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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버른앨리스 Apr 26. 2018

흔한 동네형의 호주건축회사 사장되기 by 다니엘

건축업으로 사업하며 호주 살기


살면서 어떤 중요한 이름표가 붙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잖아.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고 선생님이 되고 경찰관이 되고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되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이름표가 붙을 때 그 무게를 견디고 또 이름표가 떨어질 때의 그 허무함과 외로움을 견뎌내는 거 같아.

호주에 오고 난 후 9년 동안 내 이름 앞에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이름표가 세 개 붙었어. 



이민자. 
요리사
그리고 레스토랑 오너.


지금 생각하면 이 세 가지 이름표 딱지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나한테 붙게 된 걸까 알 수가 없고, 이 엄청난 과정의 9년을 보낸 게 정말 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의아할 때가 있어. 나는 크게 변화에 동요하지 않는 단순한 성격이다 보니 환경의 변화에 적응력이 좋거든. 이 세 가지 큰 관문을 넘으면서도 나는 그게 관문 인지도 모르고 그냥 흐르는 물에 둥둥 떠다니 듯 여기까지 온 것 같아. 나의 노력이나 의지보다는 상황과 사람에 기대서 둥둥.





사람이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찾아지는 거라는 말이 있어.

연애를 하면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친구를 사귀면서. 어떤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새로운 모습을 계속 발견하게 되잖아. 내가 어떤 가치와 작더라도 쓸모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그것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 증명이 되는 것 같아. 그래서 우리는 계속 사랑과 인정을 찾아서 헤매는 건가 봐.


돈은 개뿔 없고, 그렇다고 세계적인 레스토랑에서 누구나 알아주는 경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영주권도 없고, 가게를 운영해본 경험은 단 1도 없던 나와 철이는 어렸고 무식했고 그래서 용감했어. 사기를 당해 덜컥 멜버른 시내에 규모도 꽤 있는 레스토랑을 인수를 하고도 사태 파악을 못했지. 


그래도 직장 생활하면서 모은 돈으로 어떻게 하면 되지 않을까? 
유튜브 같은데 보면 셀프 인테리어도 하고 하니까 그런 거로 돈을 아끼면 되지 않을까? 
몸으로 부딪히면 까짓 거 안 되는 게 뭐가 있겠어? 


주변에 이런 걸 의논할만한 사람도 없고 우리끼리만 멍청하고 안일한 생각을 주고받다 보니 어쩐지 불가능하지 않을 것만 같았어. 어떻게 던 되겠거니 하고 일단은 패를 던졌는데 이건 뭐, 당연한 결과였지만 참패였어. 우리가 가진 돈으로는 가구에 설비에 뭐 어림 반푼 어치도 없었고 폐업한 베트남 레스토랑은 제대로 된 인테리어가 없이는 결코 장사를 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수준이었어. 

있는 돈을 긁어모아서 부랴부랴 페인트칠이라도 제대로 해줄 업체를 찾았고 그때 잡지에서 본 이름이 '솔트'야. 견적이나 받아볼까, 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화를 했고 그렇게 우리는 다니얼과 Q를 만났어. 


그들을 만난 그 순간, 그 순간이 바로 내가 너에게 들려준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이야.





스타트업에서 점점 회사의 모습을 갖춰가던 2013년의 솔트는 

스타트업 특유의 에너지가 넘쳤어. 우리는 첫 미팅을 하였고 예상한 대로 우리가 가진 돈으로는 페인트칠도 제대로 하기 힘들다는 대답을 들었지. 그런데 웬일인지 우물쭈물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됐어. 두 번째 만난 자리에서 뜻밖의 제안을 듣게 된 거야.


우리가 인테리어를 해줄 테니 같이 해보는 거 어때요?


거절할 이유도 없거니와 사실 거절 자체가 옵션이 아니었던 우리는 단박에 그러자고 했고 우리는 생판 모르는 오빠 두 명과 그 무섭다는 '동업'이라는 걸 하게 된 거야. 사기를 당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인수한 첫 가게, 돈이 모자라서 위약금을 물고 접을 뻔했던 그 못생긴 베트남 국수 집는 이 두 남자의 도움으로 완전히 새로 태어났고 지금 멜버른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유명한 한식 비스트로가 되었어. 그게 벌써 4년 전의 일이야.








나조차 나를 전혀 믿지 못할 때. 

호주에서 죽자고 모은 돈을 날릴 수 있는 위기 앞에서 스스로를 책망할 때.


네까짓 게 무슨 가게를 한다고 까불어. 괜한 손해만 보게 생겼잖아.
분수껏 살아. 요리사가 된 게 어디니. 돈도 없는 주제에 꿈이 컸다.
어차피 가게를 할 그릇도 안돼. 엎어진 게 차라리 잘된 거야.


스스로를 꾸짖고 타이르는 일을 반복하던 그때.

나는 다니얼과 Q를 만났어. 

큰 회사라서 자금이 펑펑 남아도는 곳이었으면 또 몰라. 겨우 스타트업에서 벗어난 이 두 명의 청년 사장들이 빚을 내서 우리에게 투자를 하겠다고. 감각이 있고 에너지가 있고 가능성이 넘친다고.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나를 믿고 가겠다고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물론, 수다도 없었을 거야. 수다를 사랑해주는 많은 교민들과 호주 현지인들도 만날 수 없었겠지. 지금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이지. 

그들이 아무도 모르던 우리를 알아봐 주었고 우리는 그렇게 요리사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되었어. 나에게 새로운 이름표를 붙여준 사람들, 내가 나를 믿을 수 없던 시기에 나를 믿어준 사람들이 그 둘이야. 

평생 고마워할 사람들이겠지.





나의 마지막 청년 이민자는 그 두 남자 중 큰형인 대니얼이야. 

나의 세 비즈니스 파트너 중 가장 큰 오빠이자 SALT Design and Construction 의 대표 대니얼을 인터뷰해보았어. 솔직히 4년 만에 처음으로 대니얼의 속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 사실 동업자란 가장 가까워야 하지만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관계이기도 한 게 불문율이잖아. 서로 바쁘니까 자주 보지도 못하고 어쩌다가 만나면 가벼운 잡담이나 사업 관련된 이야기만 한다고. 인터뷰를 핑계로 처음으로 신나게 수다를 떨었어. 4년을 함께 사업을 하면서도 전혀 알지 못했던 그의 암울한 흑역사들이 대방출되는 시간이었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 

그가 10년을 몸담은 호주의 건설업에 대해.

호주에서 스타트업으로 시작해서 중견 시공업체로 키워가는 과정에서 배운 점들에 대해.

그리고 20대를 누구보다 열심히 낭비해본 사람으로서, 청춘이라는 것에 대해. 


흔한 동네 형, 마냥 사람만 좋은 4수생 형이 별 생각없이 어쩌다가 호주에 오게 되고 좌충우돌 시련을 겪으며 강제로 어른이 되어 10년 후 멜버른에서 손꼽히는 인테리어 시공업체를 운영하는 대표가 된 이야기, 깔깔 거리며 웃으며 들었지만 여운이 길게 남았던 대니얼의 이야기, 나도 몰랐던 큰오빠의 흑역사와 진짜 속마음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또 열심히 편집해 봤어.


마지막까지 재미있게 읽어주기를 바래!!.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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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안녕, 다니엘! 만나서 반가워. 일단 소개부터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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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 안녕, 나는 올해 한국 나이로 40을 채운 두 아이의 아빠야. 호주에 온지는 올해로 11년이 되었고 현재 SALT라는 이름의 인테리어 시공업체의 대표를 맡고 있어. 


http://www.saltdesignandconstruct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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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너와 가까이 지낸 지 꽤 됐으면서도 나는 네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잘 몰라. 건축과 인테리어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거든. 어떤 회사를 운영하고 있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 먼저 해줄 수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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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2012년 처음 시작한 우리 회사는 RMIT 건축학도 3명이 창업한 스타트업이었어. 원래는 디자인을 전문적으로 하던 작은 곳이 었는데 동업자들과 헤어지고 홀로서기를 하면서 2015년 10월에 설계와 동시에 시공까지 함께 하는 종합 시공업체 SALT Design and Construction 이 된 거야.

우리 회사가 하는 일을 한마디로 말하면 어떤 샵의 위치가 정해지는 아주 시작부터 키를 넘겨받아 오픈을 하는 그 끝까지 모든 일을 진행하는 곳이야. 솔트와 클라이언트가 계약을 하면 먼저 정부와 건물주, 지역 상인들에게 공사의 허가를 받고 양해를 구하는 등의 서류 절차를 진행해. 그리고 클라이언트와 여러 번의 회의를 거쳐서 합리적이고 좋은 인테리어 디자인을 뽑아낸 후에 그 디자인을 현실로 만드는 거야. 기존 건물의 철거와 함께 시공팀이 공사를 진행하면서 우리와 함께 일하는 여러 유닛들 - 목공팀, 전기팀, 페인트 타일팀, 배관팀 - 과의 일정을 조율하고 감독관리를 하면서 한 샵을 완성시키는 것, 한마디로 현장 프로젝트 메니징이 우리 회사가 하는 일이지. 


나는 그런 팀의 수장으로 주로 하는 일은 클라이언트들을 만나서 계약을 성사시키고 각 팀을 조율하고 프로젝트들이 원만하게 진행되도록 관리하는 일들을 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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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무언가 되게 복잡하게 들린다. 그럼 이 일은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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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음...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아주 처음부터 이야기를 해볼게. 고등학교 때 입시미술을 했던 게 시초였던 것 같아. 나는 공부에도 관심 없고 그냥 친구들이랑 어울려 노는 거 좋아하는 학생이었는데 한 미술 선생님 눈에 뜨인 거야. 재능이 있으니 미대를 준비해보라며 미술학원비를 무려 두 달이나 내주더라고! 뭐 다른 거 하고 싶은 거도 아니고 잘한다고 하니까 으쓱한 마음도 생기고 해서 미술을 시작했어. 그렇게 미대를 준비를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선생이 아는 학원에 학생들 팔아넘긴 거더라고. 내가 특별히 잘해서가 아니었던 거야. 아무튼 미대 입시 준비는 시작되었고 단순한 내 머리에는 '아 미술을 했으니 홍대를 가야겠다'가 꽂혔어. 홍대 산업디자인과를 목표로 입시를 했고 당연히 떨어졌지. 그리고 또 도전을 했고 또 떨어졌어. 그리고 한번 더 도전하고 또^^ 수능만 무려 4번을 보고 나는 군대에 갔어.

아버지가 사업을 꽤 크게 하셔서 집안은 넉넉한 편이었어. 그렇다고 엄청 부자는 아니었지만 장남이 번듯하게 성공하기를 바라는 부모님은 공부한다는 말에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지. 조급한 부모님과 달리 성격상 느긋하고 철없는 나는 매일 헤헤 거리면서 별생각 없이 용돈 타쓰고 친구들이랑 게임하고 노느라 바빴어. 해놓은 일은 전혀 없이 군대만 전역했는데 벌써 20대 중반을 넘겼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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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수능을 4번 보고 군대를 갔다고?ㅋㅋㅋㅋ 유복한 집에서 해맑게 용돈타쓰고 놀러 다니는 4 수생 너를 생각하니 왜인지 응답하라 1988의 정봉이 형이 떠오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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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응,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지. 정봉이형은 30살 전에 정신이라도 차렸잖아. 나는 정말 사는 게 뭔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먹고사는 일에 대해 걱정해본 적도 없고 정체성이랄 게 전혀 없었어. 미술도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었고 홍대 가고 싶은 이유도 유명하니까, 그게 멋있어서 정도? 딱히 이유도 없었어. 부모님은 내가 꼭 4년제를 나오기를 바라시니 그 꿈은 이뤄드려야 할 것 같아서 군대에서 수능 공부를 좀 했는데 홍대는 무슨, 눈을 한참 낮춰서 지방대학교 산업 디자인과를 들어갔어. 학교에는 들어갔는데 그림에 출중한 거도 아니고 학과 공부에는 관심 없고. 동생들한테 맨날 술 사주고 차 있으니까 동생들 데려다주고 또 신나게 어울려 놀았어. 왜 학교에 한 명씩 있잖아. 친구들 엄청 많은 사람 좋은 형, 그게 나였어. 그렇게 1년을 다니다가 친구 중 한 명이 사업을 해보자고 하더라고. 내가 컴퓨터를 잘하니까 그걸 활용해서 액세서리 인터넷 쇼핑몰을 하자는데 그게 또 그렇게 솔깃한 거야. 혹해서 학교까지 휴학을 하고 친구랑 골방에 틀어박혀서 구슬 꿰고 그랬어. 그렇게 1년을 뭐 홈피 만들고 뭐하면서 준비를 해서 오픈을 딱 했는데 3일 만에 친구가 이건 아닌 거 같다고 접자고 하는 거야. 준비기간 동안 질질 끌면서 질려버리고 하기 싫어진 거지. 그걸 또 그렇게 접었어. 쌓인 재고를 떨이로 털어내고 나서는 난 뭐를 해야 하나, 집에 그냥 가만히 있었어. 한마디로 세상 물정 모르는 해맑은 한량이었지. 한량. 아무 의욕도 생각도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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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아니, 그렇게 생각 없던 사람이 호주에 올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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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나의 20대 시절 유일하게 내가 열정을 쏟아부었던 게 바로 연애사업이었어. 다들 그렇잖아? 현실이 시궁창일수록 이 연애만이 내 인생 유일한 낙이고 세상의 중심이 되는 거지. 당시 여자 친구였던 제이는 정말 나의 태양이었어. 군대 가기 전에 내가 인천공항에서 보안요원 알바를 했었거든. 그때 공항 면세점에서 일하던 제이를 보고 한눈에 반한 거야. 바라만 보다가 리셉션 일하는 친구가 자리를 마련했고 그렇게 사귀게 됐어. 예쁜 여자 친구가 생기고 군대도 기다려주고 하니까 너무 행복한 거지. 그때도 그냥 그 연애가 마냥 행복했을 뿐 뭘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 근데 제이는 나와 딴판으로 정말 야무지고 미래지향적인 친구거든. 잔소리를 해도 해도 변함이 없이 매일 놀러 다니고 엄마한테 용돈타쓰고 등짝이나 맞는 내 안일하고 한심한 모습에 질려버린 거지. 5년 차 연애 중이었는데 어느 날은 이별을 통보하더라. 너무 오래 사귀어서 한국에서는 나를 떼어내기 힘들다고 판단을 한 건지 호주로 가겠다는 거야. 

너의 보장되지 않은 미래와 변함이 없이 생각 없이 사는 너의 모습, 위태로운 삶에 환멸을 느낀다며 이제 나는 나의 갈 길을 가야겠다고 진짜 미안하다면서 호주로 떠나버렸어. 그때는 세상이 무너진 거 같았어. 1년 동안 폐인처럼 살았지. 맨날 술로 밤을 지새우고 같이 갔던 떡볶이집, 포장마차 혼자 가서 술 먹고 호주에 전화해서 울고 불고 했어. 그러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정신을 차려서 다시 제이를 찾아와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공항에 가서 알바를 하고 돈을 모았어. 오로지 여자 친구를 다시 찾아오려는 일념 하나로 호주로 가게 된 거지. 4수를 해서 들어간 대학교도 포기를 하고. 말했잖아. 나 진짜 아무 생각 없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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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그렇게 28살에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로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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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난 그러려고 했지. 그게 더 쉬우니까. 

그리고 애초에 호주 가는 이유도 제이랑 좀 호주에서 놀다가 다시 데리고 오려고 였거든. 근데 내가 너 보러 호주 갈 거라고 하는 소리를 들은 제이가 한숨을 푹 쉬더니 (각설이냐,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이런 한숨) 너 워킹홀리데이로 오면 매일 또 술 먹고 놀기만 할 거니까 올 거면 그나마 공부해야 하는 학생비자를 받아 오라는 거야. 

어차피 영어는 해놓으면 나중에 써먹을 거고 부모님한테 더 명분도 있잖아. 그래서 랭귀지 스쿨을 등록하고 호주에 왔지. 

그때 공항에서 제이를 만났는데, 제이가 나중에 말하기를 나를 딱 보는데 내가 너무 해맑게 손을 흔들면서 반가워서 신나 하고 있더래. 쟤랑은 내가 결혼하겠구나, 싶었다고 하더라고. 

아무튼 영어학교에 들어갔어. 근데 또 이것도 너무 재밌는 거야. 한국에서 노는 거랑은 또 다른 재미더라고. 세상에 이렇게 재밌을 수가 없어. 말은 안 통해도 술 같이 먹고 장난치고 눈빛만 보내도 서로 알아듣는 게 너무 재밌어. 매일매일 놀아도 언제나 새로워. 돈이 없어서 그렇지 돈만 있으면 한도 끝도 없이 놀겠더라고. 그런 나를 보는 제이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어.  


하루는 제이가 물어보는 거야. 


너는 아르바이트 안 해? 


부모님이 보내주는 돈 아껴 쓰면 모자라기는 해도 안 해도 될 거 같아, 힘든 거 하기 싫은데? 했다가 욕만 먹고 아르바이트를 구하게 됐어. 그때 제이가 그러는 거야. 


너 여기 알바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넌 영어도 못하니까 이력서랑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 돼. 


근데 그때 내가 한인 축구 리그에서 공을 차던 중이었거든. 우리 팀 감독님이 마트 사장님이었어. 감독님한테 알바 자리 없냐고 물어봤더니 마침 공석이 하나 있대. 이력서도 필요 없이 당장 출근하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옳다쿠나 하고 제이한테 알바 구했다고 자랑을 하고는 그 당시 최저시급 발꿈치도 안 닿는 돈 8불을 받고 라면 박스를 열심히 옮겼어. 그것도 나름대로 아르바이트하는 애들이랑 친해지고 하니까 재미있더라고. 나는 또 밥벌이하면서 살게 돼서 그걸로 만족하고 해피하게 지내는데 또 제이는 그게 아니었던 거지.


그때 제이가 나한테 물어본 게 

너 언제까지 박스만 옮길 수는 없지 않아? 였는데 내 대답이 '사장님이 나 일 잘한다고 해서 이제 나 캐셔도 할 거 같아!'였어. 근데 제이가 말을 딱 막더라고. 


너 그런데 여기까지 나 쫒아와 놓고 미래에 대한 생각은 안 해? 우리 이제 서른이 코앞인데 결혼도 하고 해야 하지 않아? 우리의 장래에 대해서 한 번만 진지하게 생각해볼 마음은 없냐?


그때 한참 랭귀지 스쿨도 너무 오래 다녀서 질린 상태였고 해서 그러면 다른 걸 배워야겠다고 생각을 한 게 컴퓨터였어. 내가 컴퓨터를 잘하니까 앞으로 뜬다고 하는 IT를 배워봐야겠다고 해서 또 부모님한테 손을 벌려서 직업학교를 갔지. 랭귀지를 오래 다녔어도 공부는 안 했으니까 학교에서 선생님 말은 못 알아듣고 겨우겨우 1년을 마쳤어. 그때가 29살이었는데 우리 부모님은 그때까지도 나를 포기 안 하시고 4년제 학사학위를 꼭 따라고 하시는 거야. 배우고 싶은 게 있다면 지원해주겠다고 하셔서 이제 그다음 학업을 고민하게 된 거지. 모든 과 리스트를 찾아봤는데 영어가 부족한 내가 졸업을 할만한 게 마땅치 않은 거야. 그런데 내가 미술을 했잖아? 건축은 그리는 게 많을 테니까 이게 그나마 낫겠다 싶더라고. 사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미술 심리학과였는데 주변에서 다 뜯어말렸어. 들어가자마자 F만 쌓다가 나올 거라고 해서 건축으로 방향을 틀었지. 그때 내 나이가 갓 30살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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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와, 진짜 건축을 시작하려고 학교를 몇 군데를 다니고 몇 년을 방황한 거야?! 그렇게 오래 방황하다가 건축을 시작했을 때 이 일이다, 싶었어? 나도 방황이 길다가 요리를 시작한 게 27살이었거든. 그때 나는 이 일을 해야겠다는 감이 왔었어. 너도 그랬던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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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아니 그 쪽일이 딱 내 적성에 맞았던 건 아니고 그때부터 내가 철이 들었어. 상황이 이 일을 하도록 만들게 된 거지. 건축으로 가장 유명하다는 RMIT에 입학을 하고 나는 제이와 그렇게 원하던 결혼식을 올렸어. 그러고 나니까 갑자기 없던 책임감이 마구 생기는 거야. 내가 애랑 결혼을 했으니 이제 책임을 져야 해!! 하는 생각이 계속 들더라고. 그래서 학교 공부를 열심히 했어. 그렇게 1학년을 보내고 났는데 이번에는 제이가 우리 첫째 건우를 임신을 한 거야!! 너무 좋았지. 너무 좋은데 학생 신분에 부담감이 엄청 들더라고. 그때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진짜 공부를 죽을힘을 다해서 했어. 내 생애에 지금까지도 뭐를 그렇게 열심히 해본 적이 없어. 10살이나 어린 호주 친구들 쫒아다니면서 애걸복걸해서 영어로 설명을 듣고 과제를 겨우겨우 하면서 겨우 따라가서 2학년을 마치고 애아빠가 되었는데. 집이 그때 진짜로 쫄딱 망한 거야.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난 거야. 완전히 망했어. 나는 그때 학비도 생활비도 지원을 받는 상태였는데 그게 딱 끊긴 거야. 애는 키워야 하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래서 돈을 꾸러 다녔어. 렌트와 분유값 생활비를 꾼 돈으로 야금야금 메꾸다가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서 학교를 휴학을 했어. 휴학이 가능했던 게 그때 우리가 영주권이 나온 상태였거든. 제이가 페이스트리로 영주권을 취득한 상태였어. 앉아서 어떻게 하나 생각했어. 마트나 식당에서 일해서 세 식구를 어떻게 먹여 살려, 다른 방법을 궁리하다가 내가 딴 재주는 없고 컴퓨터를 잘하니까 이걸 활용해야겠다 싶은 거야. 내가 오래 일했던 마트 사장님 (우리 축구팀 감독님)이 내 사정을 아시고는 마트의 앞에 공간을 조그맣게 내주마, 뭐라도 해봐라 하셨어. 그래서 책상 하나, 노트북 하나 가져다 놓고 교민 인터넷 카페에 광고를 올리고 노트북 수리를 시작한 거야. 

그러다가 애플 아이폰이 나왔는데 그걸 보니까 작은 컴퓨터더라고. 이제 이게 유행할 테니 이걸 수리하면 돈을 벌겠구나 싶어서 분해해보고 유튜브로 찾아보면서 수리하는 방법을 배우고 했어. 그렇게 돈을 벌어서 친구들 돈을 갚고, 남은 두 학기를 한 과목씩 들어가면서 겨우 졸업을 했지. 오랜 학생 신분에서 벗어난 거야. 


컴퓨터 수리 샵을 조그맣게 하면서 이것도 좋지만 그래도 건축을 그렇게 비싼 돈 들여서 배웠는데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어느 날은 멜버른에 새로 생긴 고급스러운 한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는데 너무 멋있는 거야. 지금은 수다처럼 트렌디하고 힙한 비스트로도 있고 다양한 한국 레스토랑이 있지만 10여 전의 멜버른 한국 레스토랑은 좀 허름하고 유행에 떨어지고 저렴한 그냥 밥집 느낌이 대부분이었거든. 고급스러운 한국식 디자인이 차용된 그 샵 피팅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런 걸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 그때 당시에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던 친구와 마스터를 졸업한 동생이랑 많이 어울렸는데 우리끼리 이야기를 한 끝에 우리도 한번 해보자! 하고 의기투합을 하게 된 거야.


RMIT를 갓 졸업하거나 다니고 있던 학생들 3명이서 뭉친 작은 스타트업, 여행사 한편에 사무실이라고 하기도 뭐한 공간을 빌려서 책상을 세 개 욱여넣어서 시작한 그게 시작이었지. 뱅뱅 길게도 돌아왔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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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그래, 지금의 솔트를 아는 사람들은 상상이 안 되겠지만 나는 스타트업 과정의 솔트를 직접 본 사람으로서 이 이야기들이 더 짠하다. 그때 솔트 사무실 간다고 하면 겁부터 났다구. 그 낡아빠진 건물에 덜컹덜컹, 이거 떨어지는 거 아니야? 싶은 엘리베이터. 여행사를 지나서 들어가면 빼꼼 보이는 책상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솔트 오빠들. 안 그래도 더운 여름에 낡은 건물에서 쪄 죽을까 봐 선풍기는 샀는데 놓을 자리가 마땅치 않을 만큼 좁았잖아. 난 그 건물 앞을 지날 때면 그때 생각이 지금도 나. 

지금은 중견회사인 솔트도 그렇게 작은 청년 스타트업이었던 시절이 있었잖아. 요새 해외에서 작게 사업을 해보려는 청년들을 보면 감회가 새로울 것 같아. 정부 인가, 허가, 사무실 렌트 등 다 한국과 다르니까 많이 좌충우돌해야 할 텐데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드니? 너는 이 스타트업을 시작하면서 어떤 부분이 힘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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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뭐 허가고, 안 좋은 환경이고, 다른 건 다 괜찮았어. 

스타트업, 특히 인테리어 업계의 스타트업은 딱 한 가지가 힘들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그럴 기회가 안 생기는 게 힘들지. 

'일을 따는 거'가 제일 힘든 거야. 나라는 사람, 솔트라는 회사는 아무도 모르잖아. 광고를 보고도 얘네는 뭐하는 애들이지? 무슨 일을 했던 애들이지? 싶은 거야.

너네 여태까지 했던 프로젝트 보여줘라고 하는 클라이언트한테 대학 과제해놓은 거 보여줄 거야? 그럴 순 없으니 믿고 맡겨주십시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런 말밖에 할 수가 없는 거지. 믿음이 안 가는 건 아닌데 이 인테리어라는 게 사실 한두 푼 하는 게 아니잖아. 전재산 털어서 자기 가게 하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어떻게 초짜한테 덜컥 일을 주고 맡기겠어. 그러다 보니 일을 따는 게 굉장히 힘들고 아주아주 오래 걸려. 일을 따는 게 아니고 하늘의 별을 따는 거나 마찬가지야. 문의 들어오는 거는 아주 작고 누가 해도 상관없는 거. 집에 선반 달아주세요 라던지 우리 개집 지어주세요 뭐 이 딴 거나 들어오는 거야. 

우리는 3명 다 본업이 있었고 이 스타트업을 사이드로 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어. 두 명은 학생 신분이었고 나는 컴퓨터 수리로 수익을 내고 있었잖아. 처음에는 직장이나 수입원을 가지고 해야 답이 나올 때까지 버틸 수 있어. 수익이 날 때까지 아주 오래 기다려야 할 수도 있거든. 


일을 맡기는 클라이언트들은 귀신같이 알아. 이 회사가 어느 규모이고 어떤 일을 해왔는지 말 안 해도 다 알거든.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회사에 규모가 있는 일을 맡기게 되어 있어. 그런데 내가 이런이런 일을 저희가 했습니다 라고 자랑스럽게 보여줄 만한 레퍼런스를 쌓으려면 작은 일부터 쌓아가는 방법밖에 없거든. 작은 일을 성심성의껏 하다 보면 조금 더 큰일, 조금 더 큰일. 그렇게 어느 순간 포트폴리오가 쌓이고 그러면서 큰 일들이 들어오고 그렇게 자리를 잡는 거 같아. 처음부터 큰 프로젝트가 들어오지는 않아. 인테리어 업계에서는 최소 2년은 버틸 생각을 해야지 조금씩 빛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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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지금까지 몇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네가 여태껏 맡았던 가장 큰 프로젝트는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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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사업을 운영한 7년 동안 나는 100개 남짓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진두지휘했어.

그중 규모로 가장 컸던 건 '뉴트리오 바이오텍'이라는 건강보조식품 만드는 한국 제약회사의 호주 공장을 설계하고 시공한 거였어. 평으로 치면 한 천평 정도? 우리 회사가 대형 건설회사가 아닌데 그렇게 큰일이 들어오니까 신기하기도 했고 뿌듯했지. 그리고 요식업계에서 가장 크게 한 프로젝트는 이 곳에서 사업을 아주 크게 하는 일본 사업가에게 의뢰를 받은 일식 고급 바비큐 레스토랑이었어. 일본 특유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 일본 현지에서 인테리어 설계를 해서 우리한테 줬는데 이 쪽 법규나 시스템과 다르다 보니까 일이 엄청 복잡해지는 거야. 수많은 미팅을 하고 계속 수정을 했어. 공사 기간만 5개월이 걸린 대규모 프로젝트였지. 밥 먹듯 야근하고 밤샘하고 현장에서 자고 일어나는 일도 허다한 날들이 이어지고 이게 끝나기는 할까 했는데 끝은 오더라. 마지막에 키를 넘겨주면서 클라이언트와 악수를 하는데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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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자, 이제 토목 건축계 후배이나 스타트업을 계획하는 후배들이 궁금해할 만한 이야기들을 좀 해보자. 

현업자로서 호주에서 건축이나 토목업계로 진로의 전망은 어떻다고 생각해? 추천할만하다고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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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호주에서 이쪽 분야는 전망이 괜찮다고 생각해. 한국과 비교해서 여기는 아직 개발이 안된 곳들이 수두룩하거든. 인구도 꾸준히 느는 편이라 인프라는 더 많이 필요할 거고 도시들은 계속 커져갈 거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멜버른 만 해도 시드니 같은 대도시로 만들겠다는 목표로 엄청나게 많은 프로젝트들이 동시에 진행 중이거든. 봐, 우리 지나가는데 마다 다 공사판이야. 멜버른이라는 도시 자체가 팽창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 시드니 가보면 거기도 다 공사판인 건 마찬가지거든. 이런 대도시들이 이렇게 발전을 거듭하는 반면에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아직 기반시설이 안 돼있는 곳들이 너무 많아. 

땅덩이가 원체 넓으니까 호주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훨씬 더 전망이 좋지. 나는 추천할 만한다고 봐. 굳이 한국과 비교를 하자면 한국은 나라가 너무 작다 보니까 경쟁이 심하고 할만한  굵직한 프로젝트가 드물어. 있어도 대기업 위주로 돌아가지. 그리고 유행도 심하고 턴오버가 너무 빠르다는 단점이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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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턴오버가 빠르면 업계들은 좋은 거 아냐? 유행 따라 계속 부시고 짓고 부시고 다시 짓고 한다는 말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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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그렇지. 그런 면에서 일감이 계속 생기는 건 좋은데. 그게 따지고 보면 경기 불황 때문에  그런 거거든. 줄줄이 폐업하고 새로 개업하고 또 폐업하고 그러면서 간판업자랑 인테리어 업자만 호황이라고들 하는데 전체적으로 사회에서 돈이 회전이 안되는데 호황은 무슨 호황이야. 인테리어 업계도 너무 포화상태라 가격경쟁도 극으로 치닫고 있어. 한국은 이 업계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계속 이어질 거라고 봐. 대기업 위주로 돌아가면서 큰 데는 계속 커질 거고 작은 소규모 인테리어 업체들은  자기네들끼리 가격 후려치는 경쟁으로 제살 깎아먹기를 이어갈 거고. 그 안에서 솔트같이 어중간한 크기의 중견 업체들은 딱히 설자리도 없는 거지.





알리스 : 근무시간이나 근무환경은 어때? 한국은 건축 토목학과는 대학 때부터 과제량부터 살인적이고 밤샘은 밥먹듯이 한다고 하는데 그게 필드 가기 전에 적응훈련이라는 이야기까지 있거든.  호주에서 이 직업은 근무 환경이나 워라밸 지수가 어떤 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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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딱히 잘라서 말해주기는 힘든 부분 같아. 

이게 나라에 상관없이 업계 특성상 야근이 없을 수가 없거든. 프로젝트가 언제까지 꼭 끝내야 하는데 시간이 얼마 안 남으면 몰아서 할 수밖에 없어. 그런데 반대로 또 나라 특성상 업계에 상관없이 쉬는 날도 많고 근무 시간이 길지 않지. 

이 일이라는 게 정부기관들의 허가 절차를 워낙 많이 거쳐야 하고 진짜 수많은 업체들과 연결돼서 함께 하는 일이거든. 다들 쉬는 날 맞춰 쉬고 칼퇴근을 하는데 우리끼리만 으쌰 으쌰 하고 밤샘한다고 해서 안 되는 일이 되고 그러지 않아. 분명히 한국과 비슷하게 힘들게 돌아가는 부분도 있지만 호주이기 때문에 확실히 편한 부분도 있을 거야. 업체마다 특성이 틀리겠지만 나는 한국보다 나은 점이 많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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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영어는 얼마나 필요할까? 이 쪽일을 하고 싶은데 영어가 얼마나 중요할까요,라고 묻는 후배에게는 뭐라고 해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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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영어를 못하면 여기서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 몸으로 열심히 때울 수 있는 막내에만 머물려도 괜찮거나 좁은 코리안 타운에서 한국 사람과 하는 작은 일만 맡아도 괜찮다면 영어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는 있거든. 하지만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일을 제대로 책임지고 하고 위로 올라가고 싶다면 영어는 필수야. 

사실 나 영어 수능 15점 맞았었어. 나는 영어가 정말 약해서 정말 고생을 많이 했고 지금도 가끔은 스트레스를 받아. 영어 때문에 실수를 하거나 창피했던 기억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하나 기억나는 걸 말하자면 어느 날은 페인트 색깔을 클라이언트한테 받았는데 얼핏 보니까 CH로 시작해서 PAGNE로 끝나는 거야. 아 짙은 갈색 페인트를 주문하면 되겠구나 했지. 왜냐면 나는 정말 단순하니까 대충 보이는 대로 침팬지라고 읽은 거야. 주문을 했는데 페인트 업체에서 전화가 왔어. 이게 뭐냐고. 그래서 당당히 말했지


침팬지~ 침팬지 컬러로 줘


왓? 뭐라는 거야. 무슨 컬러 달라고?


침! 팬! 치! 동물원에 있는 거 몰라? 침~팬~치~(심지어 한 음절씩 천천히 말한다)


그런 게 어딨냐, 왜 없냐 하고 옥신각신하다가 상대편이 한숨을 쉬면서 너 지금 보고 있는 거 스펠링을 하나하나 불러달라더라고. CHAMPAGNE. 샴페인. 샴페인 컬러였어. 사실 그게 말이 되지, 침팬지 색이 말이나 되냐?

그 당혹감이란. 정말 쥐구멍이 어디 있나 찾아보는 심정이 이런 거구나 싶더라. 지금에야 웃으면서 말하지 그때는 정말 ㅋㅋㅋㅋㅋㅋ잊히지가 않는 수치감이야. 그런 일을 몇 번 거치면서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고 지금은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내가 원하는 디테일을 잘 설명할 수 있게 되었어. 영어로 스트레스받는 일은 거의 없지. 어른이 돼서 이 곳에 온 내 수준에는 너무 어려운 영어는 원어민에 가까운 직원들이 처리해주고 하니까 내 부담도 많이 줄었고. 

아무튼 몸으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많이 힘들어질 거야. 영어가 생각보다 굉장히 중요한 업계라는 걸 알고 시작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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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토목이나 건축이 전통적으로 완전히 남초 직업이잖아. 한국에서도 디자인 업계는 여자가 많다고 해도 시공 쪽이나 건축 토목현장은 여성인력이 거의 없는데 호주는 어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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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너도 공사현장 지나면서 많이 보겠지만 여성이 일하는 걸 보는 게 굉장히 흔해. 물론 신체적으로 워낙 힘든 일이다 보니까 현장일은 압도적으로 남자가 많기는 해도 여자도 적지 않아. 한국과 마찬가지로 호주도 이 업계는 남초야. 직업 자체가 거칠고 육체적으로 힘들고 야근도 많다 보니까 남학생들이 많이 지원을 해. 대학교에서 일단 남학생들이 많아. 하지만 함께 공부하고 전공한 여자 동기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취업을 하고 건축회사를 다니고 필드에서 잘 일하고 있는 걸 보면 여성이라고 해서 기회가 안 주어지는 건 아닌 거 같아. 그리고 회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보니까 어떤 현장은 남성적인 감성이 필요하지만 어떤 현장은 여성적인 감성이 필요하더라고. 여성이 디자인 나 현장 감독한 프로젝트는 티가 확실히 나는 부분도 있어. 물론 좋은 쪽으로. 생각보다 유리천장이 공고한 업계는 아닌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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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요리를 한국에서 오래 한 사람들은 호주에서도 어차피 통하는 기술일 테니 가면 바로 취업하고 기술을 선보일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고 왔다가 생각보다 다른 시스템과 영어 전문 용어 때문에 당황하고 의기소침해지는 경우가 많아. 인테리어 업계는 어떠니? 한국에서 날고 기던 베테랑이라면 호주에서도 바로 기술을 써먹을 수 있을까? 시스템이 많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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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냉정하게 말하면 한국에서 배운 기술과 경력은 오자마자는 쓰기 힘들 거야. 다시 시작한 다는 마음으로 오는 게 좋아. 정말 본인의 기술에 자신이 있고 인정받을 만한 실력이라면 그걸 쓸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오게 되어있어. 그때 제대로 마음껏 실력을 뽐내고 싶다면 이 게임에서는 어떤 룰이 있는지 어떤 시스템을 따라서 움직여야 할지 미리 알고 판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잘 나가는 것 같다가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업체에 손해를 입히거나 본인의 평판이 곤두박질치는 수가 있어.

학교를 다니면 제일 좋아. 여기 법규나 용어부터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학비가 만만치 않다는 단점이 있어. 솔트 같은 업체에서 바닥부터 배운다는 생각으로 지원해서 일을 하면서 배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여기는 실력만 있으면 연차에 상관없이 올라갈 수 있으니까 기술이 있다면 분명히 빠르게 성장하게 되거든. 조급해하지 말고 본인의 실력을 믿고 기술의 힘을 믿고. 후퇴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한 발자국 뒤로 도움닫기 한다고 생각하고 밑에서부터 시작하면 분명히 그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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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토목이나 건축을 배우고 일하는 걸로 이민을 할 수 있어? 직접적으로 영주권 취득이 가능한 직업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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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응, 건축과 토목은 계속 쭉 이민이 가능한 업종이었어. 말했듯이 호주는 계속 무언가를 지어나가는 나라이고 이 쪽의 고급인력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거든. 독립 기술이민도 가능하고 회사를 통한 스폰서쉽도 가능해. 높은 영어점수와 경력증명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앞으로도 쉽게 빠질 거 같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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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자, 토목 건축계 후배이나 스타트업을 계획하는 후배들이 궁금해할 만한 이야기들은 충분히 한 것 같으니 이제 사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제일 먼저, 솔직히 말하면 인테리어 업자라고 하면 사기꾼이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 사기꾼이 많은 업계 중 하나라는 인식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해? 그런 말을 들으면 화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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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화는 안나. 왜냐하면 진짜 사기꾼도 정말 많거든. 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야. 자재값이 얼마인지 허가받는데 돈이 얼마나 드는지 업계 사람들 아니면 알 수가 없잖아.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에 말도 안 되는 퀄리티의 작업을 하고 돈만 받으면 끝인 사람들도 허다해. 이 업자가 어떤 사람인지 사기꾼은 아닌지 판별해 내는 것은 전적으로 클라이언트한테 달린 거지. 크고 이름 있는 회사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그거 때문이야. 어느 정도 규모가 있으면 어떤 작업을 어떻게 해왔는지 알아보기가 쉽고 문제가 생겨도 사후처리가 깔끔하니까. 

너무 가격이 저렴한 것만 찾다가 더 큰 손해를 보는 경우가 정말 많아. 어쩔 수 없어. 싼 게 비지떡이야. 평판이 좋고 가격대가 높은 회사는 좋은 자재를 쓰고 디자인에도 공을 많이 들여. 싼 데에서는 안 그래도 싼데 그걸 더 싸게 해서 이윤을 남겨야 하니까 재료도 가장 싸구려를 쓰고 비싼 인건비를 줄여보려다 보면 꼼꼼하게 일을 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여기저기 문제가 생기는 거지. 공사가 딱 끝났을 때는 몰라. 다 멀쩡해 보였는데 몇 달 지나고 하면서 고장 나는 데가 하나 둘 생기는 거지. 그럴 때 업자가 난 모른다고 딱 잡아떼면 클라이언트는 뭐 방법이 없어. 분하니까 사기꾼이라고 욕하고 다니게 되고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보니까 인테리어 업자 = 사기꾼 이런 공식들이 나타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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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자, 업자인 대니얼 네가 말해주는 '사기꾼'업체를 피하는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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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일단은 뭐니 뭐니 해도 관상이 가장 중요....ㅋㅋㅋ 

물론 농담이고 일단은 회사의 인지도가 가장 중요해. 그걸 진짜로 알아내려면 다방면으로 사전조사를 최대한 꼼꼼하게 해야겠지. 

얼마나 제대로 갖춰진 회사인지 웹사이트, 오피스, 공장 등의 시설이 있고 없고를 확인하고 방문해보면 좋아.

가장 중요한 건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를 살펴보는 거야. 업자에게 그동안 진행한 프로젝트에 대해 물어보고 시공을 샵들을 직접 방문해 보면 제일 좋아. 사진이나 포트폴리오를 보여달라고 하던지, 웹사이트를 참고하는 방법도 있어. 기회가 된다면 기존 고객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게 정말 도움이 많이 될 거야. 사실 인테리어 회사는 추천해 주기가 굉장히 힘들어. 한두 푼 들어가는 게 아닌데 추천했다가 아니기라도 하면 어떡할 거야. 그리고 사실 자기 인테리어 회사에 만족한다는 사람들은 거의 없거든. 그런데도 추천을 해준다는 건 괜찮은 회사라는 거야. 

업자를 많이 귀찮게 하고 이야기를 많이 해봐야 해. 어디까지 책임지고 진행해주는지. 공사만 휙 하고 끝나는 건지, 아니면 전기, 인터넷, 가구제작 등등 모든 일을 맡아서 해줄 건지.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까지는 마음 바꿔도 상관없으니까 그때까지 많이 알아보면 좋은 회사를 찾을 수 있어. 전재산을 걸고 가게를 하는 사람들도 많잖아. 그러니까 무조건 더 신중하고 신중해야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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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맞아. 내가 레스토랑을 하다 보니까 주변에 레스토랑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자기 인테리어 회사 욕 안 하는 사람이 없더라. 이민 법무사랑 인테리어 회사는 대부분이 욕하는 것 같아. ㅋㅋㅋㅋㅋ 아무래도 본인 인생이나 전재산이 달린 일을 맡긴 곳이라 기대치가 높을 수밖에 없겠지. 욕하는 마음도 이해하고 욕먹는 심정도 이해 간다. 

네가 이끄는 솔트팀은 한국인들로 구성되어있지만 서브팀 - 전기, 배관, 페인트, 타일 등등 - 들 중에는 호주 현지인들도 많잖아. 그렇게 인터내셔널 팀을 꾸려서 공사를 진행하다 보면 어떤 문화적 차이로 갈등이 빚어지고 하는 일은 없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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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한국인들은 정말 일을 잘하고 부지런해. 손재주도 남다르고 책임감이 있어서 한국인들과 일할 때는 늘 마음이 놓이고 자랑스러워. 이런 한국인 특유의 좋은 점들은 모두가 알고 있고 거기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무난하고 좋겠지. 하지만 나는 조금 위험한 발언을 해보려고 해. 현업의 한국인의 일원으로서 우리 한국팀들이 국제적 경쟁력을 더 갖추기 위해 개선해야 할 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볼게. 시작하기 전에 먼저 말하자면 이 것은 모든 한국 업체 혹은 외국 업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결코 아니야. 야근, 접대, 수고비 등 기성세대들의 관행들은 점점 없어지고 있는 추세이고 합리적인 한국 업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걸 먼저 명시해두고 싶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한국팀이랑도 같이 해보고 호주팀이랑도 같이 해보고 하면서 지켜보면 항상 우리나라 사람들만 정신없고 초조하고 바빠. 호주 애들은 느긋하고 쉴 거 다 쉬고 먹을 때도 여유 있게 먹고. 그런데 웃긴 거는 일 끝내는 날짜는 똑같은 거야. 

그래서 왜 그럴까 하고 관찰을 해봤거든. 호주애들은 정말 특별한 상황을 빼고는 제시간에 집에 안 간다는 옵션 자체가 없어.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일단 꼭 제시간에 가야 한다는 개념이 비교적 조금 덜해. 늦어지면 남아서 하면 되지 하는 마인드가 업무 집중도를 낮추는 거야. 일할 때 잡담을 한다거나 한 시간에 한 번씩은 꼭 담배를 피우러 나가고 나가서 이런저런 이야기하다 보면 길어지고 다시 돌아와서 일하려면 흐름이 끊겨있고 그래. 정이 많아서 점심 저녁 다 같이 사 먹으면서 술도 한두 잔 하다 보면 또 길어지니까 일은 밀리지. 

반면에 외국 애들은 딱 쉬는 시간도 30분 정해서 샌드위치나 초밥 롤 같은 거 후딱 먹어. 일하는 시간에는 진짜로 일만 하고 빨리 끝내고 집에 가는 거야. 개인플레이가 강하다 보니 팀이 같이 움직여서 회식을 하거나 하는 일도 드물고 다들 정해진 일만 하다가 제시간에 끝내고 퇴근하다 보니 군더더기가 없다는 장점이 있어. 

외국애들은 돈 받으면 딱 돈 받은 만큼 일하고 더 바라지도 않고 덜 바라지도 않아서 깔끔해. 클라이언트가 수고한다고 밥을 사준다고 해도 '왜?' 하는 반응이거든. 음료를 사다놔도 자기 꺼 아니면 손을 잘 안대. 내 일이니까 돈 받고 하는 거고 그게 끝인 거지.

그런데 한국은 '정'이라는 게 있잖아. 그게 좋을 때가 많지만 아닐 때도 많거든. 외국 업계보다 한국 업계가 견적이 적게 나왔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훨씬 비싼 경우가 종종 있어. 왜 그러냐면 한국 업자들 중에는 공사하는 사람들 식사를 준비해주기를 은근히 바란다던지 고생하는데 술 한번 거하게 사주면 안 됩니까?라는 식의 접대 (?)를 요구한다던지 고생했으니 별도로 봉투를 챙겨주기를 바란다던지 하는 사람들이 간혹 가다가 있거든. 그래서 결과적으로 야금야금 챙겨준다고 쓰다 보니 그게 목돈이 되고 결과적으로는 외국 업자보다 비싸지는 경우가 많은 거야. 없어져야 할 문화인 거지. 우리가 다국적팀들 사이에서 경쟁력을 갖추려면 진짜 이런 구식 사고방식은 빨리 버릴수록 좋은 것 같아.  예전에는 한국 사장님들이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한국 업체 밖에 선택지가 없었지만 요새 사장님들은 그렇지 않거든. 국적을 떠나서 실력 좋고 합리적인 게 최고가 된 거야, 이제는.

 

문화적인 갈등들이 있을 수 있어. 업자들끼리, 클라이언트 사이에서.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갈등이 생길 때 기준점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라고 생각해. 여기는 호주고 호주 스타일로 일하는 게 맞는 거야. 한국 클라이언트들은 한국업체를 선정할 때 한국에서처럼 일해주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거든. 그런데 아무리 우리가 근성 있고 부지런한 한국 사람이라고 해도 그건 불가능해. 여기는 호주이고 모든 시스템이 호주에 맞춰져 있어. 공사라는 게 업체 하나가 혼자 하는 게 아니고 정부와 빌딩, 또 수많은 서브 컨트렉터들이 연결돼서 진행이 되는 거거든. 내가 혼자 발 동동 구르면서 서둘러 봤자 복잡한 허가 절차가 바로 해결되고 이 느린 호주 시스템이 빨리 돌아가는 게 아니란 말이야. 업체의 의사와 상관없이 한국 업체도 결국에는 호주 스타일로 일할 수밖에 없어. 그래도 한국인들이 그나마 그중에서 가장 부지런하니까 호주 내의 다른 나라 업체들보다는 빠르긴 하지. 그래서 한국인들 말고도 외국인들 중에서도 한국업체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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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사업을 하는 7년 동안 언제 가장 힘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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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힘들었던 거? 음... 7년 내내 어깨에 짐을 지고 있는 기분으로 사느라 힘들었지.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꼽으면 딱 2번인데 동업하던 친구들과 헤어졌을 때. 회사와 서로를 위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감정이 앞섰고 내 안의 욕심이 그런 상황을 만들었던 것 같아. 회사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고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어. 그 두 번 말고는 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힘듦이었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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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힘듦이라는 건 어떤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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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모든 사업가들이 그렇듯이 돈 때문에 힘들 때가 많았지. 월급 나가기 힘들 때. 입금을 기다리는 직원들은 있는데 프로젝트는 엎어지고 수금은 안되고 하면 나가서 돈 꾸러 다니던지 대출을 신청하던지 하는 거야. 급하게 월급 넣고 렌트비 내고 세금 내고. 한 달에 15만 불까지 대출받아서 메꿔봤어. 그럴 때는 집에 들어가기도 싫고 사무실에 들어가기도 싫어. 모든 게 다 스트레스야.


모든 클라이언트들은 까다로울 수밖에 없어. 본인 가게이고 본인 사업이니까 당연히 꼼꼼하게 보고 많은 걸 요구할 수밖에 없고 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런데 간혹 가다가 정말 사람 힘들게 하는 진상 (?)들도 있지. 정말 종 부리듯이 아주 작은 것도 이거 해줘 저거 해줘 저거 실리콘으로 막아줘 이거 바꿔줘 이거 싫어 마음 바뀌었어 다시 해줘........ 본인 마음이 딱 정해지지 않고 계속 바뀌니까 매일매일 다른 걸 요구하는 거야. 중간에 디자인을 계속 바꾸는데 그 사람이 봤을 때는 간단하게 바꿀 수 있을 거 같겠지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거든. 자재가 이미 오더 됐을 수도 있고 치수가 변경돼서 다른 것 까지 다 바꿔야 할 수도 있다고 설명을 해도 안 듣지. 공사가 끝났는데 자기가 중간에 계속 디자인을 바꾼 건 생각 안 하고 약속보다 늦었다며 페널티까지 청구하더라니까. 혀를 내둘렀지. 


기억나는 힘든 프로젝트를 꼽자면 솔트가 쇼핑센터 내에 있는 샵을 처음 공사했을 때.

안 그래도 호주는 안전법규나 규제가 엄격하고 서류 절차가 까다롭잖아. 근데 쇼핑센터는 완전 상상을 초월해. 나는 처음이라 아무것도 몰라서 하던 대로 했는데 진짜로 엄청 깨졌어. 딜리버리 받는데도 정해져 있는데 정문으로 받다가 쫓겨나고 공사시간이 정해져 있는지 모르고 작업하다가 쫓겨나고. 공사시간 외에 공사를 하려면 서류 절차를 밟고 내가 보안요원을 고용해서 공사현장 앞에 세워놓고 해야 해. 익숙해지기 전까지 정말 힘들었어. 2주 동안 차 안에서 먹고 자고 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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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그 시련들을 겪으면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을 텐데 용케 버텼네. 네가 가진 어떤 마음가짐이나 성향이 도움이 됐을까? 사업을 시작하면 분명히 이런 금전적 어려움, 관계의 어려움 등이 시련으로 다가올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하고 싶어 하는 후배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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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앞서 말한 나의 20대 이야기를 들으면 알겠지만 나는 정말 똑똑하거나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좀 모자란 편이라 언제나 단순하게 생각하고 크게 걱정을 하지 않는 게 큰 단점이었어. 그런데 사업을 해보니까 이런 점이 오히려 나의 가장 큰 무기가 되더라. 웬만한 일은 지레 걱정하지 않고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고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목표점을 향해 그냥 가는 단순함. 오뚝이처럼 넘어져도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나는 그 근성, 사업하면서 나한테 몰아치는 태풍들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마음이 가장 큰 힘이 되었어. 

절대 풀 수 없을 것 같은 문제에도 언제나 해결책은 있어. 보통은 그걸 알지만 그 해결책들의 리스크를 계속 재기 때문에 해결을 하지 못하는 거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련도 언제나 끝이 있어. 강구책은 반드시 있어. 그걸 믿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또다시 일어나는 게 가장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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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한 회사의 대표로서, 한 팀의 리더로서. 마흔의 다니엘이 생각하는 좋은 리더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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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이게 계속 변하는 것 같아. 내가 나이가 먹고 회사의 규모가 변하고 하면서 그 좋은 리더라는 게 무엇인지, 내 안에서도 계속 변하고 있어. 예전에는 좋은 리더는 직원과 함께 하는 리더라고 생각했어. 함께 일하고 밥 먹고 술 먹고 함께 숨 쉬는, 편한 동네 형같이 소통하는 리더가 최고라고 생각했거든. 지금은 합리적인 리더가 좋은 리더라고 생각해. 쾌적한 환경에서 일하게 해 주고 일한 만큼 보상을 잘 해주는 리더, 야근할 일을 안 만드는 리더, 일해야 할 때는 제대로 집중해서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리더가 친구 같은 사장보다 멋있는 리더인 것 같아.


예전 소규모였을 때는 어떻게 하면 일을 많이 따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하게 하고 회사를 키울까 생각을 했어. 파이가 커져야 모두 함께 나눠먹으니까. 어느 정도 규모가 된 지금은 양보다는 질, 퀄리티가 있고 디자이너가 창의력과 잠재력을 끄집어내야 하는 일을 우선으로 고려해. 최대한 능력을 발휘해서 스스로 발전하고 그 작품들을 나중에 레퍼런스로 쓸 수 있기를 바라는 거지. 이직을 하거나 본인 사업을 할 때 솔트에서 이런이런 프로젝트를 맡아서 디자인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앞으로 내가 쭉 사업을 하면서 커지면 같이 나눠먹고 함께 오래 한 동료들에게 지분쉐어도 해주면서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이야.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리더쉽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또 몇 년 후에는 또 변해있겠지. 계속 고민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고민할 문제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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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사업만큼이나 이민이라는 과정도 인생의 큰 관문이었을 텐데, 이민은 어땠니? 너한테 어떤 영향을 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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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앞서 말했듯이 한국에서 나는 늘 친구 많고 사람 좋은 형이었어. 어울리는 걸 너무 좋아하는 내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부모님이 늘 나를 보살펴주셨기 때문에 나는 계속 천진난만하고 해맑은 아이 같은 성인으로 지낼 수 있었던 거지. 그런데 여자 친구를 데리고 한국에 다시 갈 생각으로 온 호주에서 눌러앉게 되면서 내 인생이 변한 거야. 나는 혼자이고 모든 걸 나 스스로 해내야만 하는 거지. 나 스스로를 책임지는 것도 낯설고 힘든데 와이프가 생기고 아빠가 되었고 나는 강제로 어른이 돼야 했어. 짧은 순간에 엄청나게 성장을 한 거지. 나한테는 이민이라는 게 큰 계기였어. 내가 한 명의 당당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과정이라고 생각해. 장담하는데 만약 한국에 있었으면 나 아직도 엄마한테 용돈타쓰고 동네 놀러 다니고 있었을걸?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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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이민을 생각하고는 있지만 실패를 할까 불안하고 결정을 내리는 게 두렵다고 하는 친구들에게는 어떤 말을 해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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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무서워. 무서운 게 맞아. 근데 여기서 무서운 만큼 한국에서도 똑같아. 예기치 못한 장애물들을 넘고 경쟁을 하고 실패도, 성공도 맛보면서 한 명의 성인으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엄청 무서운 일이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디서 던 누구와 있던 외로운 일이야. 한국에서 취업을 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안정된 삶을 살려면 필요한 10년이 여기서도 자리를 잡으려면 필요할 뿐이야. 미래에 대한 불안,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 한국에는 없다면 몰라도 한국에서도 똑같다면 이러나저러나 매한가지인데 더 마음 동하는 곳으로 정하면 돼. 

한국이나 여기나 사람 사는 건 똑같고 느끼는 건 비슷해. 마음이 있고 사람 생각 흘러가는 건 기본적으로 똑같아. 측은지심이라는 게 있고 기왕이면 돕고 살고 싶은 마음은 똑같아. 다 같은 사람이야. 외국인들을 보면 주눅 들고 괜히 기죽으면서 벽칠 필요 없어. 손짓 발짓으로 솔직히 도움 청하고 내 마음을 표현하면 언어가 아니더라도 다 통하게 되어있으니 너무 겁낼 필요 없는 것 같아. 네 안의 벽들을 얼마나 빨리 허무느냐가 결국에는 성공의 척도가 되더라고. 잘할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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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 내가 요리라는 구원을 찾은 게 27살 때였어. 나는 그때 내 시작점이 엄청 늦었다 생각했는데 30대 중반이 된 지금 딱히 뒤처져있지 않거든. 그때 왜 그렇게 조급해하고 나 자신을 한심하다고 미워하고 했나 싶은 생각이 가끔 들어. 너는 업으로 삼을만한 일을 30살에 찾아서 그 일로 돈벌이를 한 것은 30대 중반부터였잖아.

 

인터뷰의 끝으로 20대의 친구들, 무엇을 할지 모르겠어서 힘들고 나만 낙오된 것 같고 나만 실패한 것 같아서 불안한 그때의 너와 나 같은 친구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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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하나에 미쳐서 정신을 쏟고 매진할 수 있는 것도 축복이야. 그런 일을 찾았다는 것 자체가. 하지만 20대의 너와 나를 포함한 대부분은 그런 '내 평생을 걸고 미칠만한 일'이랄게 없는 거 같고 조급한 마음이 들겠지. 또래들은 자리를 잡아가는데 나만 늘 제자리인 것 같은 실패감이 들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누구보다 20대를 대충 보낸 사람으로서 내가 조언을 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생각을 한번 말해볼게.

 

꿈을 찾으려고 치열하게 노력하는 것도 좋지만 나는 그냥 한동안은 좀 느긋하게 마음 가는 대로 살아보는 거도 나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 너무 조급해할 필요 없을 수도 있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안될 때가 있는가 하면 자연스럽게 일이 풀리고 기회가 오는 때가 있거든. 그 기회가 왔을 때 알아보고 잡기 위해 내실을 다지면서 그냥 한동안은 조급함을 버리고 살아보는 것도 필요할 수 있어.

나 같은 경우에는 이 일을 해서 자리를 잡은 지금 40살이 되었어. 30살까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고 40살까지는 모든 일이 실타래처럼 꼬이기만 하고 늘 허덕였는데 지금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일이 계속 들어오고 좋은 사업제안도 많이 들어오고 경제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안정적이거든. 평생 찌질할 거 같았던 인생이 어느 순간 달라져있는 거야. 그건 내 나이가 40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해. 아마 60살이 돼서도 일을 하겠지만 내 인생에 대부분의 돈을 버는 것은 40-50살 사이겠지. 나는 이 순간을 위해서 40년을 땅속의 매미처럼 기다리고 준비해온 거야. 내 인생의 피크인 이 10년을 위해서 그 긴 시간을 계속 넘어지고 4 수도 해보고 방탕하게 놀아도 보고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만 버려도 보고, 서른이 되도록 용돈 받고 엄마한테 등짝 맞고 라면만 먹어도 보고 한 거지. 그 모든 실패를 발판 삼아 40살이 된 지금,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어.


언제 움직여지고 언제 판이 갈아엎어질지는 아무도 몰라. 어느 날 내 마음이 변하고 뭐를 해봐야겠다고 마음이 서는 것은 나의 의지로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찾아오는 것이기도 해. 그런 게 막 아주 어릴 적부터 중학교 때부터 오는 친구들도 있지. 맨날 전교 1등 하고 엘리트 코스 쭉 밟아서 성인이 된 후에 그게 본인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는 걸 아는 경우도 많잖아. 그런 기회가 무조건 일찍 찾아온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거야. 다 맞는 때가 있다는 거지. 

슬퍼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조급해하지 말고 언젠가 때는 온다고 믿었으면 좋겠어.


여태까지 긴글 읽어줘서 정말 고마워. 

만나서 진심으로 반가웠어! 



 





놀러와! :-)


솔트 (공식 홈페이지)   : http://www.saltdesignandconstruction.com/

대니얼 (개인 인스타)   :  

앨리스 (개인 인스타) :  ALICEINMELBOURNE  (앨리스 팀 첫 번째 레스토랑)

SUDA (공식 인스타) :  SUDAMELBOURNE  (앨리스 팀 첫 번째 레스토랑)

NEMO (공식 인스타): NEMOMELBOURNE (앨리스 팀 두 번째 레스토랑)




*답글은 원래 하던 대로 반말로 주고받으면 더 좋을 거 같아!! 나도 그게 편하고, 언니 거나 오빠 거나 친구 거나 동생일 너도 그게 편할 거야, 하다 보면!! 물론 존대가 편하면 그렇게 소통해도 좋아 :-)


**호주 이민 생활 중이거나, 호주에서 이민 과정을 밟고 있는 동료들 중에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이민을 생각하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조언들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부담 없이 댓글이나 인스타 디렉트 메시지를 줘! 꼭 영주권자나 시민권자일 필요도 없어. 지금 이민의 과정을 밟으면서 느끼는 고충과 어려움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민에 대한 좋은 점과 후회되는 점도 가감 없이 나누고 싶은 동료들의 참여 기다릴게!


***출처를 밝힌 공유는 언제나 환영이야! 따로 물어보지 않아도 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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