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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머 Oct 18. 2020

내가 작가를 만났던 이유 3

상처는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이 됐다

https://brunch.co.kr/@seomangsang/25

- 이전 글과 이어집니다.



“지난 몇 달 동안 특수한 인터뷰가 아닌 이상 응하지 않고 있었습니다만, 왜인지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처음 마주했을 때 A 작가님이 내게 건넨 말씀이다. 우리가 만난 이 시간, 이 자리가 특별하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감사했다. 인터뷰는 별다른 문제 없이 끝났다. 어떤 인물인지 특정돼서는 안 되기에 내용은 밝힐 수 없다. 작가님의 익명성 보장을 위해 어떤 문제를 이야깃거리로 다뤘는지, 그 주제의 무게는 어떠했는지 말하지 못 한다. 혹여 이 글이 작가님께 어떠한 피해를 줄까 저어되는 까닭이다. 어차피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핵심은 인터뷰가 끝나고 난 뒷이야기에 있다. 


우린 정확히 54분 15초 동안 대화를 나눴다. 이쯤 마무리하고 가려고 하는데 작가님께서 저녁 식사를 청했다. 같이 밥을 먹자고 하실 줄은 몰라 적잖이 당황했다. 예정에 없는 일정에다 근처 맛집을 따로 알아놓지도 않았다. 메뉴 정하는 과정이 난관이었다. 사실 이태원 근처에 괜찮은 피자집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강력히 주장하진 않았다. 비용 부담을 작가님께 전가하고 싶지 않았고 내게도 마음의 빚을 남겨놓고 싶지 않았다. 내게는 만남 자체가 감사한 일이어서 더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생각이 컸다. 더군다나 책에 친필 사인까지 받았다. 이쯤 물러나는 게 양심 있는 태도가 아닐까 했다.     


마지 못해 떡볶이를 떠올렸다. 나름 국민 간식 아닌가 싶어서. 작가님께서도 흔쾌히 동의했다. 기실 떡볶이가 요새는 그렇게 싼 음식이 아니긴 하다. 치킨값과 떡볶이값이 맞먹는 세상인지라. 하지만 뭔가 떡볶이가 주는 친근함이 있지 않은가. 같은 값에 불편한 식사를 할 바엔 더 가벼운 쪽을 택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음식이라는 전략적인 판단이었다. 결론만 먼저 말하면 이 판단은 실수였다. 이날의 만남은 떡볶이집에서 파탄 났다.      


“작가님 블로그 말고 브런치는 왜 안 하세요?” “제가 브런치를 왜 해야 하죠? 이유 하나만 말씀해주세요.” 작가님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흡사 따져 묻는 듯한 뉘앙스였다.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건넨 말에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어색함을 깨본답시고 괜히 이 말 저 말 아무 말이나 얹는 중이었다. 브런치는 왜 안 하냐는 물음도 마찬가지였다. 별다른 의미 없이 그냥 궁금해서 내뱉은 말이었다.      


가게 안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다른 테이블이 시끄럽기라도 했으면 좋았으련만. 영 도와주지 않았다. 내 앞에 파도가 있다면 물방울이 되어 바닷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길 얼마. 쥐어 짜내는 목소리로 말했다.


 “글 쓰는 플랫폼으로 아무래도 브런치가 더 괜찮지 않나 싶어서요.
잘 쓰는 분도 많고...”

 “어떤 분이 잘 쓰는지 알려주실래요?”

 “OOO 작가님이요. OO OOOO OO라는 책 이야기가 많이 들리더라고요.”

 “제가 볼 땐 그분은 앞으로 글을 계속 쓰실 분은 아닌 듯한데요? 글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굳이 왜 브런치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왜 저보고 브런치를 하라고 말씀하시죠?”  

가시에 찔린 기분이었다. 심판자가 된 마냥 날 엄정하게 몰아세웠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억울했다. 나의 어떤 부분이 그의 노여움을 샀던 것일까. “브런치는 왜 안 하냐”는 문장이 거슬렸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걸까? 갑자기 왜 이러지? 아니면 내 말본새에 문제가 있었나? 행동거지가 맘에 들지 않았나? 찰나에 생각을 거듭했다. 가게의 공기는 삽시간에 얼어붙었고 난 확신 없는 망상으로 괴로웠다.      


그의 글은 분명 따뜻했다. 무척이나 우울했지만 그랬기에 인간애가 담겨 있었다. 글은 사람을 닮는다고 믿었다. 문체라는 말이 괜히 왜 있겠는가.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말하는 태도가 왜 이 모냥인가.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상처받았다. 그가 미워졌다. 내가 생각한 그 사람이 아니었다. 성격과 이미지가 판이했다. 티브이에선 웃음도 많고 농담도 잘하더니 나를 무시하는 건가 싶었다.     


그렇게 우린 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 자리를 파했다. 되도록 빨리 그와 헤어지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목적지가 같았다. 둘 다 역 근처로 가야 했다. 그와 나 사이엔 좀처럼 면역력이 생기질 않았다. 분위기가 바뀌지 않았다. 뜻 모를 이야기를 나누며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마침내 그가 먼저 떠났다. 난 버스를 타려 정류장으로 갔다. 녹사평역이었다. 신논현역 가는 버스를 타고 교보문고 앞에서 내렸다. 인천 가는 버스를 타려면 강남역으로 가야 했건만 발걸음이 무거웠다. 터덜터덜 대며 애써 걸음을 옮기는데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서러웠다.      


정말 존경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상처를 받은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진이 빠졌고 넋이 나갔다. 근처 커피빈인지 스타벅스인지 아무데나 들어가 구석자리에 찌그러져 한 시간을 있었다. 울었다. 나를 자책했다. 도대체 나의 어떠한 점이 그를 굳어 버리게 만든 것일까. 복잡했다. 마음을 봉합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결국 인터뷰 기사는 쓰지 않았다. 녹취록을 풀어보려 했지만 단 일 초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날의 기억이 맴돌았다. 차마 헤집어 놓을 용기가 없었다. 상처를 마주하기 두려웠다. 감정은 핑계가 됐다. 해야 할 일을 미뤘다. ‘며칠만 있다 하자. 조금만 더 미루자. 한 달 있다가 해야겠다.’ 따위의 생각을 반복했다. 그렇게 일 년 하고도 삼 개월이 넘게 흘렀고 오늘에 이르렀다. 난 의무를 저버렸다. 상처받았다는 명목하에 책임을 회피했다.



4편으로 이어집니다. 마지막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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