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간의 세계여행 기록 ⎪몽상가도 때로는 지구 나들이를 합니다.
나의 몽상가적 기질을 스스로 인지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몽상가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는 '실현성이 없는 헛된 생각을 즐겨하는 사람'이며, 영어로는 'dreamer'라고 한다. 물론 예술을 좋아하는 편이고 생각을 많이 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누군가에게 스스로를 몽상가라고 소개한 적은 없었다. 나는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유재석처럼 사교적이고 친근한 리더이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유재석으로 살리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내가 그렇게 살지도 못했거니와, 더 큰 문제는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그 모습을 이뤄내지 못하면 심하게 자책했다는 것이다. 그 답답함은 내 20대의 6년을 지배했다.
사실, 나의 20대는 열등감으로 시작했다. 그 발단이 그렇게 극적이거나 특이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우리나라 대부분의 학생이 겪는 '대입'이라는 엄청난 경주에 홀로 놓였을 뿐이었다. 나의 고등학교는 기숙사형 외국어 고등학교였다. 운이 좋게도 내가 사는 지역에 이 학교가 신설되면서, 나는 지역 인재 전형으로 이곳에 입학할 수 있었다. 지역 내에서는 나름 우등생이었지만 매일 축구만 하다가 시험기간에 반짝 공부하는 정도의 내가 일반 전형으로 외고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말 그대로 운이 좋았다. 그 큰 행운에 나는 중학생 시절 어렴풋이 그리고 있던 예술 고등학교에 대한 생각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고등학교 시절은 내 인생의 여러 물결을 만들어주었다. 미래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노력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경험하기도 했다. 반면, 그동안 나를 포장하고 있던 모든 것들이 보기 좋게 벗겨지기도 했다. 우물 안 개구리의 우물이 무너지듯 말이다. 우선 학창 시절 내내 져본 적이 없는 학생회장 선거에서 처음으로 실패를 맛보았다. 유창한 상대 학생 후보의 연설에 기가 죽어, 내 차례 때 처음으로 말을 더듬으며 얼굴을 붉혔다. 또 이성에게 어렵게 고백을 했다가 공부를 이유로 차이기도 했다. 공부가 이유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처음으로 수험생이라는 현실의 벽에 차갑게 부딪혔다. 가장 심각한 것은 1년이면 따라잡을 수 있을 같았던 성적이 쉬이 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더 이상 나는 우등생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나를 증명해왔던 여러 방법들이 없어지니 내 존재가 희미해지는 기분이었다. 다재다능한 친구들이 대학을 위해 미친 듯이 달리는 이 정글 같은 곳에서 나 또한 더욱더 독하게 내 안으로 파고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열등감을 지우기 위해, 나는 수능이라는 미래에 나의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수능을 잘 봐서 좋은 대학을 갈 거고, 그래서 잃은 것들을 모두 되찾아야지.’
그렇게 고2 여름 방학부터 1년 간을 회색처럼 살았다. 이 열등감을 없애는 방법은 지금의 열등한 나를 죽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열심히 죽였다. 쉬는 시간도 죽이고, 잠도 죽이고, 웃음도 죽이고, 주변에 대한 관심도 죽이고 미래만 바라보았다. 친구들도 나에게 쉽게 다가가기를 망설일 정도였다. 그렇게 1년이 지나니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 한 방에 터지기 시작했다. 미래만 바라보고 오늘을 죽이던 내가 속도를 너무 빠르게 낸 것일까. 뜬금없게도 내 머리는 ‘죽음’이라는 먼 행성에 불시착했다.
‘어차피 사람은 죽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천국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가 지금 공부하는 것도 의미 있는 거잖아. 안 사라지니까. 정말로 천국이 있을까?'
고3 여름방학이라는 중요한 시기에 나는 갑작스레 죽음에 대한 망상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시작했다기보다 그냥 갑자기 시작되었다. 그것도 걷잡을 수 없이 말이다. 하지만 천국의 확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생각을 다잡으려고 했지만 내 의지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의지, 이성 이런 것들을 하도 써서 닳아 없어진 기분이었다. 자습실에서 공부를 하는데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았다. 친구들에게도 얘기할 수 없었다. 당장 문제 하나라도 더 맞추기 바쁜 와중에, 죽음 따위의 추상적인 것들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부끄러웠다.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담임 선생님은 나를 따로 매점으로 불러내었다. 선생님은 내게 음료 한 잔을 사주며 물었다.
“진규야, 좋아하는 음악 있니?”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다른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다시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지금껏 나는 좋아하는 것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걷잡을 수 없는 눈물에 체면도 포기하고 그냥 펑펑 울었다. 친구들에게도 말 못 한 고민들을 그때 처음 선생님께 털어놓았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학교를 며칠 쉬기로 했다. 병적으로 매일 했던 공부를 잠시 멈추었다. 여러 군데에서 상담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조언을 해주었다. 때로는 힘이 되기도, 또 때로는 힘이 빠지기도 했다. 어떤 상담사분은 진심을 다해 천국은 있는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해주었다. 한 번은 교회도 찾아갔었는데, 내가 천국을 의심하자 목사는 나에게 악마가 씌었다고 했다. 또 어떤 전화 상담사는 죽음이 꼭 두려운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왜 그렇게 단정 짓냐며, 행복한 죽음을 목표로 살아보자고 했다. 그때는 그게 과연 가능할까 싶어서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리고 생각이 너무 많아질 때는 그냥 약을 먹고 자버렸다.
그렇게 나는 수능을 보기 좋게 망쳤다. 갑작스러운 망상으로 나는 바라던 미래에 도착하지 못했다. 대학을 가기는 했지만, 마냥 기쁘지 않았다. 그래도 공부만 할 필요는 없었으니 망상에서는 자연스레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망상이 빠져나간 그 자리의 공허감을 채우기는 아무래도 어려웠다. 모래뿐이 없는 사막에서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그 망상의 빈자리에 내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아야만 했다. 웃긴 건, 그때에도 나는 나를 스스로 몽상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생각했을지라도 그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무언가를 찾겠다면서, 자꾸 바깥을 봤다. 자꾸 증명을 하려고 했다. 내 속을 들여다보는 것은 아무래도 시시한 일이었다.
뜨뜻미지근하게 20대의 6년을 보냈다. 나름 괜찮게 학교생활, 사회생활을 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에만 들어오면 막연한 공허감이 나를 뒤덮었다. 그 공허감을 잊을만한 무언가에 겨우 빠져보려고 해도 습관적으로 스스로를 절제했다. 몰입하는 것이 무서웠다. 그 몰입이 나를 현실 부적응자로 만들 것 같은 기분이랄까, 미래가 두려웠다. 나는 계속해서 내 역할의 기능을 해야 했다. 그래야 내 존재가 입증되는 것 같았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모범생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자, 더 이상 기다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쩌면 오랫동안 마음 한편에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떠날 준비를 했다. 누군가는 비겁하게 볼 수도 있지만, 빠른 물속에서 내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 채 헤엄을 치는 것은 더 이상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물속에서 나오기로 한 것이다. 온전한 무위의 나를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어서 말이다. 어떠한 역할의 무게에 짓눌리기 전의 나를 기억해내고 싶었다. 무엇 때문에 나는 휘둘리는 사람이 되었나? 몽상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들여다보아야 했다. 그래서 떠나보기로 했다. 더 이상 헤엄칠 힘이 없었다. 코에 바람을 좀 쐬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지구 나들이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