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괴물>(2023)과 남사친 K

과거에 나는 K를 주제로 글을 쓸리 없다고 단언했었다.

by 김도비

# 과거에 알고 지내던 남사친 K가 있었다. 토익학원에서 만난 터라 공통 인맥이 없었지만 연락을 드문드문 이어가며 10년이 넘게 인연이 이어졌다. 당시에 혼자 일상에서 생기는 상념을 꽤나 정성스레 기록하던 블로그가 있었는데, K는 종종 내 글을 읽고 답을 달아주었다. 나는 내 블로그를 현실에서 만나는 친구나 지인에게는 한 번도 알려준 적이 없었다. K에게 블로그를 알려준 것은 우연이었고, 그와 아주 친하지는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날, 만남의 끝에 K가 왜 자신의 이야기는 쓰지 않느냐고 물었다. 블로그에 나는 종종 내 친구나 지인과 있었던 일을 (아무도 알아챌 일은 없지만 혹시 모르니 조금 변형해서) 적곤 했는데, 왜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적지 않느냐는 물음이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내가 느끼기에 K는 똑똑하고 이성적이며, 야무지게 자신의 삶을 잘 일구어 나가는 멋진 사람이었다. 때문에 나는 한 번도 K에게 특별히 마음이 쓰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 마음이 쓰이지 않는 건 그를 소재로 글을 쓰지 않는 이유와도 비슷했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자고로 글의 소재가 되려면 인생이 조금 스펙타클해야 한다.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짓도 좀 해보고 연애하다가 인생도 좀 망해보고 그래야 하는데, 내가 알기로 K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오빠는... 너무 재미가 없잖아. 로봇 같아. 오빠에 대해서는 딱히 쓸 말이 없는걸?"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필터를 미처 거르지 못한 날것의 진심. 우리는 꽤나 친했기에 그다지 걸릴 말은 아니었다고, 당시의 나는 생각했다.


K는 푸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그래도 자기 얘기도 적어보라고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감정 없는 양철로봇 K'라는 주제로 적어보겠노라 말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저 면피용 발언이었고 솔직히 그에 관해 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날 K는 헤어지는 순간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꼭 쓰라고 말했다. ‘양철로봇 K’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며.


얼마 후 K와는 연락이 끊겼다. 정확히는 내가 일방적으로 차단했다. 이유는 그가 내 블로그에 악플을 달았기 때문이다. 부계정으로 다른 사람인 척 조롱하는 듯한 댓글을 달았는데,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큰 충격을 받은 나는 그의 연락처를 차단하고, 블로그도 폐쇄했다. 그리고 다시는 블로그에 글을 쓰지 않았다. 블로그도 K도 모두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괴물>이라는 영화를 보고 K가 떠올랐다.


#영화를 보고 K가 떠올랐던 건 내가 모르는 그의 사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괴물>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면이 그들의 전부가 아님을 말한다. 심지어 영화에서도 어떤 인물의 모든 면을 다 보여주지는 않는다. 같은 상황, 같은 사실이라도 어떤 시각을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


1부에서 호리 선생님은 아주 나쁜 선생님이었지만 2부에서 본 호리 선생님은 그저 운이 아주 좋지 않았던 순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미나토는 자신의 마음속 폭풍을 감당하느라 정신이 없었겠지만 그래도 호리 선생님한테 너무했다고 생각한다. 호리 선생님의 죄라고 한다면 교실에서 일어난 일을 몰랐다는 점 정도일까? 학생들의 면면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 아니면 호리 선생님에게 일어난 일은 그저 불운한 순간이 모여 일어난 아주 우연한 불행이려나.


영화의 끝으로 갈수록 등장인물들에게 모두 따뜻한 면이 있어서 놀랐다. 교장 선생님이나 교감 선생님도 싫지만 왠지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서 조금 혼란스러웠다. 나는 교장 선생님처럼 고집스레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을 견디지 못하지만, 마지막에 악기를 불면서 보여준 그의 눈물은 왜인지 보통 눈물이 아닌 것 같았다. 그의 마음속에도 미나토처럼 어떤 폭풍이 불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짐작이 들었다. 그렇다고 교장 선생님의 잘못과 직무유기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언젠가 K와의 일화를 친구들에게 이야기 했을 때, 한 친구가 내 답변이 너무 기분 나빴을 것 같다고 했다. 그가 기분이 나빴을 수 있다는 건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영화를 보고 그 말이 떠올랐다. 몇 년간 K가 나에게 준 상처와 배신감만 곱씹었는데, 그의 마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전과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날은 발렌타인데이였다. 우리는 그즈음 부쩍 자주 연락을 하고 있었고, 지방에 살고 있는 K가 일이 있어 서울에 올라온 김에 보자고 했다. 우리는 그날 유독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사랑, 연애, 이별, 결혼 같은 것들. 평소에도 종종 나누는 주제이기는 하지만 그가 자주 꺼내지 않던 화제인 전애인의 이야기도 꺼내며 꽤나 솔직한 모습을 보였던 것 같다. 그가 한 행동들에 다른 의미는 없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었다. 물론 어떤 이유가 있었든 그가 한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고, 우리가 다시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다.


더 이상 K에게 보여줄 수는 없겠지만 결국 K를 주제로 한 글을 적었다. 절대 바보 같은 짓을 할 것 같지 않던 K도 멍청한 짓을 하고, K를 소재로 글을 쓸 리 없다고 단언했던 나는 K를 주제로 글을 적었다. 인생은 참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