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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Jun 29. 2024

우울을 견디고 우울과 싸우는 나날들

부제: 산후우울증이 이래서 무섭다는 거구나

성숙해지는 과정을 겪고 있다. 아기를 키운다는 것은 그렇다. 사실 기후변화에 지구가 망해가는 데 삶의 의미나 인간의 성숙을 찾아 무얼 하겠냐만은. 인간이란 우주를 떠도는 미세한 입자 중 하나일 뿐인데 말이다. 사실 바로 그런 이유로 내가 아기에게 젖을 주는 것을 좋아한다. '젖'이라는 단어를 '모유'나 '수유'라는 단어보다 좋아한다.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노라면 내가 포유류임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동물과 다를 바가 없고 이 광활한 우주 속에서 의미를 찾아 헤매는 의미 없는 존재가 된 것 같다. 첫째를 키울 때는 내가 포유류라는 걸 온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젖을 물리는 행위가 이상했고 내가 젖소가 된 것 같은 '인간'이 아닌 취급을 받는 느낌이었다. 그래, 바로 거기에 포인트가 있다. 고등동물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기저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적응하기 힘들고 조금 덜 수치스러워 보이는 단어들을 선택하여 말하는 것에 연연했다.




사실 그러한 동물 주제에 온갖 감정에 대한 인식이나 메타인지 때문에 인간의 삶은 피곤하다. 산후 6주를 보내면서 우울과 맞서 싸우고 우울을 견디기를 반복했다. 어떤 특별한 원인도, 계기도 없다. 그냥 티끌 모아 우울이랄까, 우울의 양상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나는 내 피부만큼이나 바싹 마른 형태로 우울감이 찾아왔다. 사막 같은 우울함이랄까. 아기를 낳고 입맛이 없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다.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는데 눈물 한 방울 안 나와서 때론 펑펑 울고 싶었다. 즙을 짜내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미처 몰랐다. 같이 사는 시부모님께 원인 모를 힘듦을 토로하겠는가 5살 내 아이에게, 고작 한 달 된 내 아기에게 짜증을 부리겠는가? 나는 낮동안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해 참고 버티면서 '웃었다'.


그리고 나의 속내를 보일 수 있는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고 나면 어떤 날은 짜증의 형태로, 어떤 날은 말조차 하기 싫어 대꾸도 안 하고 그저 누워서 잠만 잤다. (물론 2-3시간마다 젖 물려야 되니 잠을 제대로 못 잔다) 새벽에 같이 깨서 나를 도우려고 하는 남편의 모습이나 행동마저 모든 게 보기가 싫고 짜증이 났다. 말을 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남편도, 아기도 모두 사랑하는데. 딱히 출산 후 달라져버린 나의 삶을 비관한 적도 없고 과거의 나를 그리워하지도 않고 경력단절 같은 우울해질 만한 일들이 없음에도 웃어내는 것이 힘들었다. (그러니 우울해질 만한 사건이 있는 산모들의 마음은 얼마나 문드러질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점차 멍하고 무표정인 얼굴로 남편을 대하던 나날들


그러다 문득 십여 년 전에 사귀었던 전 남자친구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과 다 같이 있을 땐 즐겁고 행복하면서 사람들과 헤어지고 둘이 남으면 왜 표정이 안 좋아지느냐'라고 말이다. 그때 그 말이 내겐 충격이었다. 나는 사람들과의 모임에 내 모든 에너지를 끌어 쓰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겐 내 본모습과 숨김없는 모습을 보여준 것인데 상대는 그걸 자신과 있는 것이 싫다고 여긴 것이다.


지금이 딱 그 꼴이었다. 어쩌면 젊은 날의 내게도 우울함이 왔다 갔었고 똑같은 놈이 독감처럼 또 찾아온 건지도 모르겠다.


그때와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걸 깨달은 후에, 나는 감정이 아닌 '사고'를 했다. 그때와 똑같이 반복된다면 남편은 나로 인해 지치겠구나. 아무리 남편이 '우울한 감정'을 전혀 모르는 천하무적 긍정왕이라 할지라도 갉아 먹히겠구나.


그렇게 우울과 싸우기 위해 매일매일 청소하고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고 용기 내어 남편에게 한마디 말을 더 붙이고....


그 노력들을 남편이 알까?

아마도 나만이 알 것이다.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어제는 둘째를 낳고 처음으로 야식을 먹었다. 50일 된 둘째와 5살 된 첫째를 데리고 키즈호텔에 가니 무미건조한 일상에 조금 수분끼가 돌았다. 남편에게 말하는 것도 조금 덜 공격적이고 둘째가 태어난 이후 늘 집에만 있어야 했던 첫째에게도 행복한 추억이 생겼다. 나의 마음도 조금은 느슨해졌다. 잘했다 나 자신! 스스로에게 칭찬해주고 싶다.




왜 인간이란 동물이면서 동물과는 달라서 이렇게 스스로를, 지구를, 우주를 괴롭히고 고통받게 하는 걸까? 그 해답은 영원히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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