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면서 여행하기
미국 사람들은 얼마나 개방적일까? 그들이 굉장한 오픈마인드를 갖고 있다는 걸 드라마, 영화, 다큐 등 여러 경로를 통해 간접 경험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겪어본 적이 없었으니, 그들이 베푸는 친절과 호의, 혹은 타인에 대한 접근(?)이 어느 정도일 때 ‘보통’ 수준이라 할 수 있는지 난 알지 못했다. 눈이 마주치면 싱긋 웃고, 계산대를 사이에 두고서 날씨 이야기를 하거나 귀걸이를 칭찬하고, 버스를 타는 장애인의 휠체어를 올려 주는 것과 같은 호의. 그건 보편적인 수준인 것 같다. 뉴욕에서 본 대다수의 미국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했으니까.
하지만 길에서 우연히 만난 여행자와 친해져 sns로 맛집이나 카페를 추천해 주다가, 어느 날 갑자기 65만 원짜리 선물을 불쑥 건네는 건? 그것도 자연스러운 호의인가? 내가 아는 누구도 그걸 보고 자연스럽다고 말하지 않을 것 같다.
그 여행자는 나다. 내게 선물을 건넨 남자의 이름은 루이스.
뉴욕에 도착한 첫째 날, 나는 화려하고도 생경한 브로드웨이의 거리에 매료되어 넋을 놓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와 부딪칠 뻔한 루이스는 격식 있는 차림새에 단정한 용모를 한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내가 찍는 사진에 방해되지 않도록 그가 몸을 숙여 피해 주면서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가 물었다.
“여행 중이야?”
“응. 오늘 뉴욕에 도착했어.”
“어때? 재밌어?”
“서른 시간 가까이 걸려서 도착한 거라 좀 피곤하긴 한데, 그래도 되게 재밌어.”
“그렇구나. 난 일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야. 혼자 온 거야?”
“응.”
“되게 멋지다. sns 해? 여행하다가 맛집 가고 싶거나 궁금한 거 생기면 나한테 메신저로 물어봐!”
“오! 정말 고마워.”
그땐 별다른 의심이 없었다. 메시지로 맛집 소개받는 것 정도로 무슨 일이 생길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알게 된 뉴욕 사람이라는 점이 신나기도 했다. 그땐 미국 사람들의 호의와 적극성의 수준을 알지 못한 상태여서 ‘아 이게 말로만 듣던 뉴욕의 사교적인 문화로구나!’ 싶어 흥미를 느낄 뿐이었다.
그렇게 SNS 메신저로 자주 소통하며 루이스는 나의 안부를 물어봐 주고 맛집과 카페를 소개해 줬다. 뉴욕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려 주고 여행자로서 나의 하루가 어땠는지 세심하게 살펴 주는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 현대 미술관(Moma)을 관람 중이던 나에게 루이스가 물었다.
“미술관 갔다가 뭐 해? 쇼핑 좋아하면 같이 쇼핑할래?”
“나 지금 너무 배고파서 저녁 먹으려고 했는데, 쇼핑 말고 차라리 저녁은 어때? 네가 나한테 이런저런 도움을 줬으니까 고마움의 표시로 내가 살게.”
그렇게 우리는 30분 뒤 타임스퀘어에서 만나기로 했다.
만나자마자 루이스는 나에게 배가 많이 고픈지 물었다. 너무 배가 고팠기에 아사하기 직전이라고 말했는데, 그는 이상하게도 밥 먹기 전에 쇼핑몰 한 군데를 먼저 들르면 어떻겠냐고 자꾸만 제안을 했다. 그 매장이 곧 마감할 시간이니 그전에 가면 좋겠다면서 말이다. ‘이 친구가 쇼핑이 정말 하고 싶은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주린 배를 부여잡고 그를 따라갔다.
우리가 들어간 매장은 명품을 잘 모르는 내가 언뜻 보아도 저렴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루이스가 나에게 대뜸, 갖고 싶은 옷을 골라 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난 그의 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황을 넘어서 황당해하는 나와, 반대로 태연하고 당당한 루이스, 두 사람의 창과 방패의 대결 같은 대화는 이러했다.
나: 옷을 사주겠다고? 왜? 아니야, 여기 너무 비싸 보여. 그리고 네가 나한테 옷을 왜 사줘?
루: 이건 나의 호의야. 네가 뉴욕에서 아는 사람은 나뿐이잖아. 네가 뉴욕에 있는 동안 너에게 베풀어 주고 싶어서 그래.
나: 그건 고맙지만 이건 너무 비싸 보이는걸? 너 부자야? (실제로 “Are you rich?”라고 물었다.)
루: 부자는 아니지만 너에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어.
나: 그냥 우정으로?
루: 응 100퍼센트 우정이야.
나: 그렇지만 너무 비싸.
루: 아니야 별로 안 비싸.
우리의 실랑이는 거의 10분을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사줄게”, “고맙지만 됐어”를 반복하는 두 사람을 흘긋 쳐다보는 점원의 시선도 느껴졌다. 루이스의 고집에 나는 결굴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이게 맞나? 뉴욕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새로 사귄 친구에게 값비싼 걸 사주나?’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그 와중에 마음에 쏙 드는 가죽 재킷을 골라 들었다.
그런데 계산대로 가기 전에 루이스가 자꾸만 드레스와 구두 진열대 앞을 서성이며, 드레스는 필요 없냐, 구두는 어떠냐 묻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화려한 드레스는 입을 일도 없거니와, 160의 단신인 나에게 맞는 길이는 대충 봐도 없는 듯하며, 여행자에게 하이힐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거절했다. 결국 루이스는 가죽 재킷만 사주었고, 나는 의구심 섞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여자 직원을 뒤로하고 얼빠진 표정을 한 채 밖으로 나왔다.
100퍼센트 우정의 선물이라는 말에 걸맞게 라멘집에 들어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도 루이스는 시종일관 정중하고 친절했으며 선을 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성적인 접근의 표시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우린 프랑스계 미국인으로서 살아가는 루이스의 이야기, 요즘 재미있게 보는 넷플릭스의 한국 드라마, 루이스가 다니는 은행의 일 등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가 나에게 술을 마시자고 제안을 해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속에 의심이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아, 이 사람이 이성적인 접근을 하려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나는,
“혼자 여행하는데 밤늦게 다니는 건 너무 위험해서 난 숙소에 일찍 들어가.”
라고 거절했다. 다행히 그는 나를 더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함께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그가 내 의심에 불을 활활 붙이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다음번에 만날 땐 드레스와 구두를 사줄 테니 그걸 입고 내가 예약한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자. 그리고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라고. 그의 말에 나는,
“난 비밀 같은 건 만들지 않아.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라고 대답한 뒤 찝찝한 마음을 안고 호스텔로 향하는 지하철에 올라탔다. ‘아, 애초에 쇼핑몰에 들어간 이유가 나를 예쁘게 차려입게 하고서 나와 데이트를 하고 싶어서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에 돌아와 씻지도 않은 채로 곧장 가죽 재킷을 펼쳐 가격을 확인했다. 매장에서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가격은, 우리 돈으로 무려 65만 원이었다. 그 숫자를 보고 나자, 이건 뭔가 잘못된 게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여섯 명이 묵는 도미토리 방에 새로운 룸메이트가 들어왔다. 그녀는 우연히도 한국인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면서, 원래 미국인들은 그렇게 친구에게 고가의 선물을 하기도 하냐고 물어봤다(그녀가 미국에서 교환 학생으로 지냈다기에 미국인들의 문화에 대해 나보다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대답은 "No." 자기가 겪은 바로는 일부 미국인들은 마음에 드는 친구가 있으면 자동차로 어딘가 데려다주거나 음식을 차려주는 등 정성스럽게 대하긴 하지만 그렇게 금전적인 호의를 베풀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루이스의 선물이 일반적이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곧이어 나의 위층 침대를 쓰는 ‘라일라’ 언니가 귀가했다. 라일라 언니에게도 오늘 일어난 일을 설명하며 프랑스 남자들은 원래 다들 그러냐고 물어보았다(그녀가 프랑스 사람이기 때문에 프랑스계 미국인인 루이스의 심리를 나보다 잘 알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니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나에게 루이스와 관련된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묻는 것이었다. 그 남자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고, 그의 이름은 무엇이며, 그의 사진은 있는지, 그가 무슨 말과 함께 그런 선물을 했는지에 대해 굳은 얼굴로 물어보는 것이었다. 내가 사사로운 것까지 전부 다 대답하니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 어떤 프랑스 남자도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친구에게 이런 고가의 선물을 하진 않아. 그리고 차라리 그가 너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어서 접근했던 거라면 그냥 거절하면 끝나는 단순한 문제인데, 만약 그게 아니고 순진한 여행객을 범죄나 부적절한 일에 끌어들이려는 거였다면 어떡해?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이건 너무 위험해. 내 생각에 네가 그에게 연락해서 옷을 돌려준 뒤 연락을 아예 끊어버리는 게 좋을 것 같아. 옷을 돌려줄 때 내가 같이 가 줄 수 있어. 근데 혹시 걔가 너 머무는 호스텔을 알고 있는 건 아니지?”
이 말을 듣자마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물론 루이스는 내가 어디서 지내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어쩌면 내가 지금 위험한 일에 연루(?)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까, 낯선 사람의 호의에 지나치게 수용적이었던 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첫 여행지에서의 들뜬 마음에 덜컥 sns로 친구를 맺고, 사소한 정보를 제공받았다는 이유로 덥석 저녁으로 고마움을 보답하려 했던 내 순진함이 자칫 나 자신을 위험한 상황에 빠뜨릴 수도 있었다는 걸 번뜩 깨달았다. 또, 그가 물질적인 선물을 하려고 했을 때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미국인들의 호의에 대해 잘 모른다 하더라도 혼자 여행하는 사람으로서 더 조심했어야 했다는 자책이 뒤따랐다.
그날 밤 바로 루이스에게 옷을 돌려주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네가 나에게 해준 것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고 설명하면서 말이다. 며칠 뒤 붐비는 타임스퀘어 한가운데에서 루이스를 만나 옷을 전달했다. 그는 매우 민망하고 멋쩍은 듯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에 대해 거듭 사과하며 나쁜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했지만, 이미 마음이 닫힌 나에게 그 말은 신뢰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와 헤어진 뒤 혼자서 뮤지컬 <알라딘>을 보는 것으로 루이스 사건의 후유증을 훌훌 털어버렸다.
경솔했던 나의 행동을 변명해 보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원한 건 단지 현지인 친구를 사귀는 일이었을 뿐이라고 말이다.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문화를 즐기고, 무엇이 좋고 무엇이 불만인지, 또 이곳에서의 삶 중 내가 모르는 면은 어떤 게 있는지 같은 것을 알아가는 게 좋기 때문이다. 현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게 내가 여행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루이스 사건은 타인의 친절과 호의를 너무 투명하게 받아들이지만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남기고 갔다. 나의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 나의 욕구와 상대의 욕구가 늘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불일치하는 때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나에겐 친구 사귀기가 목적이었으나, 상대에겐 다른 목적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니 어느 정도 경계하는 마음은 여행자에게 당연히 필요한 것이었다.
실수를 통해 무언가를 배워가는 것도 여행의 일부라고 승화해 본다. 늘 현명한 판단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겠냐고 스스로를 위로도 해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