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을 위해선 용기가 필요해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하기 전까진 내가 거기서 여행을 하게 되리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곳은 뉴욕으로 가는 길에 잠깐 들르는 경유지였기 때문이다. 저렴한 비행기 편을 구하느라 목적지까지 가는 여정에서 두 번의 환승을 감행해야 했던 나는, 첫 번째 경유를 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렸을 때에야 대기 시간이 11시간이 넘는다는 걸 깨달았다. 전광판에 쓰여 있는 시간을 스치듯 본 뒤 화들짝 놀라며 그제야 비로소 티켓을 유심히 읽었지만 종이 위의 숫자가 가리키는 시간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11시간 반을 기다린 뒤에야 이륙할 수 있었다.
대기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막막해하며 걸어가는 동안에 환승 게이트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벌써 게이트 앞에 길게 줄을 선 채 분주하고 설레는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왼 편에는 게이트, 오른편에는 출구를 사이에 두고 넋 놓고 서있는 나는 마치 영화 <터미널>의 주인공 ‘빅터’가 된 것 같았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한순간 무국적자가 되어 미국의 한 공항에서 무한정 붙잡혀 있던 빅터가 어느 날 열려 있는 출구를 목격했지만 쉽사리 나가지 못하고 망설였던 것처럼, 나도 게이트와 출구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중간에 우두커니 서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섣불리 환승 게이트로 들어가 버리면 다시 나오는 건 불가능하다. 공항에서 밥을 사 먹고 카페에 가고 책을 읽는다고 해도 갇힌 공간에서의 반나절은 무료할 게 뻔했다. 쇼핑도 즐겨하지 않는 편이기에 면세점을 돌아보며 시간을 때우는 것도 분명 한계가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바깥으로 덜컥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면? 안전한 공항에서 얌전하게 기다리면 적어도 본전은 찾을 텐데, 밖에 나갔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제때 돌아오지 못해서 비행기 탑승 시간을 놓친다면? 괜히 무모한 짓을 했다가 뉴욕에 닿기도 전에 여행을 망친다면? 게다가 난 샌프란시스코에 대해서는 아는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안 될 이유가 더 많아 보였다. 내면의 두 자아가 싸우고 있는 동안, 영리한 두 손가락은 핸드폰을 꺼내 들어 곧장 초록색 창을 열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 체류’,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시내 나가기’ 같은 내용을 검색했고,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확인한 모든 답변이 열한 시간이면 시내 구경을 하고 오기에 아주 충분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떤 경로와 수단으로 이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정보도 넘쳤다. 사실상 나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곧바로 작고 네모난 창 속 사람들이 알려준 ‘바트(Bart)’라는 공항철도를 타기 위해 걸어가기 시작했을 때, 가슴은 이미 흥분으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사뭇 비장하게 걸음을 옮기는 내가 웃기면서도 대견했고, 계획에 없던 여행을 시작하는 게 얼떨떨하기도 했다. ‘진짜로 나가는 거야?’라며 당황하다가도, ‘그래 바로 이게 여행이지.’라며 뿌듯해하는 여러 명의 ‘내’가 마음속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 ‘불안이’와 ‘행복이’가 있다면, 내 안엔 ‘소심이’와 ‘대범이’가 있다. 인생의 어떤 결정의 순간마다 소심이와 대범이가 겨뤄 왔고, 승자는 매번 달랐다. 어떤 때에 소심이가 이기고 어떤 때 대범이가 이기는지 그 패턴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이렇듯 대범이가 승기를 거머쥘 때는 항상 ‘즉흥이’가 옆에서 힘을 실어주고 있을 때다.
어쨌든 즉흥이를 등에 업은 대범이의 승리로 공항 철도 티켓을 구매하고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사실 철도 티켓을 결제하려는데 오류가 생겼을 때 또다시 소심이가 “그냥 가지 말자!!” 라며 발악을 했지만 다행히 그때도 대범이가 조금 더 힘이 셌다). 시내로 향하는 30분 동안 샌프란시스코에서 볼거리를 검색하고, 한국에서 공부한 ‘미국 식당 팁 주는 방법’ 같은 걸 다시 한번 복습했다. 그리고 마침내 시내로 보이는 곳에 열차가 정차했을 땐 홀린 듯 나의 두 발이 움직였다.
역의 출구는 양 옆이 벽으로 막혀 있어 아래쪽 계단에서는 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건물의 꼭대기와 나무의 윗부분만 아슬아슬하게 보였는데, 그 절묘함이 아래에 있는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안달 나게 만들었다. 계단의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더 커다랗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그 자태는 영화로 수없이 봐왔던 바로 그 미국을 내 눈으로 직접 본다는 기대감을 더 부풀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샌프란시스코 거리의 퐁경이 온전히 내 눈앞에 펼쳐졌을 땐 이미 완전히 압도당한 뒤였다.
역 앞에 자리 잡고 버스킹을 하는 세 명의 남자와 그 앞에서 자유롭게 흔들리며 춤을 추고 거침없이 휘파람을 부는 구경꾼들, 레게머리를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 호쾌하게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환경미화원 두 명,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미국 영어, 그리고 영화로 선행학습해 어쩐지 친숙한 건물들. 그것들을 한데 모아 바라보던 바로 그 순간에 내가 아주 먼 곳으로 떠나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카메라에 대고 밝게 웃으며 “Cheese~”를 외치는 해맑은 소녀들에게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셔터를 누르는 것뿐이었지만, 낯선 이를 향해 경계 없이 웃어 보이는 그 환대에 내가 이 우연스러운 여행지를 벌써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후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반나절은 즉흥이의 진두지휘 아래 흘러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테면 나는 멀리서 보이는 풀밭을 무심히 지나치지 못했다. 바다사자가 많기로 유명한 ‘pier 39’에 가야겠다고 결심해 놓고선 걸어가는 길에 공원이 보이면 홀린 듯이 들어가곤 했다. 초록빛깔의 잔디 위에서 누군가 피자를 먹거나, 누워서 자거나, 간이 의자를 펼쳐 놓고 볕을 쬔다거나, 책을 읽는다거나 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잠깐이라도 풀밭에 앉아야 직성이 풀렸다. 혹은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다가 야외 경기장에서 테니스를 치는 사람이 있다면 멈춰서 구경하지 않고선 못 배겼고, 가정집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동네를 지날 땐 부러 천천히 걸으며 ‘이 집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여기 사람들은 어떤 게 재밌을까?’ 같은 상상을 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또는 가다가 갑자기 배가 고파져 눈에 보이는 식당에 그냥 들어가 파스타와 커피를 주문하고선 그곳에 한참을 앉아서 책을 읽기도 했다. 즉흥이는 정말이지 즉흥적이었다(물론 마침내 바다사자를 보기는 했다).
덕분에 목적지까지 가는 시간은 느리고 더디었다. 오래 걸렸고, 오래 걸었다. 하지만 딴 길로 새고, 마음이 이끌리는 곳을 향해 다가가고, 시선이 머무는 것에 눈길을 주고, 생각이 스칠 때마다 잠시 들여다보는 그 시간 동안, 정신은 자유로웠으며 마음은 풍요로웠다. 그래서 워싱턴 스퀘어 광장에 앉아 아직 쌀쌀한 5월의 바람을 맞고 있을 땐 도리어 이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어쩌면 목적지가 거기 있는 건, 거기까지 가는 그 길에 무엇이 있는지 관찰하고, 직접 걸어 보고, 그러는 과정에서 생생하게 감각한 모든 것들을 기억 속에 저장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고. 가끔은 딴청을 피우다 길을 잃었을 때 더 좋은 길목으로 들어서기도 한다는 걸 알게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뉴욕이라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기 위해, 그리고 힘을 비축하기 위해 밖으로 나오지 않고 공항에서 11시간을 머물렀다면 어땠을까?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지 않고, 호기심과 모험심을 억누르고 그저 안전과 효율을 위해 가만히 머무르는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물론 그 선택을 해본 적 없기에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늘 자기가 내린 선택에 대해서만 알 수 있는 법이니까. 대신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낸 시간은 사막에 부는 바람처럼 거침없었다는 것, 그래서 자유롭고 여행답고 나 자신과 가장 가까웠다는 것이다.
그 날것의 시간을 기억 속에 오래도록 섬세하게 남겨 두겠다고 다짐하며 뉴욕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