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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컬러코드 Jul 24. 2024

21세기 창조적 인재의 롤모델
앤디워홀 이야기

아서 단토 지음 | 박선령 옮김 | 이혜경 엮음 | 박영심 디자인씽커

[ 출처 :  그림닷컴(앤디워홀) ]


일상과 예술과 상업 사이의 경계를 허문 앤디 워홀의 창조적 인생

20세기를 살다 간 워홀은 21세기가 원하는 창조적 인재의 원형이었다.


평범한 것을 예술로 만든 사람

앤디 워홀의 작품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교과서에도 나오고, 그의 그림을 프린트한 티셔츠를 입기도 합니다. 얼마 전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에서 MC몽이 앞면에는 워홀의 이름이 씌어 있고 뒷면에는 워홀의 바나나 그림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만큼 그의 그림은 알게 모르게 우리와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의 이름은 많이 알려져 있는데 비해 그가 왜 그토록 유명한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그런 의문이 더 커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들은 일반적으로 '예술'이라고 얘기되는 명화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그림들이니까요. 앤디워홀의 작품은 다수 사람들의 머릿속에 정해져 있는 예술의 이름값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림들이 많습니다.


나는 평범한 것들을 좋아한다 
.

앤디 워홀을 왜 '팝아트 pop art'의 제왕으로 부르는지, 그의 작품들이 왜 그렇게 고가에 팔리고 있는지(물론 고가에 거래된다고 해서 예술적 가치가 그만큼 높아지는 것만은 아니지만)에 대한 대답은 바로 이런 질문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앤디 워홀 위 작품들은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술이나 명화와는 다릅니다. 그것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일까?' 워홀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사람들이 회화라고 인정하던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소재 선별에서부터 작품 제작 과정까지 그는 완전히 다른 것을 그렸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아주 특별하고 대단한 것을 추구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가 목표로 하고 추구한 것은 '새로움'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예술에 대한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깨트렸습니다. 그가 거장으로 불러지고 사람들로 부터 사랑받는 이유는 바로 그 모든 평범한 것들을 예술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손을 거치면 아주 흔해 빠진 것도 예술이 되었으니까요. 누구나 마시는 코카콜라가 예술 작품이 될 수 있게 만든 앤디 워홀. 그로 인해서 예술의 영역은 확장되었고,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들 역시 다양해졌습니다.



21세기가 원하는 창조적 인재의 롤모델

워홀에 대해서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상업예술가로 살았던 사람'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그는 순수 예술가이자 상업 예술가였으며,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담벼락을 와락 허물어버린 사람입니다. 

그가 순수예술을 했느냐 상업예술을 했느냐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1928년에 태어나 1987년까지 20세기의 시간대를 살다 갔지만 그의 모든 것은 21세기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앤디워홀은

예술은 당신이 벗어날 수 있는 다른 세상이다
.

라는 어록을 남겼지만, 그를 단지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묶어두고 멀찌감치 바라보기엔 뭔가 허전합니다. 왜냐하면 그른 21세기가 가장 원하는 인재형이기 때문이지요. 안철수 카이스트 석좌교수가 자주 말하는 'T자형 인재'와 'A자형 인재'가 잘 결합된 모습을 앤디 워홀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T자형 인재는 다양성을 갖춘 인재를 말하며, A자형 인재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A자형 인재는 전공 분야에 대한 깊은 지식, 다양한 분야에 대한 넓은 상식,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조화롭게 골고루 갖춘 인재를 말합니다.

21세기를 움직이는 가장 핵심적인 가치가 '다양성'과 '컨버전스(Convergence-여러 기술이나 성능이 하나로 융합되거나 합쳐지는 일)'라면, 워홀의 세계는 그 두 가지가 온전히 살아 움직이는 세계라고 할 수 있지요.


그는 혼자 작업을 하는 다른 예술가들과는 완전히 차별화 된 세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팩토리(공장)'라 이름 붙힌 작업실이 있습니다.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싶었던 워홀은 팩토리를 통해 그림뿐만 아니라 영화와 비디오 작업 등 다양한 작품들을 생산해내면서 스스로를 '예술공장 공장장'으로 불렀지요. 그러면서 혼자 머리를 쥐어 뜯으며 생산해낸 창작물만 예술로 평가하던 시대의 통념을 순식간에 비틀어버렸습니다. 


앤디 워홀이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는 사실 '창의성'에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발상의 전환을 추구했던 사람이지요. 물론 창의성이란 예술가들에게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예술이라는 행위 자체가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앤디 워홀의 경우는 예술을 행하는 방법에 창의성을 발휘한게 아니라 예술 자체에 창의적인 시각을 투과함으로써 예술의 세계를 확대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이 바로 앤디 워홀을 21세기가 원하는 창조적 인재의 롤모델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워홀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워홀은 예술과 일상 사이에 선을 긋는 것을 가장 재미없어 했지요. 그가 가장 원했던 것은 예술과 일상의 구분을 없애는 것이었고, 우리 삶 속에 예술을 끌어오고 예술의 세계에 삶을 내려다 놓는 것이었어요.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요. 기존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의 틀을 늘 깨트려야 하는 수고로움과, 끊임업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에너지가 받쳐줘야만 가능한 일이니까요.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고 죽은 후에 거장이 된 사람들에겐 순수한 존경심을 표시할 수 있지만, 워홀처럼 당대에 크게 인정을 받은 거장의 인생에 대해서는 때론 존경심보다 질투가 먼저 생길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한 거야?
.

'창조성'이라는 우주의 선물을 한꺼번에 받아버린 것에 대한 질투심이지요. 그러나 거장의 인생은 그만큼의 질투 못지않게 우리를 설레게도 합니다. 거장의 조건은 새로움에 대한 도전에서 시작됩니다. 즉, 창의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 앞의 모든 안정됨을 뛰어넘어 불안정한 세계로 전진하고 새로운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지금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젊은이들이 도전을 원하지 않기에, 인류는 더 이상 거장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워홀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따로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작품을 보는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다 알 수 있으니까요. 예술 작품과 쉽게 소통하게 되면 우리 자신도 예술적으로 승화된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술이란 특별한 사람들만의 것이라는 기존의 경계를 뛰어 넘어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많은이들에게 예술의 세계의 문을 활짝 열어준 워홀을 우리는 기꺼이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 출처 :  그림닷컴(앤디워홀) ]

이혜경(<동아일보> 신춘문예 푸린의 작가, 미술애호가) 편집자주의 프롤로그 중에서 요약



| 박영심 디자인씽커 |
예술은 무엇인가? 디자인은 무엇인가?
그 경계에서 예술보다는 디자인을 선택하여 "마케팅"을 작품에 도입한 천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당연히 변해야한다고 생각했고, 생각을 정리하며 바로바로 행동에 옮긴 행동파이다.
직업을 보면 꼭 레오나르도다빈치가 들린다. 많은 역량을 발휘한 감각적인 디자이너로써
물건을 잘 팔기위한 첫 단계의 모범을 잘 보여준 상업디자인전략가라고 말 할 수 있겠다.
지금처럼 산업도 급변하고 Ai가 없어서는 안될 것 같은 세상에, 남들과 다른 어떤 것을 나의 무기로
서서히 준비할 수 있는 용기가 지금 시대에 꼭 필요한 육각형인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은 팝아트를 대표하는 멀티 아티스트이다. 도발적인 주제와 혁신적인 제작기법, 파격적인 언행으로 화제의 중심에 섰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디자이너, 사진가이자 영화 제작자였다. 그는 슬로바키아 출신 이민자가정에서 태어나 카네기멜론 대학교에서 산업 디자인을 전공한 후 뉴욕으로 이주해 화가, 아방가르드 영화, 레코드 프로듀서, 작가 등 전방위 활동으로 세계적 명성을 쌓으며 동시대 최고의 유명인이 됐다. 1952년 드로잉 15작품으로 개인전을 연 것을 시작으로 1956년 뉴욕 MoMA에서의 그룹전 등을 통해 재스퍼 존스, 로버트 라우센버그, 키스 해링, 장 미쉘 바스키아 등 작가들과 활발히 교류했고, 정치인이나 헐리우드 스타, 거대 도시 문명 속 기물들을 소재로 대중화된 문화의 가치와 의미를 직관하도록 예술품의 대량생산에 앞섰다. 강렬한 색상과 명도의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제작한 (100개의 캠벨 수프캔), (1달러 지폐 200장), (금빛 마릴린 먼로) 등 극명한 현대의 이미지를 포착한 작품들은 이후 다른 작가들의 오마주로도 유명하다. '공장(The Factory)'이라는 작업실에서 사람들을 고용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고 (팝피즘 : 앤디 워홀의 60년대)와 (앤디 워홀의 철학)을 쓰며 작가로도 활동해 1970년 비틀즈와 함께 라이프 지가 선정한 1960년대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에 뽑히기도 했다. 그는 예술사조와 상관없이 풍요로운 현대 사회를 대변하는 명쾌한 예술가의 성공사례가 되었다. “모든 것은 스스로를 반복한다. 모든 것은 반복일 뿐인데, 사람들이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놀랍다.” 앱솔루트 보드카, 캠벨 수프, 브릴로 박스, 마릴린 먼로. 이것들은 세상에 단 한 점만 존재하는 명화가 아니다. 앤디 워홀은 일상에 흔하게 널린 것들을 자신만의 ‘팩토리’ 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며 예술의 대량 생산을 가동했다. 스스로를 ‘세상의 거울’이라 칭하며 거울에 비친 세상을 찍어내는 기계가 되고자 한 것이다. 그는 작품 세계의 확장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고, 끝내 미술의 전통적인 가치와 ‘작품의 희소성’이라는 개념을 전복시켰다. ‘어떠한 것’ 도 예술로 만들 수 있는 기회의 장을 제공한 것이다.[ 출처 :  그림닷컴(앤디워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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