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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팔았다

by 이마루

비 오는 날 근정전


한 번은 다녀와야지, 했었다.

꽃처럼 특정 기간에만 활짝 열리는 경복궁 야간관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벌써 몇 년 된 이야기다. 그동안 다른 일 다른 사건에 먼저 몰두하고 있다 화들짝 경복궁이 떠올라 급하게 검색해 볼 때면, 언제나 폐장한 다음이거나 티켓이 매진된 이후이거나 뭐 늘 그런 식이었다.


그러다 타이밍이 들어맞았다. 그게 바로 며칠 전의 일이다.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삶에서 몇 안 되는 중요한 하루였다. 오랜 시간 동안 갈림길 앞에 서 있는데, 둘 중 어느 한 방향의 길이 마침내 열리게 되는 그런 결정적인 날이었달까. 원하는 결과가 주어졌을 때 그에 따른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도 너그러이 나를 포용해 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고, 반대로 원치 않는 결과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꾹 감싸줄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아마 이런 복잡한 이유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날 당연하게도 떠오른 장소는 다름아닌 밤의 경복궁이었다.

해가 막 저문 시간에 도착했다. 개와 늑대의 시간.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100m 좀 안 되게 걸었는데 빗방울인지 땀방울인지 모를 것들이 금세 인중에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유홍준 교수가 문화재청장이었던 시절 경복궁 관리소장에게 경복궁의 언제가 가장 아름다운지 물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자 관리소장은 비 오는 날에 보는 근정전, 이라고 대답했다. 뭐, 정확히 말하자면 비 오는 날 근정전에서 보는 박석 마당이었지만.


돌고 돌아 이제 궁궐을 눈앞에 둔 나는, 그 말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저벅저벅 흙길을 밟으며 목적지 없이 걷고 또 걸었다. 걸음마다 생각먼지를 훌훌 털었다. 그러려고 노력했다. 난 생각이 참 많다. 생각도 너무 많으면, 불행하다.

보통 잘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하는 말이 비슷하다. 그냥 하는 거라는 말. 생각이 뭐가 필요해, 그냥 하는 거지. 이런 자세를 닮고 싶고 부러움을 느끼지만 막상 내가 그래보려고 하면 역시나 잘 안된다. 정말 기뻐해야 하는 날, 온전한 기쁨은 나와는 그저 먼 얘기가 되어버린다. 불안함과 미충족의 그 어딘가에서 왔다갔다.

에픽하이의 리치라는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돈 꾸면서도 살 건 사는데, 꿈꾸면서는 살 수 없는지.

난..꿈을 이루고 싶어 다른 직업을 선택했다. 이상한 말인데.. 돈에 여유가 없어 가진 시간을 팔기로 했달까. 그 돈으로 꿈을 이루려고 했다. 돌아서 가는 길을 택한 셈이다. 그래서 잘되어가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불행을 느낀다.

아니면..다르게 생각을 해볼까?

난 시간을 팔고 카메라를 샀다. 카메라를 사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여행을 다녔다. 여행을 다니고 글을 썼다. 글을 쓰고 행복했다.


그렇다면 나의 불행은 그 불행과는 조금 다른 불행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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