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간의 세계여행 기록 ⎪몽상가도 때로는 지구 나들이를 합니다.
여행 전 날, 2017년 4월 17일
여행을 떠나기 전 날 밤이다. 3주 전부터 준비해온 짐들을 노란 방바닥에 쫙 펼쳐 놓았다. 아직 태그도 떼지 않은 65리터짜리 파란 배낭을 먼저 가운데에 두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배낭과 깔맞춤으로 장만한 파란 침낭을 두었다. 다시 그 오른쪽에는 다이소에서 산 속옷 팩과 청바지 하나, 그리고 기능성 티, 후드 등 각종 의류를 놓았다. 그리고 왼쪽에는 나의 외모 유지를 책임져줄 세면도구와 스포츠용 수건, 로션을 놓았다. 그리고 그 바로 밑에 혹시 몰라서 챙긴 로프와 고리, 테이프, 비상 지갑, 비상 안경 등의 잡동사니도 모아놨다.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 모르는 비상약품들을 가운데에 배치하고 그 밑에는 책과 엽서들, 그리고 나의 온라인 생활을 지켜줄 보조 배터리와, 외장 하드를 놓았다. 이렇게 다 모아 놓고 보니 집 하나를 꾸릴 수 있을 정도의 디테일 높은 구성이었다.
‘블로그를 잘 찾아본 보람이 있군! 이제 진짜 모험이 시작되는구나!’
체크리스트를 보며 가벼운 것들부터 차례차례 배낭 안으로 넣기 시작했다. 가방이 밑 부분부터 조금씩 뚱뚱해지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넣다 보니 시간도 많이 걸리고 은근히 지치는 일이었다. 환기를 좀 시킬 겸 방 밖을 나서니 언제나처럼 엄마와 아빠는 TV를 보며 저녁 시간을 오붓하게 보내고 있고, 동생은 방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깔깔대었다. 또 항상 나를 반겨주는 반려견 꼬맹이는 자기 담요에 누워 이른 잠을 자고 있었다. 진짜로 가는 게 맞는 것인지 생각이 들었다가도 뒤를 돌아 널브러져 있는 짐들을 보면 실감이 나기는 했다. 군 입대조차 당일이 되어서야 실감이 났는데, 이번에는 챙겨 놓은 것들이 눈으로 보여서 그런지 전날부터 마음이 약간 헛헛했다. 체크리스트의 마지막인 침낭을 끝으로 모든 짐들을 65리터짜리 가방에 넣고 빠르게 결속했다. 당장 내일 아침 비행기라, 가방을 한 번 시험 삼아 매어보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십 년은 넘게 함께 한 내 침대가 새삼스레 편하게 느껴졌다. 앞으로 어느 곳을 가든 내 방, 내 침대만큼은 편하지 않을 것이니까 말이다.
어두운 방 안에서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으니, 무서운 감정이 올라오기도 했다. '내가 진짜 가는 것인가?' 부터해서 조금 오버스럽기는 하지만 ‘죽지는 않겠지?’ 따위의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원래 무언가 하기 전에 속으로 호들갑을 조금 많이 떠는 스타일이라 더 그런 것도 있지만 집 밖도 아닌 나라 밖을 나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가야 했다. 그곳에 원대한 꿈이나 목표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비행기를 이미 예매했고, 여행자 보험을 이미 들었고, 같이 여행을 출발하는 친구 건형이가 이미 있었기에 무를 수 없었다. 아, 물론 무를 만큼 무서웠던 것도 아니다. 하하!
여행 1일 차, 2017년 4월 18일
아침이 밝았다. 몇 시간 못 잤는데도 설레서 그런지 일어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빠르게 씻고, 미리 준비해둔 회색 후드 집업과 청바지를 꺼내 입었다. 원래 아침밥을 많이 먹지 않지만, 오늘만큼은 엄마가 해주신 밥을 겨우 겨우 깔끔하게 먹어치웠다. 그리고서는 14kg짜리 배낭을 으찻차! 하고 맨 채 현관 앞에 섰다. 꼬맹이는 ‘쟤 또 뭐 학교 가나?’하는 표정으로 쪼르르 걸어 나와 꼬리를 흔들어주었다. 엄마는 가방이 정말 크다며 하하 웃으셨다. 자식 일에서만큼은 평소보다 예민해지는 엄마의 성격에, 분명 걱정되는 마음이 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즐거움과 설렘이 더 큰 날이기에, 엄마는 그에 맞는 가벼운 웃음을 지으셨다. 물론 직접 여쭈어본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게 웃으며 집 밖을 나서니, 괜한 아쉬움이 솟구쳐 올라왔다. 눈물도 살짝 핑 돌려고 했지만, 시원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며 뒤숭숭한 마음을 설렘으로 애써 바꾸어 보았다. 실제로 발걸음을 한 걸음 씩 직접 떼기 시작하니 설렘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역시 나란 놈, 실전에 강한 녀석!’ 전철 시간표도 미리 확인했으니, 남은 건 그저 이 순간을 누리는 것뿐이었다. 평소 잘 안 찍는 셀카도 찍어보고, 2년 전 유럽 여행을 갈 때 들었던 딕펑스의 ‘VIVA 청춘’을 다시 들으며 감상에 빠져보기도 했다.
그때 마침 함께 여행을 시작하는 친구 건형이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야?” 나는 속으로 ‘이 새끼, 설레서 또 전화했구먼?’이라고 생각하며, “가고 있지~”하고 여유 있는 말투로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빨리 와, 전철 지금 전역이야!”라는 예상치도 못한 대답을 했다.
“전역이라고?”
나는 재빠르게 시간표를 확인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반대편 행 열차 시간표를 본 것이다. 평소에도 하지 않는 실수를 하필 오늘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일단 흥분을 가라 앉히고 빠르게 계산에 들어갔다. ‘여기서 역까지 빠르게 걸어서 도달하는 시간 약 12분, 전철이 전 역에서 다음 역까지 오는 시간 약 3분, 그랬을 때 내가 만약 뛴다면…?’ 침묵의 1초가 흘렀고, 나는 결론을 내렸다. ‘뛰면 해볼 만하다!’
나는 여유를 모두 집어던지고 열심히 뛰기 시작했다. 물론 내 어깨 위에 14kg짜리 배낭을 집어던지지는 못했다. ‘젠장.. 그래도 전철 타야지.. 여행 가야지!’ 14kg이나 더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정말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여정의 3분의 2쯤 왔을 때 잠깐 쉴까 생각도 했지만, 전철이 오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기 시작했다. 쉴 수 없었다. 뛰어야만 했다. 온몸이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드디어 역에 도착했고 지갑을 꺼내 교통 카드를 찍었다. 그리고 또다시 온 건지, 간 건지 알 수 없는 전철 소리가 들렸다. 건형이에게 전화가 왔다.
“나 먼저 가..”
거친 숨에 모든 말들을 빼앗겼다. 눈 앞이 핑 돌고, 이상한 기포 같은 별들이 아른거렸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텅 빈 플랫폼에 잠시 앉아 숨을 골랐다. 건형이는 다시 전화를 해서 깔깔 웃으며 “택시 타고 와.”라고 했다. 자기 돈 아니라고. 첫 판부터 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는 온몸의 땀을 아침 공기로 씻으며 택시 정류장으로 갔다. “의정부역이요.” 불안정한 숨을 고르며 창문을 내리고 먼 풍경을 바라봤다. 바람이 정말 달콤하도록 상쾌했다. 땀과 함께 많은 것들이 배출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는 ‘아, 씨..’하고 갑자기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불행 중 다행은 어찌 되었건 비행기를 못 타는 건 아니었다. 분명 이전까지는 심각했지만, 사실 심각할 필요는 없었다. 택시비 2만 원만 잊어버린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해답은 굉장히 간단했다. 하하… 하… 내 2만 원….
아오! 나 진짜 여행 가는구나!
p.s 지하철 1호선 끝자락에 있는 내 고향 동두천은 전철 배차 간격이 넓다. 그나마 출근 시간이라 배차 간격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딱 정해진 공항버스를 타러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음 전철을 탄다면 버스를 타지 못할 확률이 굉장히 높아질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비행기를 탈 수 없었기에, 나는 오히려 택시라는 운송수단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