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간의 세계여행 기록 ⎪몽상가도 때로는 지구 나들이를 합니다.
여행 31일 차, 2017년 5월 16일
야자수 나무와 푸른 하늘, 한적한 해변을 꿈꾸며 방콕에서 파타야로 이동했다. 막연한 이미지만을 가지고 도착한 파타야는 내가 생각한 곳과는 상당히 다른 곳이었다. 천혜의 자연으로 가득할 줄로만 알았던 파타야는 꿈 깨라는 듯 화려한 네온사인들을 깜박거리며 우리를 맞았다. 그중에서도 파타야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인 워킹스트리트의 첫인상은 음기 가득한 환락의 거리, 그 자체였다. 정신없이 반짝이는 수많은 간판 아래에는 간판만큼 화려한 의상을 입은 레이디 보이들이 자신의 펍이나 클럽에 들어오라며 호객 행위를 했다. 그리고 길거리 구석구석 마다에는 젊은 여성들과 스킨십을 하는 외국 할아버지들이 보였다.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신세계가 눈 앞에 펼쳐진 것만은 분명했다. 동행과 우리는 그나마 밝아 보이는 락카페로 들어갔고, Chang 맥주만큼이나 청량한 락 보컬의 노래를 들으며 애써 이곳에서의 분위기를 즐기려 애썼다.
앉아서 음악을 나름 즐기고 있으니 이전보다 시야가 트였는지, 정신없어 보이기만 하던 거리가 조금은 차분히 눈에 들어왔다. 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 명, 한 명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락 카페 안에서 우리처럼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일로서 사람들을 호객하는 만큼 의 거절을 당하는 삐끼들, 길을 걸으며 서로 농담을 하고 시시덕거리는 청년들까지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신세계만 같던 세계가 조금씩 조금씩 익숙한 파편들로 정리가 되는 기분이었다. 물론 이곳에 오기 전, 내가 바랐던 조용한 휴양과는 여전히 멀고도 먼 곳이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이 당황스러움이 그다지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내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나름 재미있는 구석이 있었다. 어쨌든 세상에 또 이런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나는 다시 원래 가고 싶었던 천혜의 자연을 찾아가겠지만 가끔은 이런 우연함을 여행의 묘미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 이상의 장소는 언제나 내 계획 밖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생각한 곳만 간다면 그게 과연 여행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 말이다.
여행 32일 차, 2017년 5월 17일
파타야에서 두 번째 날인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생일에 맞춰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태국은 5월부터 우기여서 그런지 비가 한 바탕 쏟아질 때가 많다. 어제 워킹스트리트에서의 신선한 충격을 맞은 후 나는 약간의 검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침 비도 계속 내리겠다 낮에는 빗소리를 들으며 내가 바라는 휴양이 가능한 곳이 있는지 찾아보며 쉬기로 했다. 라오스에서 만난 동행들로부터 파타야 가까이에 있는 꼬 란이라는 섬에 대해 듣게 되었다. 검색을 해보니 그곳은 파타야와는 달리 한적한 해변과 작은 상점들만이 있는 곳이었다. 내가 바랐던 파타야의 모습이 있는 곳, 내일 비가 오지 않는다면 배를 타고 그곳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여행 33일 차, 2017년 5월 18일
바람대로 오늘은 날씨가 화창했다. 느지막이 준비를 마치고 꼬 란을 가기 위해 썽태우(파타야 로컬버스)를 타고 선착장으로 향했다. 선착장에 가기 위해서는 워킹스트리트를 지나야 했다. 낮에 처음 보는 워킹스트리트는 맑은 햇살에 민낯이라도 들킨 듯 조금은 황량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세워진 중구난방의 간판들은 꺼진 재처럼 싸늘한 낮잠을 자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곳이 그저께의 그곳이 맞는지 놀라워하며 천천히 선착장으로 갔다. 꽤나 많은 배들이 승객들을 기다리는 이곳에서 우리는 30밧짜리 꼬 란행 티켓을 바로 끊었다. 산 멀리에 웅장히 보이는 PATTAYA 간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컷 찍고 꼬 란행 배에 탑승했다.
평소 멀미가 좀 있는 나는 걱정되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Coldplay의 A head full of dreams를 들었다. Coldplay의 내한 공연을 보고 곧바로 출발을 해서 그런지 혹은 그저 노래들이 듣기 좋아서 그런지, 내 여행의 배경음악은 자주 콜드플레이의 노래들로 채워졌다.
‘Oh, I think I landed in a world I hadn’t seen.’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를 들으며 배의 콧날에 갈라지는 물결과 멀리에 누운 지평선을 번갈아 보았다. 작은 집들과 그 집을 껴안고 있는 한적한 섬. 상상했던 곳이 조금씩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40여분에 걸쳐 드디어 꼬 란에 도착했다. 우리는 출발 시간이 정해져 있는 '툭툭이' 대신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사메 해변으로 갔다. 탁 트인 하늘과 드넓은 해변이 온몸을 파랗게 껴안았다. 우리는 50밧을 주고 선베드 하나를 빌려 파라솔 아래에 몸을 누였다. 내가 생각했던 파타야의 풍경을, 이곳에 온 지 3일 만에 만나는, 이번 여행 첫 해변에 도착했다.
여행 36일 차, 2017년 5월 21일
꼬 란에 다녀온 후 파타야에서의 일정을 3일 더 늘렸다. 숙소 또한 선착장에 조금 더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그런데 알고 보니 숙소 앞은 레이디 보이들이 호객하는 마사지 샵들이 많은 곳이었다. 그들은 매일 아침 알쏭달쏭한 목소리로 “오빠”하며 나의 하루를 열어주었다. 언제나 묘한 이질감이 드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3일 내내 꼬 란에 출퇴근하며 각기 다른 해변들에 발도장을 찍었다. 꼬 란에는 5개의 해변이 있었다. 나는 매일 다른 해변에서 선베드에 몸을 누였고, 시간이 흐르는 것을 널브러진 채로 만끽했다.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개들을 구경하고, 몸에 묻은 바닷물이 바람에 닿아 소금이 되기를 구경하고, 때로는 시집을 꺼내 읽으며 석양을 바라보았다. 비록 눕게 된 곳이 파타야가 아닌 꼬 란의 해변이었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필연적 이게도 상상했던 곳이 근처에 있어서 다행이었고, 시간은 이틀 더 들었지만 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파타야에 대한 나의 상상은 그 자체로 목표였다기보다 그저 그냥 그려놓은 낙서와 같은 것이었기에 실망을 할 필요도 없었다. 생각대로 낙서를 그리지 못했다고 실망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지도 못한 그림을 마주했다고 해서 속상해할 필요도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처음 본 장면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낙서가 내 하루의 담벼락에 생기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여행 한 달 차, 조금씩 여행의 요령이 생기는 것 같다. 이 요령이 어쩌면 내가 잊고 있던 성격일지도 모르겠다. 3일이 지난 후 나와 건형은 더 깊은 섬으로 가기 위해 짐을 챙겨 그동안 묵었던 숙소를 나왔다. 그날도 역시나 숙소 앞에서는 호객을 하는 레이디 보이들이 서 있었고, 그들의 낮으면서도 높은 ‘오빠’ 소리에 처음으로 여유 있게 답변을 했다.
“Good bye, guys!”
p.s 처음에는 한국에서는 티비에서만 볼 수 있던 레이디 보이들의 살가우면서도 이질적인 느낌의 인사에 당황했다. 그런데 하루, 이틀이 지나고 꾸준히 그 자리에서 밝게 인사를 하는 그들을 흘깃흘깃 보며, 그들도 모종의 일이란 걸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그들은 나와는 가시적으로 다른 점이 많다. 하지만, 그들의 미소와, 인사, 그리고 직업의식 따위에서, 결국엔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나도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작별을 빌미 삼아 작은 마음을 열어보았다. 이는 단지 ‘차별을 하면 안 된다’따위의 명제를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과는 조금은 다른 차원의 깨달음이었다. ‘세상에! 저런 세상’도 결국, 같은 하늘 아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