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사람 최승선 038] 남의 논 근처에서 살고 싶어요
도시에 살다 돌아오니 거실만 나와도 마운틴뷰를 즐길 수 있다는 감동이 질리지 않는다. 출퇴근길에,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보이는 리버뷰는 말할 것도 없다. 노을이 지는 리버뷰는 금상첨화. 동해가 한층 가까워졌으므로 오션뷰도 우습다. 커피 한 잔 마시러 강릉 가는 일쯤이야. 그러나 이 모든 풍경보다 내가 좋아하는 풍경은 논뷰다.
여름의 푸른 벼와 가을의 황금 들판은 놓쳐서는 안 되는 핵심 제철 풍경이다. 인천에 살 때는 홍대를 가는 1200번 버스를 타고 김포의 논을 보는 것으로 부족해, 논을 보러 주말에 양평으로 향하곤 했다. 논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니, 너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논 구경이 막상 보러 가려고 마음먹으면 쉽지 않다. 어느 마을이 그런 마을인지, 주차는 어디에 해야 하는지. 특히 시골 마을 특성상 외부인이 잘 오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가 들어왔을 때 왜 왔는지 의심과 관심을 받기 마련인데 뭐라 답할 것인가. '논 보면서 산책하려고요...'
그러니 차를 타고 논이 좌우로 펼쳐진 길을 달리는 것이 제격인데 그러려면 호기심이 필요하다. '저 먼 도로 끝엔 뭐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 내비를 의존하지 않고 '길 없으면 돌아오지 뭐!' 할 수 있는 배짱도 필요하다. 그것도 아니라면 우연이 필요하다. 우연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 '이런 곳에 카페가 있어?' 소리가 절로 나오는 카페를 향해야 한다.
다행히 나의 본가 동네는 과수원과 밭, 논, 우사와 돈사, 공동묘지까지 다채로운 풍경을 지니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논뷰를 보며 산책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한여름에 산책? 있을 수 없다. 논을 보며 걷는 일은 노을 지는 가을에, 황금 들판을 바라봐야 아름다운 법이다. 한여름엔 달리는 에어컨인 자동차에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러 가는 길에 봐야 한다.
이 말에 공감한다면 내비게이션에 <루루루>를 검색하면 된다. 말 그대로 '마을'에 카페가 있다. 푸른 산 아래에 푸른 논들이 펼쳐져있다. 그 마을의 경관을 해치지 않는, 창으로 해가 따뜻하게 들어오는 카페를 향해 가는 길은 그야말로 '제철'이다. 생각보다 황량한 봄과 알록달록한 초록의 여름, 황금의 가을과 생각보다 포근한 눈 쌓인 겨울.
우스갯소리로 '남이 가꾸는 논 근처에 살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한다. 나는 아직 농사에 관심이 없고, 논은 누군가의 성실로 가꾸어지는 곳이니까. 그 에너지와 제철의 풍경 두 마리를 모두 갖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 욕망이 또 너무 죄스러울 때면 슬쩍 기도를 해본다. '저 논에 풍년이 있길, 농부님이 건강하시길, 그 가정이 행복하길. 그래서 오래오래 논을 아름답게 가꿔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