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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팡이와 여름이사

by 라프

제주도의 늦은 여름이 시작됐다. 공부방 선생님들과 월 팀미팅을 마치고 각자의 차로 돌아가는 길에 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작년보다 더위가 훨씬 늦게 시작하고 있는 거예요."


작년 여름은 6월 초부터 더워서 '올해가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것'이라고 했다는데. 올해는 또 얼마나 더우려나...


더위 그리고 습기와의 전쟁이 시작된 제주도의 단독주택

다음 날 샤워를 하고 초등학교 앞에서 아이들이게 공부방 전단지를 나눠주기 위해 정장스러운 여름옷을 꺼내 입었다. 옷을 다리기 위해 다리미와 다리미판이 있는 장롱을 열었다. 그런데 농 안쪽 벽에 거무스름한 것이 보이는 거다. 자세히 보니 곰팡이었다.


"헐. 농장 안에 곰팡이가 생겼어."


그러자 짝꿍은 다른 농장도 모두 열어 확인을 했다. 4개의 옷장 모두에 바닥의 습기가 올라와서 그런지 아래쪽 바닥부터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바빠서 습기관리를 안 한 사이에 곰팡이가 생겨 버렸네."


우리 집 살림을 담당하고 있는 용집사님이 말했다. 함께 홍보 전단을 할 선생님과 만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나는 곰팡이가 핀 장롱을 뒤로한 채 후다닥 나왔다.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곧 있을 '영어 말하기 대회' 전단지와 공부방 무료체험권을 나눠줬다. 그리고 공부방 오픈 이후 처음 신규 상담을 진행했다. 그동안은 전 과목을 하는 선생님 공부방에 다니고 있는 아이들이 영어공부방에 왔는데, 처음으로 영어공부방만 보고 온 신규 학생이 등록한 것이다. 회원가입신청서도 처음으로 작성해 보고, 영어공부방에 다닌 지 하루 만에 영어에 자신감이 생겼다고 좋아하는 아이들 보며 신기해하신 어머니는 교재비도 1년으로 결재하셨다.


첫 상담과 신규 학생 등록을 하고 들뜬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농장에 있던 모든 옷들이 거실 바닥까지 널브러져 있었다.


"옷에도 곰팡이가 생겨서 다 빨아야 해."


우리 집은 성산읍 수산리에 있다. 마을 이름에 '물 수' 한자가 들어가 있을 정도로 물이 많은 곳이다. 비도 많이 오고, 여름에는 습기도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이야기를 이미 동네 분들에게 많이 들은 터였다. 작년 9월에 이사 왔는데 추석 때쯤 되면 더위가 가시고 좀 시원해질 것 같아 짝꿍 부모님께 놀러 오시라고 했었다. 그런데 너무 더워서 낮에는 바깥으로 돌아다니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때 급하게 큰 방에 에어컨을 설치했다.


거실에도 에어컨을 설치할까 생각했지만, 에어컨 한대로 처음 맞이하는 여름을 지내보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는 여름이 오기 전에 거실에 설치한 컴퓨터와 책상들을 에어컨이 있는 큰방으로 옮길 계획이었다. 주말에 할 일이 많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곰팡이 덕분에 농장도 다 비워졌고 가벼워진 농장들은 거실로 옮겼다. 그리고 큰방의 창가에 있던 침대를 방 안 벽면 쪽으로 옮겼다. 침대가 있던 창가로 책상을 옮기기로 했다. 큰방에 에어컨을 틀어놓고 더운 거실에 있는 책상과 집기들을 옮기느라 왔다 갔다 했더니 땀이 계속 났다. 책상을 옮기고 정리까지 마치니 저녁 9시. 짝꿍과 내가 요즘 유일하게 챙겨보고 있는 드라마가 곧 시작할 시간이었다.


배달이 안 되는 동네라, 포장할 수 있는 식당을 찾아봤다. 오랜만에 족발이 먹고 싶은데 문을 여는 곳들은 너무 비싸거나 마음에 드는 메뉴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드라마 시작 시간까지 20분도 채 남지 않아 주문하고, 다녀올 시간이 없었다. 결국 우리는 가까운 편의점 음식을 먹기로 했다. 가서 각자 먹고 싶은 것을 고르고, 무알콜 맥주와 요구르트 등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라이브 방송을 켰더니 드라마가 시작하고 있었다.


씻고 상큼한 기분으로 드라마를 보는 건 포기하고 일단 먹으면서 드라마를 봤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노동 후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걱정이 또 앞선다.


'겨울에는 기름값이 어마어마했는데, 여름 전기세는 얼마나 나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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