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세여도 괜찮아
어린 시절부터 그토록 간절히 꿈꾸었던 단 하나를 꼽으라면 그것은 바로 '독립'이었다. 부모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것. 사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물리적 공간적 독립만 생각했지, 경제적 독립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물리적 독립을 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고향인 대구를 떠나 다른 지역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는 것이었다. 고1 때는 첫사랑과 연애하느라 공부는 뒷전이었고, 고1 겨울에 맞이한 첫사랑과 이별의 아픔을 디딤돌 삼아 고2부터 본격적으로 수능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3 11월의 가장 춥게 느껴진 그날 본 수능은 작년 시험이 너무 쉬워 변별력이 없다는 평가를 받은 덕분(?)에 어렵게 출제되었다.
두둥. 드디어 수능 시험 결과가 나오는 날. 대부분의 아이들은 좌절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모의고사 때 나오던 점수보다 평균 10점 정도가 낮게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평소와 비슷한 점수가 나왔다. 그래서 평소보다 10점 정도 높은 점수가 나온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없는 점수였지만 '못 먹어도 GO!'를 외치며 선택할 수 있는 3개의 지망을 모두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결정했다.
치킨집 운영 후에는 단 하루도 쉬어 본 적이 없는 엄마와 아빠는 내가 대학을 서울로 오게 된 이후에도 서울에 올 시간이 없었다. 학교 정문 앞 전봇대에 붙어 있는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25만 원'이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고 집을 보러 갔다.
학교 정문에서 걸어서 2분 거리에 있는 집으로 정문 바로 맞은편 골목길에 있는 2층 집이었다. 현관을 들어서면 작은 거실이 있고 넓은 거실 쪽에 방이 하나 있고, 현관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작은 방 두 개가 있었다. 큰 방에는 이 집에 산지 오래된 언니 두 명이 살았고, 현관에서 바로 보이는 작은 방에는 자매가 살았다. 그리고 자매들이 사는 옆 방이 바로 내가 지낼 수 있는 방이었다. 오롯이 혼자만의 공간을 가지기보다 오히려 양쪽에 다른 여자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안전하겠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상의해서 첫 번째 독립공간을 이곳으로 결정했다.
가로와 세로 길이 한 평 남짓인 작은 방이었지만 혼자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에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무엇보다 매일 그 지긋지긋한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 학회, 동아리, 학생회, 엠티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신입생이었던 나는 집에 있는 시간이 겨우 잠자는 시간뿐이었다. 거의 매일 술에 취해 새벽에 들어왔고, 술에 취해 잠든지도 모르게 깊이 잠들었다. 그리고 아침이면 수업시간 10-20분 전에 일어나 후다닥 고양이 세수를 하고 수업을 들으러 가는 게 일상이었다.
같은 집에 산지 가장 오래된 언니들과는 얼굴 볼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옆 방에 사는 자매 중 동생인 연경이는 나와 동갑이어서 인사도 하고 집에 있을 때는 서로의 공간에 가끔 놀러 가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큰방 언니들은 졸업을 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고, 연경이와 언니도 그녀들만의 독립된 공간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양 쪽 방에 새로운 사람이 왔고, 1년 반 정도 살고 난 뒤에 고시원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여동생이 졸업하기 전 학교 정문에서 30초 거리에 있는 정문 바로 맞은편 큰 길가에 있는 고시원으로 이사를 했다. 처음 옮긴 고시원은 1인실로 흔히 고시원에서 볼 수 있는 1인용 침대와 침대 끄트머리를 포함해 가로로 놓인 책상과 책장으로 꽉 차는 공간이었다. 빌라에 있는 하나의 호실을 여러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 놓은 곳이었다. 가장 안쪽의 큰 방은 창문도 있고 침대에 한 명, 바닥에 한 명 누울 수 있는 2인실이었다. 처음 이사 갔을 때는 졸업을 앞둔 언니 둘이 살고 있었다. 언니들이 졸업하고 방을 빼는 시점에 수능을 치고 서울로 오게 된 여동생과 함께 살게 되어 언니들이 있던 2인실로 이사를 했다.
나는 여전히 집에서 잠만 자는 생활을 하고 있었고, 혼자 있을 때 그나마 하던 빨래는 온전히 여동생의 몫이 되었다. 내게 집이란 잠만 자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더 넓고 좋은 집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물론 지금보다 저렴하긴 했지만 당시에 둘만 살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의 제대로 된 '집'에 들어가려면 보증금이 최소 300만 원은 있어야 했고, 월세도 최소 30만 원 이상을 줘야 했기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엄마 아빠가 고시원 월세를 보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물질적인 것에 대한 욕심이 없어서 그랬는지 그럴듯한 집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못 했고, 우리 집에 돈이 없어서, 고시원에서 사는 것이 창피하다고 생각도 해본 적은 없었다. 물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엄마 아빠가 벌어 준 돈으로 월세 내고, 내가 과외해서 번 돈으로는 매일 술 마시며 흥청망청 놀던 그 시간에 엄마와 아빠는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만 하면서도 매달 내게 보내줄 월세를 모아두느라 늘 전전긍긍했고 큰 누나 덕분에 남동생은 용돈도 거의 못 받고 힘들게 살았다고 한다. 그런 상황도 모르고 하고 싶은 건 뭐든 하며 지냈던 그 시간을 위해 희생해준 가족에게 아주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대학교 4학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고3이었던 남동생과 엄마는 20여 년 가까이 살았던 대구의 집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4년 만에 다시 모여 살게 된 네 가족. 운 좋게 들어간 임대아파트에서 살게 되었지만 가족이 예전 같이 편하지 만은 않았다. 고3 수능을 마치고 재수까지 실패한 남동생은 군대에 갔고, 그다음 해에 여동생은 유학을 떠나 집에는 엄마와 나 단 둘만 남게 되었다.
5년간의 첫 직장 생활 후 돈을 모으기는커녕 빚만 잔뜩 만들어 놓은 큰 딸을 보며 엄마는 '내가 뭐하러 이렇게 열심히 사는 건가, 나 혼자 이렇게 열심히 살고 큰 딸이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게 키워서 쟤가 저렇게 망가진 건가…' 여러 가지 생각으로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렇게 괴로워하는 엄마와 함께 사는 나 역시 몹시 힘들었다. 그리고 우리 둘은 눈만 마주치면 싸웠다. 대학에 합격해서 떠나오기 전 대구에서 매일 마주했던 엄마와 아빠의 모습처럼 말이다.
모아둔 돈은 없었지만 엄마와 같이 살기 힘들겠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살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주변 사람들에게 '독립을 위한 펀딩'을 받기로 했다. '이 프로젝트가 될까 싶어서, 나는 못하지만 언니의 독립을 지지하기 때문에' 등등 각자 다른 이유로 스무 명이 내게 10만 원씩 펀딩을 해 주었다.
애초에 보증금 500만 원짜리 집을 구하려고 계획했지만, 최종적으로 모인 펀딩 금액인 200만 원에 맞추어 은평구에 있는 집을 계약했다. 아주 오래된 주택에서 나무 계단을 오르면 나오는 큰 다락방을 두 개로 나눈 집 중 왼쪽 편에 있는 집이었다. 반대편에는 4명의 가족이 살고 있었고, 우리 집 창문과 옆집 창문이 연결되어 옆집에서 그 창문을 열면 창문 여는 소리가 '드르륵'하고 그대로 들리곤 했다.
지붕 바로 아래에 있던 다락방이라 여름에는 마치 오후 내내 내리쬔 햇빛을 머금은 비닐하우스처럼 더웠고 겨울에는 보일러를 틀어도 계속 추웠다. 덥고 추웠지만 오롯하게 나 혼자 사용할 수 있는 집이 생겼다는 사실이 정말 기뻤다. 난생 처음으로 일주일 중 하루는 종일 집에만 있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혼자 음악을 틀어 놓고 뒹굴뒹굴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았던지..
세 번째 집을 구하게 되면서 펀딩 받은 집 보증금 200만 원은 20개월 동안 다 갚았고, 수중에 200만 원이 남았다. 홍대입구역 근처로 직장을 옮기게 되면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홍대 근처에 있는 집을 구하려면 보증금이 최소 500만 원이 필요했다. 결국 엄마에게 다시 부탁을 했고, 어찌 됐든 독립을 해서 200만 원을 만든 나를 보며 '그래도 기특하다'라고 생각한 엄마는 결국 큰 딸에게 다시 돈을 빌려 주고야 말았다.
홍대에 살게 되면서 명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명상센터인 도봉에 새벽 수업을 듣기 시작하면서 홍대에 있는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아졌다. 집을 비우는 날이 많은데 직장이 홍대라 집을 없앨 수는 없어 월세 40만 원을 아껴보기로 했다. '집에 남는 방으로 부수입을 만들어 보세요'라고 광고를 하던 에어비앤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월세 40만 원과 관리비 정도를 벌어 한동안 집을 유지했다.
명상 센터 근처에 살던 짝꿍의 원룸에서 거의 같이 지내다가 홍대 집을 정리하게 되었다. 홍대 집을 정리하면서 짝꿍과 함께 살기로 했고 투룸으로 이사를 했다. 계단 두 칸 정도 내려가는 지층이었는데 현관문을 열고 계단 두 개를 내려가면 가로로 긴 거실 겸 주방이 있고 맞은편에 큰방과 작은 방이 나란히 있었다.
홍대 에어비앤비로 월세를 벌어 본 우리는 작은 방에 짐을 꽉꽉 채워서 우리 방으로 쓰고 큰 방에 퀸 사이즈를 침대를 놓아 에어비앤비 게스트를 받아 보기로 했다. '도봉산에 누가 올까?' 싶었는데 북한산 트래킹을 하려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꽤 많이 찾아왔다. 그렇게 우리는 명상에 관심 있는 외국인들과 종종 짧은 영어로 명상에 대해 관심사도 나누고, 요가도 가르쳐주면서 외국인 게스트들을 맞이했다. 그리고 월세는 그들의 숙박비로 충당할 수 있었다.
여섯 번째 집은 경기도였다. 집을 알아보던 중에 아주 저렴한 전세가에 나온 30평짜리 집에 들어가게 되었고, 난생처음으로 전세 대출을 받게 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아파트에서 6개월 정도 지내보았지만 관리비와 월세가 턱없이 비싸 원래 살던 가격의 보증금과 월세 가격의 투룸으로 옮겼다.
에어비앤비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큰방은 우리가 쓰고, 작은 방을 게스트룸으로 만들었는데 여기는 과연 누가 올까 궁금했는데 지역마다 특성이 있어서인지 이 지역을 찾는 특수한 목적의 게스트들이 찾아왔다.
코로나 19로 인해 변화의 상황이 감지되어 앞으로 다른 지역으로의 이사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번에는 한강 이남으로 갈 계획이라 보증금을 높이고 적당한 금액의 월세 집으로 옮겨볼 생각이다. 얼마 전 결혼하고 아이가 있는 선배와 후배를 만났는데 집을 사거나 분양받는 것에 역시 관심이 많았다. 1년 전에 비해 몇 억이 올라버린 우리 동네 아파트 값을 보거나, 신사동 회사 근처의 부동산에 붙어 있는 20~30억짜리(혹은 그 이상) 아파트 매물 가격을 볼 때마다 '이 생에 저 돈을 벌 수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집이 없어서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결혼할 때 집 한 채쯤은 해주어야 하는 것이 부모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집 한 채 마련할 돈이 없어서 '결혼하고 싶지만 하지 않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냥. 나라면 허공 위에 떠 있는 아파트 한 채를 평생 갚아야 하는 대출을 포함해서 사느니 내 양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땅(지방 어디라도)을 사고 그 땅 위에 1억짜리 집을 짓는 게 나을 것 같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누군가는 '철딱서니 없고, 현실 파악 못하는 이상주의자'라고 얘기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