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첫 번째 숙소, 더 프라임 팟 긴자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숙소를 막 빠져나왔을 때는 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시작의 설렘이 있어야 하는데 심드렁하기만 하다.
여행중이라는 사실도 스스로 되뇌어야지만 자각할 수 있는 정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히가시긴자역에서 도쿄역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어쩌면 그 길 위에서 여행을 실감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쿄역 마루노우치 북쪽 입구 방향
모든 일정에 앞서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도쿄역 비지터센터에서 도쿄 메트로 패스를 구입해야 한다.
일본은 교통비가 좀 비싸야 말이지. 이곳에 머무는 8일 동안은 지하철이란 지하철은 지긋지긋하게 타야 할 것 같은 느낌이라는 게 있었다.
선느낌 후실천의 자세!
도쿄역 마루노우치 북쪽 입구에 있는 투어리스트 센터에서 도쿄역 지도를 받았다. 투어리스트 센터에서는 일본 전역의 레일패스를 판매한다. 도쿄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도쿄 메트로 패스는 도쿄역 안에 있는 투어리스트 센터가 아니라, 바깥의 킷테(KITTE)라는 쇼핑몰 지하 1층 비지터센터에서 구입할 수 있다.
도쿄역
도쿄역이 어찌나 크던지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진이 머리털처럼 숭숭.
두 번째 숙소는 아직 체크인도 하지 못한 상황이다. 내 안쓰러운 등짝에는 거북이 등껍질 같은 배낭이 껍질처럼 달라붙어 있고 옆구리에는 카메라 가방이 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달랑거리고만 있었으며 뒤로는 비에 젖은 우산이 덜덜거리며 나를 따라오고 있는 중이다.
굳이 바다 건너와 고생을 자처하는 모습.
무력하고 짜증스러운 기분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킷테(KITTE). 이곳 지하 1층 투어리스트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도쿄 메트로 패스를 구입할 수 있다.
구글 지도에 의존하여 킷테를 간신히 찾았다. 우산에 고인 빗물을 탈탈 털어내고 몰 안으로 들어서니 그나마 쾌적한 에어컨 공기가 살갗에 닿아 바깥의 불쾌함이 조금은 누그러진다.
킷테
여기서 또 목표 장소를 용케도 찾아왔다고 한 순간에 뿌듯해지는 기분이라니.
참 단순하기도 하다.
나처럼 의존적인 사람이, 그것도 항상 담아줄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나 같은 피곤한 사람이. 무언가를 혼자서 해냈을 때 빠져드는 기쁨이란 생각 그 이상으로 크다. 아마 모든 걸 무릅쓰고 혼자 여행을 떠나보려고 하는 궁극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테다.
킷테(KITTE) 지하 1층 투어리스트 인포메이션 센터
투어리스트 센터에 도착.
직원 한 명이 다가와 일본어로 뭐라뭐라 묻는다. (아는 일본어라고는 아리가또 고자이마스와 스미마셍이 전부인 내게 이번 도쿄 여행은 참 난감한 순간이 적지 않았다.)
못 알아듣는 제스처를 취하니, 곧바로 한국인인 걸 알아차렸는지 다른 직원 한 명을 데리고 온다. 그 직원은 한국인처럼 한국어를 잘했다. 언어별로 응대하는 직원이 따로 존재했던 모양이다. 그분에게 도쿄 메트로 패스를 구입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48시간 권을 1200엔에 구입했다.
인공지능 뭐 그런 건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일본어를 쏟아놓는데 신기하기보다는 섬뜩했다.
도쿄 메트로 패스 48시간 권, 1200엔 / 최초 사용 시 카드 뒷면에 유효기간이 찍힌다. 이 카드는 도쿄 도에이선과 도쿄 메트로선에서만 이용 가능하다. (JR은 사용할 수 없다)
원래는 사기노미야 역으로 가려고 했다. 고독한 미식가를 보면서 반드시 가야겠다고 체크해두었던 돈까스 집이 그 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쿄 메트로 패스권을 보니 사기노미야 역은 이용 구간에 해당하지 않았다. 급하게 일정을 변경할 필요가 있었다. (사기노미야 돈까스 집은 여행 셋째 날 찾아갔다)
다소 즉흥적인 면이 있지만 이런 게 여행의 맛이니까.
결국 고타케무카이하라역으로 결정! 땅땅땅
이로써 이번 도쿄 여행의 시작은 (고독한 미식가가 아니었다면) 그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생소한 동네, 바로 고타케무카이하라가 되었다.
여기가 일본이구나, 싶었던 역무원의 뒷모습
도쿄역에서 이케부쿠로역까지 가서 유라쿠초라인으로 환승하고 와코시행을 다시 탑승하여.. 구구절절절
드디어 고타케무카이하라역에 도착했다. 이제야 좀 여행인가 싶다.
다시 한 번 화면 안에만 존재하던 세상으로 이렇게 걸어 들어오고 말았다.
영화든 드라마든 여행이든. 그 모든 것은 내게 하나의 맥락이다.
드라마에서 보고 익숙한 고타케무카이하라 역. 3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고타케무카이하라. 아주 옛날 학생 시절에 온 뒤로는 처음이야
출처: 고독한 미식가 시즌 3
이노가시라 고로는 역을 빠져나오자마자 양옆에 존재하는 터널을 보고는 의아해한다. 그러면서 이곳에 있는 '터널롤'빵을 발견하고는 "그렇게 터널을 밀어붙인다면 먹어버리자!"라는 생각으로 디저트 가게에 들어선다.
3번 출구로 나오니 그가 본 터널 두 개가 양옆에 그대로 있었다.
배시시 새어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다.
역에서 나오면 보이는 양옆의 터널 두 개
조용하구만, 아니 너무 조용해. 전혀 사람이 없어. 주민은 쇼핑을 어떻게 하는 걸까?
이노가시라 고로는 이번 여행의 동반자나 다름이 없었다. 아니 듬직한 도쿄 가이드였다고 해야 하나.그가 없었다면 슬렁슬렁 도쿄를 거닐며 지금쯤 지독히 따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경험과 설명이 없었다면 고타케무카이하라가 어떤 색감의 동네인지 내가 어떻게 읽어낼 수 있었겠나. 이 동네가 오늘만 사람이 없는 건지, 원래부터 인적이 드문 건지 외지인이 반나절의 시간 만으로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도 이 동네에서 길을 헤맨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기이한 동네, 고타케무카이하라
이노가시라 고로는 이 동네를 정확히 보았다. 걷는 동안 사람 한 명을 찾아 보기가 그렇게 힘이 드는 일이었으니. 그럼에도 드라마에서 표현하던 동네의 특색이 사실이었다는 걸 직접 확인하고 어찌나 싱글벙글 입꼬리가 올라가던지. 이건 아무도 없는 고타케무카이하라의 어느 골목에서 느낀, 그 누구와도 온전히 나눌 수 없는 개인적인 기쁨이자 낭만이었다.
적어도 지난 첫 번째 여행 때보다는 도쿄라는 곳을 조금은 더 내밀하게 알아가는 느낌이다.
어쩌면 이렇게 사람이 없을까.
아마 이 때부터였던 것 같다. 집집마다 화단에 심어놓은 꽃들이 한 송이 두 송이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 빗물 머금은 맑은 꽃들. 가던 길을 수도 없이 멈춰가며 요리조리 바라보고 향을 맡았다. 그리고 기억하려고 했다.
이 동네를 걸을 때 좋았던 몇 가지.
번잡함이 없었다는 것. 도쿄인데 도쿄 같지 않은 장소다. 현지인이 생활하는 곳으로 잠입한 외지인의 은밀함도 느껴진다. 이곳에서 비밀스러운 기억을 뚝딱뚝딱 짓고 있는 그런 느낌.
이곳엔 나를 보는 사람이 없고 내가 보는 사람도 없었다. 꽃과 바람, 빗방울만이 있었을 뿐.
비바람이 진한 꽃향기를 다발로 안겨주길래 보답하는 마음으로 성실히 그 향을 기억에 담았다. 그리고 좋아하는 음악을 반복해서 들어가며 이번 여행의 틀에 대하여 생각했다.
여행이 뜨개질이라면 나는 이제 막 첫 단을 짠 셈이다.
인상적이었던 건 길 양옆으로 쳐져 있는 흰색 선(보도선?)을 사람들이 참 양심적으로 지켜내더라는 것이다.
간간이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가운데 큰 길로 걷는 것이 아니라 좁은 가의 길을 열심히 지키면서 걷고 있었다. 심지어 자전거를 타는 사람까지도 그 선을 반드시 지켜내고 있더라. 본래 규칙이라는 것이 있으면 지키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럼에도 놀라운 건 놀라웠다.
이런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지키고 마는 질서란, 감탄스러우면서도 서늘한 감이 있었다.
길 보도선
어라? 어느 쪽이지?
함께 헤매요, 이노가시라 고로
이노가시라 고로가 헤맸던 놀이터
저건 혹시...
고로상은 배가 고프다며 가던 길을 멈추고 열심히 식당을 찾아 동네를 헤매기 시작한다.
사실 그가 아니었다면 이 적막하고 한산한 동네에 카페테리아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마치노 팔러(거리의 팔러 라는 의미)
처음엔 카페라고 생각하고 지나칠 뻔한 이노가시라 고로.
문 앞을 기웃기웃하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마치노 팔러에 조심스레 들어온다.
지나치기 쉬운 외관.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출처: 구글맵
대기하는 사람들로 복작복작. 드라마는 현재 시즌 6까지 나와 있다. 그런데 무려 3년이나 지난 시즌 3의 장소마저도 이렇게나 인기가 좋다니.
기웃기웃하다 유리 자동문을 지나 조심스레 들어갔다. 입구 앞에 두 명 세 명 짝지어 온 사람들이 기다란 나무 의자에 앉아 메뉴판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니 잠깐 시선이 쏠리기도 했지만 이내 쓸데없는 관심은 거두고 본인들의 일로 돌아간다.
눈치껏 살펴보니 마냥 대기하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카운터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했다. 영어로 말을 걸었는데 통하지가 않았다. 손짓 발짓 최선을 다해 써먹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돼? 라고 물었는데 일본어로 대답. 환장한다.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내 이름은 그냥 내가 직접 적었다.
대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을 때 종업원이 어떤 것을 주문하겠느냐고(뉘앙스를 들어보니) 대기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는 걸 보았다. 물론 나는 한 단어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순서를 기다리며 어쩌지, 어쩌지만 하고 있다가 드라마 캡처 사진을 보여주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순서가 되었을 때 로스트 포크와 진저에일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당연히 일본어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일본어로 주르륵 말을 늘어 놓았다. 나 일본어 못해, 라고 선을 그으니 그제야 이해하고 넘어가는 난감한 상황도 있었다. 뭐, 그런 건 일본어를 못하는 내가 일본 여행 중에 겪는 흔한 순간 중 하나일 뿐이었으니까.
고로 상이 먹었던 로스트 포크와 진저에일을 주문했다. 이날 리코타 치즈는 준비가 안 된다고 해서 아쉽지만 이 두 가지만 먼저 먹어보기로 했다.
대기하는 사람들이 앉아있던 나무 의자
여긴 혼자 오는 곳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날 무렵.
한 여자가 가게로 혼자 들어왔다. 휴, 그녀를 보자마자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명색이 '고독한 미식가'에 나온 빵집을 찾아온 건데 혼자인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면 그것이야말로 모순 아닌가?
마치노 팔러 가게로 들어서는 이노가시라 고로
30분쯤 대기한 것 같다. 순서가 되어 자리를 안내받았다. 창가 자리다.
금세 익숙한 풍경이 펼쳐지면서 이내 기분이 좋아졌다. 현재 오후 2시. 대기자 수는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다.
마치노 팔러
카페 겸 레스토랑이라서 그런지 자리마다 콘센트가 있었다. 어찌나 반갑던지. 매 순간 전기 구걸이 필요한 여행자의 신분이니 만큼 냉큼 휴대폰 충전을 시작했다.
드라마에서는 비현실적으로 상냥한 직원이 등장한다. 그녀와 실제 직원을 비교하면서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 ! 라고 무릎을 타악쳤던 기억. / 천장의 조명도 그대로
음식을 기다리면서 찾아온 보람이 느껴졌다.
고독한 미식가는 나의 첫 일본 드라마다. 이 작품을 좋아하게 되어서, 그리고 주인공에게 친근한 애정을 느끼게 되어서 그것 참 복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드라마에서 보여준 것과 다른 점이 거의 없었던 인테리어
로스트 포크 샌드위치와 진저에일. 둘의 궁합이 좋았다.
나왔다드디어.
고로 상이 먹은 핑크빛 로스트 포크 샌드위치를 냠냐암. 씁쓸함과 달콤함이 어우러진 진저에일도 쪽쪼옥. 사실 요 두 메뉴만으로 배가 찰까, 갸우뚱했던 게 있었는데 나름 배가 부풀었다. 샌드위치가 생각보다 실했기 때문에.
드라마의 로스트 포크 샌드위치와 진저에일
고로 상과 음식 기념사진도 남긴 후 두툼한 샌드위치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크..이 맛이야.
나보다 먼저 이곳에 다녀간 몇몇 사람들은 로스트 포크 샌드위치의 고기가 비리다는 의견을 적지 않게 남겼던데, 나는 돌기가 꽤 둔한지 쩝쩝 쩝쩝 잘만 먹었다. (물론 고기 특유의 비린 향은 있었지만) 비린 것도 크게 못 느꼈고, 간혹 느끼한데? 싶으면 그럴 때마다 큰 고민 없이 진저 에일 한 모금을 쪼옥 들이켰다.이 음료, 입가심으로 그만이다.
진저에일은 첫 모금을 들이켜는 순간 입속이 화해지면서 기분 좋게 달달한 끝 맛이 느껴진다. 이름 그대로 생강의 화한 맛이었지만 기대 이상으로 맛깔스러웠다. 오죽하면 진저에일만 테이크아웃해서 도쿄 시내를 돌아다니고 싶었을 정도. 콧속에서 생강 향이 푹푹 나오는 한이 있더라도.
고로 상도 이야기하지만, 빵은 보이는 것보다 더 하드하다. 아삭아삭. 약간의 탄 맛도 난다.
식사하는 동안에는 끼고 있던 이어폰도 뺐다. 주변 소리를 디저트로 삼았다. 단순히 분위기나 풍경뿐만 아니라, 소리까지도 그러모아야만 이곳 마치노 팔러를 다녀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배경음처럼 퍼지는 생활 일본어도 들어보고 싶었고.
엄마 여럿, 그리고 대여섯 살로 보이는 꼬꼬마들이 단체로 들어왔다. 그중 한 여자아이가 악을 써가며 발작에 가까운 투정을 부렸다. 그러니 달래다 지친 엄마가 그 아이를 끌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이런 거. 어딜 가나 똑같구나.
전부터 생각하던 건데, 고독한 미식가의 이노가시라 고로는 결국엔 어느 음식이든 맛깔나게 먹는 사람이 아닐까. 설정상 가는 곳곳이 우연히도 맛집인 경우가 아니라 결국 어떤 음식을 먹든 그 맛에서 장점을 뽑아낼 줄 아는 멋진 캐릭터라는 생각이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음식을 대하는 태도만으로 그 사람이 삶을 어떤 자세로 바라보는지 조금은 엿볼 수 있다는 점을 이노가시라 고로로부터 배웠으니까.
매우 만족한 식사를 하신 듯한 고로 상의 표정. 역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볍게.
기분 좋은 식사를 마치고 다시 처음의 장소. 고타케무카이하라 역으로 돌아간다. 가는 비가 틈새 없이 흩날린다. 우산을 부여잡고 천천히 걸어가던 그 길에, 코앞의 미래 따위는 가뿐히 잊어버리게 만들 만큼 진한 아카시아향을 맡았다.
걸음을 멈추고 나무 밑을 서성였다. 이곳을 떠나더라도 아카시아향만큼은 어디에서도 기억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나무 곁에 머무르다 천천히 길을 나섰다.
고타케무카이하라. 좋은 음식을 차려 주고, 좋은 시간을 펼쳐 주고, 좋은 향을 선사해 준, 내게는 그런 동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