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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도, 육아도, 꿈도, 다 반토막씩만 해내는 삶

육아와 꿈 사이, 매일 반토막뿐인 하루에서 나를 다시 찾는 일

by 탄산수

(*어제 업로드한 글에 살을 붙여 올립니다)

아이를 낳은 뒤, 몸은 힘들었지만, 어느 때보다 마음은 편안했다. 꼬맹이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내 몫을 다 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멀리 생각지 않으니, 전처럼 불안하고 고독하지 않았다.


그런데 숙제를 미뤄둔 학생처럼 찝찝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불안과 고독을 피한 대가로 결국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어떡하지? 자주 걱정했다. 우린 무언가가 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고, 그저 지금을 살아가면 된다는 철학자의 말도 와닿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현재를 내가 뜻하는 대로 꾸리고 싶은 마음뿐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현재를 바꾸기 위해 다시 내 이름으로 바지런이 살아보았다.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고, 아이를 돌보고, 운동을 하고, 돈을 벌며, 집안일을 한다. 모든 걸 다 반토막 정도만 해내고 있어서 이렇다 할 성과는 안 보인다. 그렇게 나는 다시 불안해졌고 고독해졌다.


그러던 와중에 친구가 나에게 한 권의 책을 선물해 줬다. 아기띠를 매고 읽던 책을 기억하고 작가의 신작을 사준 것이다. 작가는 SBS 아나운서를 그만두고, 어린아이 둘을 연달아 낳고, 독학으로 미국 로스쿨에 붙었으며, 책까지 출간했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엿본 그녀의 일상은 어린아이들의 엄마임에도 여유롭게 시간을 쓰는 듯 보였고 하는 일마다 척척 잘 풀리는 것처럼 보였는데 책에는 그녀가 얼마나 고독했고 자신의 삶을 잃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지냈는지 적나라하게 담겨있었다. 그렇게까지 노력했던 이유는 본인만의 이상을 실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적어두었다.

'이상'이라는 단어에서 빛이 났다. 내가 맹목적으로 열심히 살았던 이유를 '이상'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만 내 '이상'은 사회를 바꾸거나 하는 거창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내가 손 쓴 창작물로 자신과의 거리가 더 친밀해졌으면 하는 것, 진짜 나와 네 모습으로 소통하는 것. 이것이 나의 단촐한 이상이다. PD로 일하고 있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그림책을 배운 것도, 그림책테라피 자격증을 딴 것도 다 이 이상과 관련이 있다.


철학의 정수인 '그림책'을 만들면서 아직 내가 누군가에게 베풀 만큼의 깊이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도 했다. 끊임없이 삶의 형태를 변화시키며 불안해하고, 경험하고, 후회하고, 생각하고, 생각을 잘 정리해 두는 것이 지금 내가 내릴 수 있는 답이다.


매일 이상의 한 부분을 실천하고 있으면서도 거창한 무언가를 내보이고 싶다는 조급함이 요즘 나를 힘들게 만든다. 타인의 시선 때문이기도 하고 결과물을 만들면 새로운 기회가 생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완결보다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 자체가 즐거운 것인데 인정에 목말라 주객이 전도된 것 같기도 하다.

남들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나에겐 현실적인 일을 하고 짬을 내어 내 이상을 꿈꾸는 이 시간이 가장 건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 조급함을 받아들이면서도 이 시간을 즐겨야겠다. '너 진짜 어디 있다 이제야 왔니?'라는 말을 계속 반복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딸이, 포근함을 주는 가정이, 돈 벌기 위한 일이 결국 고독한 나를 지키기 때문이다.


보이는 성과를 내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랑이 될까. 오늘도 이룬 것 없이 열심히 산다는 생색만 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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