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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Nov 16. 2019

무질서의 질서

1년 간의 세계여행 기록 ⎪몽상가도 때로는 지구 나들이를 합니다.

  여행 1일 차, 2017년 4월 18일 

  5시간에 걸친 비행을 마치고 베트남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에 내렸다. 첫 도시 하노이의 공기는 조금 눅눅했다. 다섯 시간의 공복에 허기가 진 나와 건형이는 우선 공항 내에서 햄버거를 하나 먹고,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러 나갔다. 실내보다 더 텁텁한 공기가 온몸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5분 정도를 기다려 버스를 탔고, 큰길을 따라 시내로 향했다. 조금은 낯선 이 도시의 미관. 투박하고 원색적인 글씨의 간판들과 시멘트에 색을 겨우 칠해놓은 듯한 건물들의 묘한 인테리어가 눈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나의 시야 주변을 슝슝 지나다니는 오토바이, 오토바이, 또 오토바이! 각기 다른 색의 헬멧을 쓰고 도로를 달리는 수많은 오토바이들이 내 시야를 마구 침범했다.


  시내로 들어서니 마치 숲인 듯 울창한 초록의 가로수들이 골목골목 들어서 있었다. 시내 구경을 하고 있으니 금세 하노이 기차역 앞에 도착했다. 미리 예약한 숙소는 이 기차역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내리자마자 다시 느껴지는 텁텁한 공기가 숨을 턱 막았다. 숨을 좀 쉬려고 고개를 드니 아까는 2D 영화 같던 오토바이들이 3D가 된 듯 더욱 생생하게 나를 반겼다. 길을 건너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 작은 길이라도 수많은 계산과 고민이 필요했다. ‘저 정도 속도로 온다면 건너도 되겠지? 아, 아니야. 칠 수도 있어.’ 신중하게 몇 번의 길을 건넜을까. 덥고 끈적한 공기와 내 어깨에 올라탄 14kg의 짐, 그리고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오토바이들에 나는 조금씩 인내를 잃기 시작했다. 무질서를 계산하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유, 모르겠다! 설마 치기야 하겠어?’ 


  그때부터 나는 속도를 미리 계산하기보다 일단 다리 하나를 도로에 담고 나에게 다가오는 이들과 함께 도로를 물결 타 듯 건너기 시작했다. 그러자 웬만한 속도의 오토바이들은 내 속도를 먼저 읽고 쓱쓱 나를 피해서 지나갔다.


  ‘역시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그렇게 오토바이 강 속 물길을 모세처럼 열어젖히며 대망의 첫 숙소에 입성했다. 숙소의 카운터 직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온화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주변의 너저분한 시장과 달리, 깔끔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럭셔리하지도 않은 적당한 분위기에 첫 숙소가 마음에 꼭 들었다. 그렇게 편한 마음으로 며칠간 나의 집이 될 이 아늑한 방에 무거운 배낭을 쿵하고 내려놓았다.


  꿀맛 같은 휴식을 잠깐 취한 후 바로 저녁을 먹으러 다시 나왔다. 숙소 앞 시장은 주황색 조명 아래에서 하루의 마무리를 짓고 있었다. 어깨 위에 짐이 없어서 그런지, 저녁이라 날씨가 조금은 선선해져서 그런지 내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숙소에 가야 한다는 큰 목적의식에 아까는 보지 못했던 사람들의 얼굴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웃고 떠들면서 장사를 마무리하는 사람들. 아까까지만 지독히 신경을 곤두세웠던 오토바이, 그 위협적인 것에 탄 사람들의 재미있는 표정이 보였다. 오토바이를 잠시 세워 한 발로 지탱을 하고 시장 상인에게 무언가를 말하며 식재료를 사는 사람들이 퍽 정겨웠다.


  여행 전 나는 어떤 세상을 상상했던 걸까? 외계인이 사는 세상으로 간다고 생각한 걸까? 최소한 버스에 내려 첫걸음을 내딛을 때까지만 해도 그랬던 것 같다. ‘진짜 다른 세상에 왔구나, 이 혼란스러움을 어떻게 해야 할까?'하고 말이다.


  그러나 끈적한 더위는 ‘생각’이라는 것을 조금씩 밀어냈다. 그때부터였다. '에라 모르겠다!'하고 내던진 한 발자국이 무질서를 질서화해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오토바이 길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용감함 보다는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나와 달랐다면 난 이미 오토바이 정글에서 로드킬을 당했을 수도 있다. 생각을 밀어내 준 하노이의 더위에 감사했다. 


  생각으로 가득 찬 삶. 최근의 나는 항상 그런 삶을 살았다. 계획하고 또 계획하는 삶 말이다. 학교를 다닐 때 선생님이 계획표를 쓰라고 할 때면 참 난감했다. 아직 안 겪어본 다음 학년의 생활을 어떻게 계획하라는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종종 상상력을 발휘해서 쓰고 나면 이미 그건 계획표가 아니게 되었다. 그래도 초등학생 때는 ‘일단 해 봐.’라는 소리를 가끔은 들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내 삶에 일단 해보는 건 없게 되었다. 일단은 내 앞 어딘가에 점을 하나 콕 찍고 최대한 직선으로 나아가야 했다.


  돌이켜보니,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를 건너야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 또한 완벽한 생각이 아니라 작은 한 걸음이었던 것 같다.




  생각 없는 한 걸음으로 무질서에서 질서를 찾았다.





p.s 그렇다고 하노이 오토바이 물결에 바로 적응한 것은 아니다. 수영을 하기 전에 숨을 한 번 들이키듯 언제나 길을 건널 때는 고개를 돌려봐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도 나와 같은 사람이기에 실수로 나를 칠 수도 있다. 그러면 많이 아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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