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파크에서
어떤 날은 유독 쓸쓸하다. 피부 밖으로 단 한 겹의 웃음도 새어 나오지 않는 얼굴로 그저 우두커니 앉아 있게만 되는, 그런 날이 있다. 누가 등 떠밀어 온 여행도 아닌데, 마치 등 떠밀려 떠나온 것처럼 억울하게 느껴지는 그런 날 말이다.
외로움은 예고 없이, 규칙도 없이, 순식간에 온다. 3층에서 4층으로 올라가는 미술관의 에스컬레이터에서, 방금 전까지 평화롭게 책을 읽던 공원의 의자 위에서, 테이블에 와인잔을 놓아주는 종업원의 미소 앞에서, 덜컥, 고독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은 그리 낯설지 않은 것들이어서, 나름대로 대처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방법이라 할 것도 없을 만큼 간단하다. ‘아.. 내가 지금 외롭구나.’ 생각하며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다. 오래지 않아 사라질, 구름 같은 감정임을 상기하고서 내버려 두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사소한 계기로 금방 명랑해진다. 방금까지 적적해했던 사람이 내가 맞나 의심스러울 만큼 나의 기분은 쉽게 바뀌곤 한다.
그러나 이런 날도 있다. 고독이 완전무장을 해서 그 어떤 노력도 다 튕겨내 버리는 날. 울적함에 속수무책으로 사로잡혀 어찌할 줄 모르게 되어버리는 날. 그런 날은 감정의 구름이 도무지 떠내려가지를 않아서, 생각들 속을 무력하게 헤엄치며 버티는 수밖에 없다. 생각은 과거로 갔다가, 현재로 왔다가, 다시 과거의 어느 시점을 떠돈다. 나는 그 물결 위에 둥둥 떠 생존 수영을 할 뿐이다.
어느 날, 뉴욕에서 가장 아끼는 공원에 앉아있을 때 완전무장한 고독이 나를 찾아왔다. 그날 저녁의 브라이언 파크가 유독 아름다웠던 게 원인이었다.
푸르스름하게 어두워져 가는 하늘과 서늘한 공기, 공원의 가장자리를 둘러싼 진초록색의 나무들, 공원 앞 도서관에서 새어 나오는 주황빛 조명. 나만 빼고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웃고 있는, 행복하기로 작정한 듯 보이는 사람들.
그 한가운데에서 혼자 앉아, 나는 상영되지 않을 영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오늘 여기서 무료로 영화를 틀어준다고 들었는데 왜 시작을 안 하지, 의아해하며, 날짜를 착각한 줄도 모르고 바보처럼 혼자 그렇게 있었던 것이다. 기다림은 기약 없이 길어져 가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들은 그게 무엇이든 유난히 다정했다. 잔인하게.
그러니 어떻게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와 다정한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을 말이다.
스물세 살의 봄, 친언니와 한강에서 먹었던 피자는 참 맛있었다.
사실 그날 저녁은 혼자서 집을 나오던 그 순간부터 이미 마음이 설렜다. 희한하고 우스웠다. 늘 만나는 사이인데, 퇴근하고 집에 오는 언니를 맞이하던 평소와 달리 그날은 내가 언니 회사 근처로 간다는 것만으로 무언가 새로웠다.
그 이유에서인지, 그날의 모든 순간이 빼곡하고도 촘촘하게 나의 기억 어딘가에 적혀 있다는 기분이 든다. 처음으로 서울 시내에서 혼자 버스를 타고 언니에게 갔던 그 길이,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걸어가다 저 멀리 흰색 셔츠를 입은 언니를 발견했을 때의 그 낯선 반가움이.
십오 분을 걸어 도착한 한강, 피자가 오기 전에 미리 사온 맥주, 함께 찍은 사진, 나를 향해 자꾸 카메라를 들이밀며 이렇게 저렇게 앉아 봐라 주문하던 언니의 목소리. 모든 게 다 기억난다. 건물에서 새어 나오던 하얀 불빛들과 가느다랗게 반짝이던 강의 물결, 그리고 점점 서늘해지던 공기까지도. 모든 게 다 내게 남아있다.
그날과 비슷한 봄바람이 뉴욕의 브라이언 파크에 훅, 불어오는 것이었다. 그 바람은 나를 또 다른 과거의 어느 날로 데려다 놓았다.
이번엔 스물한 살 겨울, 스페인이다.
대학교에서 만난 민주와 나는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부터 서로에게 꽂혔다. 닮은 구석도 많고, 대화도 잘 통하고, 노는 방식도 비슷하고..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것처럼 잘 맞았던 우리는, 친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가 인생 친구를 만났다는 걸 알았다. 서로의 집에서 번갈아가며 먹고 자며 항상 붙어 있었기에 각자의 부모님들도 우리가 마치 딸의 유년 시절 친구인처럼 정답게 대해주시곤 했고, 방학이어도 소원해지지 않고 서울로, 근교로 함께 여행을 갔다. 그러던 스물한 살의 겨울 방학, 우리는 과감하게 해외여행을 시도했다.
스페인에서 보낸 17일 중 바람에 의해 도착한 장면은, 팔짱을 꼭 끼고 하염없이 걸어 다니며 이야기했던 어느 골목길이었다. 아마 어떤 식당이나 공연 같은 걸 위해 기다리며 계속 걸었던 것 같다. 날은 어두워졌고, 곳곳에 서있는 가로등이 만들어낸 우리의 그림자는 길쭉했다. 우리는 대화하기를 좋아했다. 어떤 장면을 보든 어떤 공간에 가든 각자의 감상을 공유한 뒤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를 알아가는 것도 즐겼고,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느끼는 희열도 사랑했다. 어떤 날은 벤치에 앉아, ‘지금 눈앞에 보이는 풍경 중에 인상적인 것 한 가지씩 찾아 이야기하기’를 놀이삼기도 했으니까.
그날 저녁도 여느 때처럼 둘이서 걷고, 대화하고, 관찰하며 놀았을 뿐이었다. 별다를 것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무방비하게 그 평범한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 한참을 배회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오르자 문득 혼자라는 사실이 가슴 시리게 아쉬웠다. 나도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처럼 우리끼리만 아는 농담을 던지고, 사소한 것 가지고 낄낄거리고, 날이 저무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하면 정말 좋을 텐데, 싶었다. 같이 사진도 찍고 싶고, 이 공원이 왜 이렇게 마음에 드는지 이야기도 하고 싶고, 영화는 왜 상영을 안 하냐며 같이 분개하고 싶고. 그런 마음이었다.
공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왠지 더 춥게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 상영하지 않는 영화를 기다리는 일을 그만두고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외로워서 사람이 떠오르는 걸까, 떠올라서 외로워지는 걸까.’ 문득 생각하다가, ‘모르겠다, 이 외로움도 나의 일부지 뭐.’라고 멋대로 결론지으며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호스텔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런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