥주를 한 잔 마실 때면 건형이는 인스타그램 라이브 따위를 통해 자신의 현 상황을 지인들에게 전파하였다. 물론 시청자는 2, 3명 정도였지만, 언제나 그는 좋은 것을 보면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하였다. 가끔씩은 좀 심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이 그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이기에 나도 그저 내 행복을 위한 운치를 즐기면 그만이었다. 


  나와 다른 점을 관찰하는 재미 또한 나름 쏠쏠했다. 여행 초반에는 일기식으로 블로그를 썼는데, 그때 자주 건형이에 대한 나의 하루 감상을 담고는 했다. 물론 대부분의 내용은 그의 연약함 혹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 갈구 등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런 내용들을 그냥 직설적으로 드러내면 그의 기분이 상할 것이 명백하기에, 나는 이름 뒤에 ‘행님’이라는 존칭을 붙임으로써 교묘한 눈가림을 하곤 했다. 일례로 건형이행님은 ‘으슬으슬’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곤 했다. 가령, 잠자리 온도에 미세한 변화가 생기면 다음 날 아침에 언제나 잠을 좀 잘 못 자서 으슬으슬하다고 했다. 분명 4, 5월의 동남아였는데도 말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신체 어느 부분이 조금만 불편해도 그것을 정말 그대로 입 밖으로 내었다. 예를 들어 그는 이어폰을 오른쪽 주머니에 넣어 놓고 오랫동안 서있어서 허리가 좀 아픈 것 같다는 따위의 말들을 매일같이 뱉어냈다. 나중에는 오늘은 과연 어디가 아플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의 그러한 연약함이 때로는 조금 짜증 나기도 했지만, 며칠을 관찰하니 그것은 그의 연약함이라기보다, 그냥 모든 자극에 대해 필터 없이 표현하는 것이었다. 뭐랄까, 적막함을 깨고 싶은 아무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가 아픈 기색을 보인 이후에 그 고통이 실제로 어마어마하게 커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역시 건형이 행님은 강한 행님이었다.
 






p.s 5월 태국의 평균 최저 기온은 25.6도이며, 일반적으로 서울의 한 여름보다 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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