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밀정들을 실시간 목격하다보니, 이게 다 과거사 문제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참사 같아..그래서 소개할 책은,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독일 전범을 어떻게 처벌했는지 쫓는 책인데, 사실 이 벽돌책 읽으려고 5년 전 논픽션 북클럽을 만들었을 만큼 명작. 근데 절판된 책이라 미안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개하고 싶은 이유가 있어.
저자는 영국 법률가. 홀로코스트 피해자인 저자 외할아버지 가족의 삶을 들여다본 회고록이자, 인권과 정의에 대한 개념이 탄생한 뉘른베르크 재판을 둘러싼 국제정치 논픽션이야. 유대인 학살을 명령한 전범들을 단죄하기 위한 두 인권변호사의 법정드라마이기도 하지.
리비우(Lviv)라는 도시 얘기로 시작하는데, 정말 영화 같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렘베르크'였다가, 1차 대전 직후 신생 폴란드의 '로보프',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소비에트의 '리보프', 독일군 점령 후 다시 '렘베르크',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리비우'로 불리는 도시.
인권법 전문가인 저자는 2010년 리비우 대학으로부터 강연 요청을 받아. 인권과 정의에 대한 개념으로서 '인도에 반하는 죄(crimes against humanity)', '제노사이드(genocide)'에 대한 강연. 리비우는 마침 저자의 유대계 외할아버지가 살았던 도시였고, 저 두 개념을 만들어낸 허쉬 라우터파하트와 라파엘 렘킨이 공교롭게도 리비우 대학에서 법을 공부한 선후배였어. 운명의 도시지.
책은 나치에 점령당한 그 도시의 사람들이 맞이한 가혹한 운명을 추적하고,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어떻게 저 개념이 탄생하는지 살펴봐…
그 시절 학살의 풍경은.. 넘어갈게. 강제수용소 가는 열차 얘기가 나오는데 문장이 딱 하나야. “말케의 삶은 열차에서 내린 뒤 15분 만에 끝이 났다.” 이야기가 뚝 끊기듯, 순식간에 문장이 끝나버려 당혹스러워..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세 자매도 이 때 함께 삶이 끝났어. 몇천명이 숲속을 걸어들어가.. 한꺼번에 총살됐어.
폴란드 총독 한스 프랑크, “나는 모든 벼룩과 유대인을 1년 안에 없앨 수는 없다.”… 그가 절멸시킨 폴란드의 유태인들 중에 라우터파하트와 렘킨의 가족들, 저자 필립 샌즈의 가족도 있어..원제가 'East West Street : On the Origins of 'Genocide' and 'Crimes against Humanity' 인데, 샌즈의 외증조모, 라우터파하트와 렘킨이 살았던 거리가 이스트웨스트가야.. 라우터파하트와 렘킨, 저자의 외할아버지 레온은 운이 좋았을 뿐이야..친지들의 연락이 끊기고, 어느 순간 모두 알게 되지. 비극을 피하지 못했을 거란 것을. 너무 거대한 말살은 개별적 사연을 따지기 어려울 수 있는데, 필립 샌즈는 한 명 한 명 추적해… 각 개인의 삶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면, 비극은 좀 더 구체성을 갖춰. 라우터파하트와 렘킨, 한스 프랑크는 결국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만나게 돼.
자,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만행은 그동안 대부분 면책됐어. 당시 피고인들도, 이게 국가 행위라 처벌될 수 없다고 주장했지. 라우터파하트와 렘킨은 국가라는 이름 뒤에 숨어 만행을 저지른 개인을 찾아내 형사처벌함으로써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원칙에서 출발해.
“개인의 안녕이 모든 법의 최종 목표이다”. 라우터파하트,
'제노사이드'를 창안한 렘킨이 꽂혔던 건 1915년 아르메니아인 120만명이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학살당한 사건. 터키 정부에서는 이를 강제이주에 따른 희생이라고 주장하면서 집단학살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지만… 희생자 규모가 터키 추산 20만명, 아르메니아 추산 200만명이야..그는 '특정 점령 지역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민족과 종교 집단의 말살'을 명확하게 제노사이드라는 범죄로 규정했어.
우여곡절 끝에 '인도에 반하는 죄'로 끝내 나치 전범들을 기소한 것은 오늘날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라는 번역 제목처럼 우리에게 남았어. 나치 전범들은 모두 모르쇠, 순진한 중간자였다는 둥.. 일개 당원이라는 둥..이들은 끝내 ‘'인도에 반하는 죄'로 기소됐어. 렘킨의 필사적 노력 끝에 '제노사이드'도 1948년 유엔 총회의 '제노사이드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조약' 체결로 결실을 맺지.
범죄에 대한 개념 정의가 왜 중요하냐고? 일본은 처벌받지 않았지. 막대한 수탈과 참혹한 피해를 입은 피해자가 있어.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이 유린됐고. 그게 바로 ‘인도에 반하는 죄’인데, 도쿄 국제군사재판에 기소된 일본 전범들은 모두 침략전쟁에 관한 범죄에 대해서만 처벌받았어..
나치 전범에 대한 기소에는 유대계 법률가들이 대거 나서서 미국과 영국 정부를 압박한 결과야. 하지만 일본 전범 처벌에는 우리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어. 승전국 미국은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가 결국 풀려나 총리가 되는 걸 묵인했지.
이때 당시 얘기가 자세하게 나오는게 <일본의 굴레>야. 오늘 소개할 두번째 책.
역시 벽돌책인데.. 아, 진짜 이렇게 잼나게 쓰기도 어려워.
부제가 ‘헤이안 시대에서 아베 정권까지, 타인의 눈으로 안에서 통찰해낸 일본의 빛과 그늘’이야. 대체 무엇이 일본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일본의 정치와 경제는 왜 그렇게 경직되어 있을까, 그들의 독특한 성문화, 오타쿠 문화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일본이 여전히 미국에 아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정적으로 일본은 왜 우리를 침략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는가.. 무엇이 일본을 병들게 했는가.. 에 대한 퉁찰력을 보여줘.
저자는 일본에서 40년 이상 지낸 미국인 태거트 머피. 쓰쿠바대 도쿄캠퍼스에서 국제정치경제 가르쳤고.. 저술가. 벽돌책인 만큼, 역사부터 정치, 경제, 문화.. 쭉 나오는데.. 우리와 관련된 걸 좀 보면..
외교 관련, 저자는 일본이 중국과 한국의 울분을 사는 이유에 대해..일본 정부가 다음과 같은 분명한 입장 표명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정리해.
1) 과거에 이런 일이 일어났고
2) 그것은 대부분 일본의 잘못이다
3) 일본은 그런 일이 절대로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이고
4) 그 보장을 위해 되돌릴 수 없는 제도적 조치를 취했으니 우리를 믿어도 좋다.
이게 독일이 한 일이고, 일본이 하지 않은 일이야. 제3자가 볼 때 이렇다는데.. 관대하고 관대한 한국 정부는…넘어가자.
저자가 볼 떄, 이 모든 건 일본 정치가 어마어마하게 실패한 결과야. 지난 25년간 총리 19명.. 허술한 정치구조를 개혁하려는 모든 시도가 기성 언론과 검찰, 미국 정부에 의해 가로막혀 버린 나라야. 미국은 건강하고 안정적 정치체제의 우방이 아니라, 미국에 의존하는 고분고분 국가로 남아있기를 바라고.. 이 정치 질서의 수호자들이 검찰과 주요 일간지.
법이 모호해서 어떤 정치인이라도 언제든 이런저런 법률 위반으로 기소될 수 있어. 기소 결정에 검찰의 자의적 판단이 절대적이기 때문이지. 검찰은 스스로를 일본 통치 체제의 가치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로 여기는데, 특정 정치인이 질서에 위협된다고 판단하면.. 사소한 것들을 적발해 언론에 알리고, 압수수색하고, 신문들이 난리치고…
뉴스는 기자들의 카르텔인 기자클럽(기자실) 통해 통제해. 주요 일간지 기사들이 복사기로 복사한 것처럼 똑같은 이유라지. 미디어가 특정 정치인이나 기업인에 대해 갑자기 하이에나 떼로 돌변해 달려들고…
전후 일본의 보수화 과정을 보면.. 미군정 초반엔 민주국가 가려고 했어.. 일본의 보수 지도층은 미군정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작업에 들어가는데, 이때 핵심 인물이 맥아더야. 아부에 약했고, 최고위층만 만났어. 결국 민주주의보다 반공주의가 더 중요해지고, 미군정은 구세력 보수파와 결탁해서, 빨갱이 소탕을 시작해. 일본 보수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신봉하지 않았어. 일본의 본질이라던 위계질서를 부정하니까. 일본의 권력자들은 노조, 언론 자유, 보통선거권, 남녀평등 실현을 막는데 총력을 다해.. 검찰은 자신들을 공복이라기보다 법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네.
미군정은 민주화는 커녕 가장 비민주적 두 가지에 힘 실어줬어. 관료제와 천황제. 천황을 그대로 두니까… 일본인들 인지부조화가 생겨. 최고의 신성한 가치인 천황이 비참한 현실과 관계가 없다고 하려니.. 무엇이 잘못됐는지 파악하기보다 과거를 묻는게 쉬웠지. 전범재판에서 기소인 측은 노골적으로 증거 조작해 천황을 보호했어. ‘승자의 증거’를 조작해 패전국 수장을 구제.. .. 의도적으로 역사 왜곡 묵인. 실제 왜곡 지시까지.
미국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도 책임 인정 않았는데..히로시마는 군사 중심지였던 반면, 나가사키는 불필요한 잔혹 행위였지. 그래서 대다수 일본인이 스스로 피해자라 여기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일본은 자기 연민에 빠진채 아시아 사람들 전체에게 커다란 고통을 일으킨 원인은 전혀 돌아보지 않아
일본 외교? 타이완 제외한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는 최악. 기민한 외교수완과 신뢰할 수 있는 안보정책 없다는게 저자 시각이야.
더불어, 일본과 그 식민지였던 타이완, 한국만이 여전히 미국의 방위선에 기약 없이 묶여 자국의 안전 보장을 미국에 의존하고, 외교 정책에 있어서도 미국의 동의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됐다고.
일본이, 이미 경제모델을 바꿔야 한다는게 명확했는데, 정치 지도자들은 매번 낡은 수법에만 의존. 엔화 평가절하, 인구 줄어드는 지방에 건설사업.. 원전 사고 이후 1년 뒤.. 원전 규모를 오히려 두 배로 늘리고… 정말 냉정하고 차분하게 보게 되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야.
세번째 책은 <동급생>
무척 짧은 소설이야. 유대계 독일인 프레드 울만이 썼어. 법학도였는데 히틀러 피해서 온 유럽 떠돌며 고단한 일생을 보냈지. 소설 속 주인공은 마음에 폐허를 품은 채 나이 들었고, 독일어를, 독일인을, 독일을 마주하는데 오래 걸렸는데… 저자도 이 소설, 70세에 썼어.
뼈대는 소년들 우정 얘기야. 근데 주인공 한스는 유대인이고, 콘라딘은 독일 귀족이야. 1930년대 독일에서 두 소년의 우정은 마냥 천진난만하기 불가능했지. 그때만해도 사람들은 몇년 뒤 유대인들의 운명을 짐작도 못했어.
의사였던 한스 아빠는 히틀러 돌풍이 일시적일 거라 말해. 경제가 나아지면 시들거라고. 괴테와 실러, 칸트와 베토벤 같은 위인들의 나라가, 그따위 쓰레기에게 넘어갈걸 믿냐고. 그는 유대인 정체성보다 독일인 애국심이 뜨거웠지.
근데, 한스 친구 콘라딘 편지가 이래.
“오로지 그 사람만이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을 물질주의와 볼셰비즘으로부터 구할 수 있고 그를 통해서만 독일은 어리석음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도덕적 우월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너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나는 독일을 위한 다른 어떤 희망도 찾아볼 수가 없어.”
콘라딘은 ‘그 사람의 사람됨과 성실함에 감동받았다’고. 실제 만나보니 겉보기에는 별로 인상적이지 않은 작은 남자지만,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그의 확신에서 오는 순수한 힘과 강철 같은 의지, 천재적인 강렬함, 예언자적인 통찰에 휩쓸려 들고” 마는 인간이라고. 히틀러에 대한 평가야.
히틀러가 당대 시대정신이었어. 물질주의와 볼셰비즘으로부터 독일을 구할 리더라고. 그 시절 스탈린과 히틀러 중에서 히틀러를 선택하는 것에 독일 시민의 자부심도 생생해.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인들 마음속 상흔을 어루만져주고, 용기를 갖게 해주는 지도자였지. 우리는 이렇게 엄청난 착각을 종종 해. 잘못된 판단의 대가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지..
내가 이 책을 추천하는 건, 책 내용이 좋기도 하지만, 이게 유럽 나라들의 필독서이고, 매년 10만부씩 팔린다고 해. 우리가 어떤 과오를 저질렀는지, 들여다보고, 이런 소설 보면서 나였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보고… 과거를 해상도 높여서 이해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그걸 제대로 하지 못한 일본, 그리고 이젠 한국이 그리 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