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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나 Apr 07. 2021

마지막 투병기(1) 퇴사와 ADHD

어쩌면 마지막이 될 데이나의 개인적인 이야기





들어가며


브런치를 읽다 보면 작가마다 다른 주제로 플랫폼을 사용한다는 걸 알게 된다.

업무를 기록하거나, 비즈니스를 홍보하거나, 인사이트를 정리하거나, 일상을 기록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모두가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듯, 같은 곳이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가지각색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브런치를 잘 사용한다'는 작가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어떤 주제든지 간에 하나의 목적으로 브런치를 운영하는 것. 유튜브, 인스타그램을 포함한 SNS 분야의 성공하는 채널이 가진 불문율이기도 하다. 독자가 팔로우할 시점에 좋아하고 기대했던 이야기들을 어긋나지 않게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것.


그런 점에서 나는 실패했었다. 2015년 처음 브런치 계정을 만들 때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한 탓이 클 거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모르고 손에 쥐어진 터라 그저 글을 쓰고 싶으면 브런치를 열었다.



내게 브런치는 방이 아주 많은 아지트였다.

다른 방에서 나는 다른 글을 썼다. <빨간 머리 앤> 앤의 옥탑방 같은 방에선 오랜 친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남겼고, 혼자 남은 사무실 같은 방에선 일을 하며 얻은 시도와 배움을 놓치지 않으려 기록에 남겼다. <리틀 포레스트> 혜원의 집 같은 곳에서는 오며 가며 쌓여온 일상의 고민을 나누기도 했는데 내가 가장 좋아했던 방이기도 하다. 그렇게 공부의 기록도, 유저로서의 상념도, 여행의 흥분도 어떤 방문을 여는지에 따라 무엇이든 쓸 수 있는 나의 아지트. 그게 브런치였다.


그렇게 마음대로 불문율을 어겼음에도 신기하게 다른 색을 지닌 글들은 각기 다른 독자들의 문을 두드렸고, 그들의 공감과 반응을 내게 전해주었다. 그래서 성공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오히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달라지는 그대로의 나를 모두 보여주는 것 같았다.



어떤 친구는 어느 날 내게 '네가 쓰는 개인적인 글은 마치 투병기 같다'라고 말했다.


치부가 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너무 스스럼없이 공개해 위험할 수 있다는 진심 어린 친구의 걱정이었다. 나중에라도 잘못 이용될 수도 있고, 그걸 통해 조금이라도 나쁜 편견을 가지게 되는 사람이 생길 것이 두렵지 않냐고 물었다.  


근데 진짜 두렵지 않았다. 걱정도 크게 없었다. 어차피 모든 사람은 완벽하지 않고, 흔들리는 고통을 누르며 산다. 그저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이며 사는 것뿐이다.


하지만 남들의 완벽해 보이는 조각들을 보며 처량해지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기에, 나까지 성공스토리와 멋져보이는 이야기를 더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별 것 아닌 인간이며, 힘들지만 잘 살아내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누가 생각했을 땐 이상해 보일만큼 얼굴이 붉어지고 불쌍히 여겨질 수 있는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썼다.



'나만 그렇지 않구나.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같은 위로를 받은 누군가가 있다면 됐다는 간단한 동기였다.


그러나 6개월의 휴식 동안 그 또한 내가 가진 결핍이라는 걸 알게 됐다. 두 편에 걸쳐 이야기할 나의 치유 과정의 결과이며, 이 글을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는 당분간 하지 않을 것 같다.


이후 내 브런치 아지트는 오피스만 있는 원룸으로 이사할 예정이다. 이제는 직업인으로서의 데이나의 이야기 즉, 조직문화, HR, 커리어, 스타트업, 일하는 이야기만 쌓아가려고 한다.


아쉬워할 필요는 없는 것이 그만큼 클라이맥스가 될 만한 이야기다.

내 불안과 결핍의 종착역 '마지막 투병기'












+0 days

제발 쉬자. 쉬기만 하자.



8월, 처음 퇴사를 했을 때는 그저 쉬는 게 목표였다.


주변에서 더 아쉬워할 만큼 열심히 했던 곳이지만, 개인적인 신념과 우리가 주창했던 문화를 지킬 수 없었던 회의감이 퇴사의 큰 이유가 됐다. 하지만 건강 이유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많이들 알다시피 자궁 쪽 수술도 했고, 검사를 하다 보니 백혈구 수치도 남들에 비해 심하게 낮다는 결과를 받았다. 혈액이 고장 나면 어느 부위를 고쳐서는 될 일이 아니다. 수술로 떼어낼 수 있는 자궁보다 숨 쉴 때마다 온몸을 돌고 있는 이 피가 문제일까 봐 더 무서웠다. 두 곳이 문제였기에 두 병원에 모두 가야 했다. 일주일에 몇 번씩이나 병원을 가는 게 너무 지겹고 싫었다. 결국 혈액은 일시적인 문제였음을 확인하고 안심할 수 있었지만, 다시는 이 고생을 하고 싶지 않아서 절대 아프지 말아야지 결심했다.


이러니 편안히 먹고 자고 노는 게 나의 유일한 할 일이었다. 다시는 병원신세를 지지 않으려면.


남편은 잠이 부족하면 암세포가 늘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내가 조금이라도 일찍 깰까봐 본인 알람도 켜지 않았다. 그렇게 느지막이 일어나 남편이 차려준 아침을 먹고, 따뜻해진 양재천을 달리러 나갔다 돌아와서 빈둥빈둥 넥플릭스를 보고 게임도 했다.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질 때쯤 남편이 집에 돌아왔고 함께 저녁을 먹었다. 내 인생은 아주 심플해졌다.











+30 days

혼자 놀기 지겨워 벌인 새로운 시도들



한 달쯤 지나고, 슬슬 재활 모드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유튜브도 하고, 그림도 배우고, 인스타그램도 활발히 했다. 혼자 노는 게 지겨워져서 도전한 일이었는데 오랜만에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아 역시 나는 외향적인 나를 뿜어내야 해!'라고 생각했다.


근데 하면 할수록, 일하는 내가 아닌 나 개인이 유명해지고 주목받는 건 재미가 없구나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모든 활동들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질문에 답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걸로 다른 사람들에게 뭘 줄 수 있지? 내가 어떤 가치에 기여하고 있지?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핵심이 빠져있었다. 더 이상 내 노력을 여기에 쏟을 필요가 없었다.



이것 말고 진짜 무언가 가치 있는 걸 만들고 싶어 졌다.

창업은 당연히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저 만들어보고 싶은 아이템이 있었다. 바로 잠옷.


어릴 때부터 워낙 파자마 덕후기도 하고, 일상복만큼이나 잠옷을 좋아하기에 국내 브랜드는 거의 꿰고 있다 할 정도로 내가 자신 있는 분야였다. 특히 백수가 된 이후 집에만 있다 보니 내가 입는 옷은 잠옷밖에 없었다.


코로나 시국이 장기화되면서 원마일 웨어, 홈웨어가 더 많이 필요해질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성공할 필요도 없었다.


항상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잠옷이 없었던 차라 내가 만족할 잠옷을 직접 만들어보는 것만 해도 괜찮았다. 그래서 아는 브랜드 디자이너 언니에게 브랜드를 시작하는 방법도 물어보고, 패턴 디자인 공부도 하고, 옷을 패턴화 시켜서 제작하는 방법도 알아보고 등등 하나씩 배워나갔다.


내가 좋아하는 걸 만든다는 원초적인 즐거움은 확실히 달랐다. 남편과도, 친구들을 만날 때도 틈만 나면 '내가 잠옷 만들면~' 가정법으로 즐겨 이야기했다. 어떤 무늬로 만들지. 어떤 천을 쓰지. 단추는 무슨 색이 좋을까? 어떤 식으로 팔면 좋을까? 채널은 어떤 곳이 있을까?


다시 무언갈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생각에 정신없이 배우고 신나게 계획했다. 그렇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매일 하루씩 쌓이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하려고 생각하니 모든 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떤 일을 시도할 때는 과정이 대략적으로라도 그려지고 하나씩 지워가는 기분으로 해야 하는데, 어느 순간 무섭고 손에 잡히지 않아서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보이지 않는 수평선처럼 너무 까마득해 보이는 게 문제였다.


할 수 없이 나는 다시 매일 빈둥거리는 삶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퇴사 초반의 쉼과는 달랐다.


정확한 목표가 있었고, 그걸 하겠다고 만천하에 알렸고,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도 다 알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 나만 움직이면 되는 거였다. 그렇지만 마비가 된 것처럼 발이 안 떨어졌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내가 너무 싫었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마음먹으면 뭐든 만들어내는 사람인데. 부끄러웠다.


자기 전이 제일 고역이었다. 시간은 자꾸 가는데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 하루에 부끄러웠다. 그렇게 나를 신나게 했던 목표들이 이제는 내 숨을 조여 왔다. 마음에서는 나에 대한 미움이 스멀스멀 커져만 갔다.


어느 날, 평소처럼 혼자서 TV를 보는데 눈물이 났다.


나는 누구지?











+60 days

32년간 몰랐던 나의 장애, ADHD


 

쉬면서 가장 즐겨보던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오은영 박사님이 진행하는 육아 코칭 프로그램 <금쪽같은 내 새끼>가 바로 그것.


원래 육아나 교육에 관심이 많았지만 다른 프로와 좀 다른 점이 있었다. 문제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진단하고, 아이의 탓이나 실패로 보는 게 아니라 부모의 노력으로 충분히 좋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집중한다. 그를 통해 아이의 삶을 바꾸고 나아가 가족의 삶을 바꾸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점이 참 좋다.


그날은 ADHD(과잉행동주의력결핍장애)를 가진 아이가 주인공이었다. 사실 나는 한 번도 ADHD를 자세히 공부한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ADHD가 어떤 장애이며 실제로 어떤 증상을 보이는지를 알게 되었다.


충격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ADHD는 편견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됐다. ADHD는 엄청나게 부산스럽거나 시끄럽고 규범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아니었다. 그저 타고난 뇌기능의 장애로 자기 조절과 억제가 남들보다 어려운 것뿐. 단순히 방해가 될 수 있는 자극에 예민해 쉽게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반대로 억제가 어렵기에 강한 자극을 주는 행동은 그만두기 어려워하는거였다.

 

근데 이상했다. 그 아이의 행동들이 똑같진 않았지만 내 어린 시절을 계속 떠올리게 만들었다. 엄마한테 지겹게 혼나던 이유도 비슷했다. 오 박사님이 제시한 ADHD 증상 체크리스트는 확신을 더 해주었다.



 내가? ADHD라고?



이 나이에 장애를 발견할 거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다음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제일 익숙한 인터넷 검색으로 아동 ADHD를 조기에 발견해서 치료하지 못하고 성장하면 성인이 되어서야 ADHD를 발견할 수 있다는 내용을 알게 됐다.


특히 주어진 환경과 상황이 바뀌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ADHD 증상이 더 심해질 수 있으며, 반대로 잘하지 못하는 부분을 채워주는 가족, 친구, 동료와 같은 조력자가 있거나 환경에 익숙해지면 증상은 알아채지 못할 만큼 좋아지기도 한다는 점이 중요한 부분이었다.


따라서 일하는 사람에서 백수로 바뀐 변화된 환경 때문에 티가 나지 않던 ADHD 증상이 심화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나 답지 않은 나를 만들어냈고, 참을 수 없이 미워했던 것이다.



그때 마음속 어딘가에서 왠지 모를 안도감이 피어났다.


내가 게으르고 부족해서, 못난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닐 수도 있는 거지?












+90 days

나는 정신과를 다닌다



ADHD는 치료방법이 없다. 정신적인 문제도, 호르몬의 문제도 아니다. 그저 타고난 뇌 기능이 일반적인 뇌에 비해 부족한 거라 이렇게 태어난 이상 ADHD라는 장애와 함께 살아야 한다.

가장 효과적이고 유일하다 싶을 만한 치료법은 콘서타라는 각성제를 매일 혹은 필요할 때 섭취하는 것뿐이다. 내겐 만병통치약 같은 그 약을 처방받으려면 정신과 진단이 필요했다.


정신과를 다닌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내겐 무엇보다 절실한 곳이었다.


첫째로 내가 진짜 ADHD 환자인지 알아야 하고, 두 번째로는 그 약이 해결책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먹고 싶고, 마지막으로는 평생 미해결 과제였던 마음의 결핍과 불편들이 모두 ADHD를 몰랐기에 이해받지 못했던 탓인지 궁금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결혼한 몸이기에 꼭 공유해야 할 사람이 있었다.


남편.


사실 남편은 정말 개방적인 사람이다. 어떤 일에도 감정적인 대응을 잘하지 않고, 문제 해결 중심으로 사고하기에 큰 여파가 올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내가 정말 ADHD라면? 정신과를 다녀야 하는 환자가 와이프라면?
싫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결혼이 후회스럽지 않을까?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을까?



두려웠지만 나는 너무 절실했고, 가진 건 당신뿐이기에 용기를 내야 했다.

그리고 입을 뗐다.



오빠 나 정신과를 가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편은 내 이야기를 듣고 세 가지 행동을 했다 (마치 로봇처럼ㅎㅎ)


- 놀람 : "ADHD는 아닐 거 같은데. 그랬으면 데이나가 일하는 것처럼 일 못해."

- 위로 : "모든 사람이 문제가 있는데 가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해. 걱정 마."

- 문제 해결 : 정신과 전문의 친구에게 곧바로 병원을 추천받아 내게 알려줌



그렇게 남편의 응원과 지지를 받으며 정신과를 다니기 시작했고, 긴 검사 끝에 ADHD일 가능성이 높다는 진단을 받았다.


지적 능력이 높은 편이라(다행?) 오히려 본인이 원하는 바를 따라오지 못하는 자신에게 같은 장애의 환자들보다 불편감을 많이 느꼈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기에 지금도 직접 정신과를 찾아온거라 보인다고.


지금은 약물 치료를 통해 무척 만족스러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모습. 내 일을 잘 해내는 나로 돌아갈 수 있게 됐고, 사실 집중이 훨씬 잘 되다 보니 예전보다 좋은 퍼포먼스를 내는 것도 정말 행복하다.



다만, 사실 이 이야기를 공개하기까지 많은 고민이 됐다.

나는 ADHD예요.라고 밝히는 것 자체가 "앞으로도 내게 완벽을 기대하긴 어려울 거예요."라고 알리는 것과 같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절대적인 가치와 개념은 머릿속에 존재할 뿐. 실제 세상은 불완전하고 비정형적이며 완벽하지 않다. 모든 인간도 세상을 닮게 태어났다. 그중에서도 나는 조금 다른 형태로 불완전할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난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에게 내가 ADHD였음을 알리는 자리가 있었다. 내가 '당신과 일하면서 이런 점에서 내 부족함을 느꼈었다. 지금에 와서는 평생 가져가야 할 장애이니 이해할 수 있지만 그때는 더 잘하고 싶어서 끙끙 대기도 했다.'라고 말했을 때 오히려 동료는 화들짝 놀랬다.


전혀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다고. 본인이 인지하지도 못한 걸 왜 부족이라고 생각했냐고. 알고보니 그저 내가 세운 완벽의 잣대에 비교하며 나를 괴롭혔던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반대로 ADHD는 장점도 많다. 내가 사랑하는 내 모습도 ADHD 특성 중 많은 부분에 해당한다. 내가 이렇게 창의적이고 진취적이고 색깔이 많은 사람이 된 것도 모두 ADHD 덕분이다. 특히 배우고 싶은게 많은 내 장점은 ADHD 진단 이후 내 삶을 다시 만들어나가는데 큰 도움이 됐다.


국내에 있는 성인ADHD라는 책은 모두 읽고, 전문서적을 통해 인지행동치료를 배워가며 삶의 계획을 세웠다. 심리치료 및 정신분석에 대해서도 전공하는 사람처럼 책을 읽어댔다.


덕분에 이제는 일요일에 한 주를 미리 계획하고, 규칙적으로 살며, 지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잊지 않도록 바로 처리한다.


정말로. 믿기지 않을만큼 더 나은 내가 됐다.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다음 주 2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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