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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컬러코드 Jul 26. 2024

패션을 꿈꾸는 세계 젊은이의 롤모델 프라다 이야기

잔 루이지 파라키니 지음 | 김현주 옮김 | 박영심 디자인씽커

명품 신화의 주인공, 미우치아 프라다의 창조적 인생

미우치아 프라다


정치학도 출신의 비전공자 디자이너 미우치아는 패션업계에 진출한 정치학도이며 상식을 뛰어넘은 과감한 시도를 하였다. 특히나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그 시대에는 최고급 가죽으로 만든 가방만이 명품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하지만 미우치아의 생각은 달랐고 아버지가 가죽을 포장하는 낙하산 천으로 가방을 만들었다. 아무도 패션 소재로 사용하지 않았지만 결국 사람들은 서서히 프라다 가방(일명 방수천가방)의 매력에 빠져들어 성공할 수 있었다. 이미 한국인인 나도 예전에 사용해 봤으니 말이다.



가슴속에 이상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1960년대에는 정치에 관심도 많고 세상을 바꾸고 싶은 젊은이도 많았다. 그 시절에는 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의 많은 젊은이는 돈과 권위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을 혐오하였으며 휴머니즘이 있는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나고 보니 그 시절 우리의 생각은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이상이었지만 사람이 살면서 그렇듯 이상을 품은 시절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은 그 인생에 젊음이 없었다는 뜻이리라. 그것이 좌절이든 실패든 결과에 상관없이 그러한 경험은 이후 인생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지표가 된다. 어디에 놓이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정확히 알 수 있을 테니까요.


학생 시절 미우치아는 중산층 출신으로 공산당원이자 '이탈리아 여성 연맹'의 회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사회문제에 적극적이었다. 밀라노 대학 정치학과에 들어가  가슴에 정치적 이상을 품은 젊은이가 분명했지만 다른 학생들과 다른 점은 옷을 매우 좋아했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시위대에 참여할 때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의 옷을 입고 나가 기자들에게 포착되어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집안의 영향과 옷을 좋아하던 자신의 성향이 맞물려 패션계로 진출하게 되었는데 고급 가죽 제품 사업을 하던 외할아버지가 '프라다'의 간판을 처음 걸었고 가업을 물려받는 방식이었지만 파산직전의 매장으로 사정은 좋지 않았다. 그리고 30여 년. 미우치아 프라다는 이탈리아를 넘어 세계 패션계의 거물이 되었습니다.



악마는 왜  '프다다'를 입었을까?

패션 업계에 진출한 정치학도 출신의 비전공자 디자이너 미우치아는 상식을 뛰어넘은 과감한 시도를 했다.

가벼운 낙하산 소재의 가방은 정장은 물론 캐주얼에도 잘 어울려 전 세계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결국,

고정관념을 깨고 과감하게 뒤집어보고 새로움을 창조해 내는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지금 디자인 비전공자로서 준비하는 어려움이 있는가? 이런 롤모델 이야기를 잘 들어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다시 생각해 보면 좋겠다. 물론 나의 환경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빨리 찾아야 할 것이다.


미우치아의 도전은 의류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그 당시 유행한 옷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이 대세였고 남들보다 돋보이도록 예쁘고 날씬해 보이기 위해 허리를 졸라매고 가슴을 과장되게 부풀리는 등의 매우 불편한 옷이 유행이었다. 그 트렌드 대세에 반기를 들고 자신을 표현하기 위함이고 편하기 위해 입는 옷이라는 관점에서 여성성에 대한 아름다움을 보여줘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났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를 선보인다. "저는 프라다를 입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저는 지성이 있고 자의식이 강한 여자지만 섹시하기도 하지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현상을 만들어냈다. 세련되고 편안한 옷에 '프라다 인'이라는 마니아층까지 생길 정도로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미국에서 발행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패션 잡지 <보드>의 편집장 애나 윈투어를 모델로 한 것이라는 사실은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다. 유난히 프라다에 집착한 이유는 여성의 자의식과 쿨한 매력을 은근히 반영하기 때문이었다.


파트리치오 베르텔리(남편)와 미우치아 프라다

진정한 창조력은 휴머니즘적 가치에서

이제 미우치아는 패션계의 거장이 되었지만 그동안 디자인 전공자가 아니라는 열등의식 때문에 자신의 직업적 정체성을 찾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흔들리지 않고 정상에 오르게 된 것은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젊은 날의 이상을 패션에 접목하고 싶은 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죠. 

결국 열등의식이 긍정적으로 자리 잡아 꿈을 이루게 해 준 매우 이상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비전공자이기 때문에 객관화시켜 꾸준한 도전정신과 다름의 행동으로 '휴머니즘적 가치'를 실천한 결과라고 할 수 있어요.


할아버지 마리오 프라다가 만들어놓은 가죽용품 매장 프라다 가게를 아들들에게 물려주었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과 명품브랜드의 대거 등장으로 위기에 빠졌지만 두 딸(지금 미우치아의 어머니)이 가업을 물려받았고, 프다다를 고급 브랜드로 성장시킨 큰 공은 손녀인 미우치아 프라다이다.


결국, 명품도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4대에 걸쳐 연구되고 개발되고 콘셉트를 잡아나가는데 100년 이상의 세월이 있기에 우리는 그 시간을 구매하는 것이다. 명품만 좋아한다고 명품족을 폄하하는 사람들이 간 혹 있다. 

그 브랜드가 명품이기 때문에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100년 이상된 제품의 가치를 구매하는 구매자의 문화성, 예술성 등을 인정하고 이해해 줘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그냥 비싼 것이 아니라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이후 '국제 가죽 박람회' 장에서 자신의 가방을 카피해서 판매하는 뻔뻔한 청년과 손을 잡게 되면서 연인관계로 발전하고 결혼하게 된다. 미우치아는 디자인을 파트리지오 베르텔리는 경영을 책임지고 지금까지 명품브랜드의 입지를 잘 지켜오고 있다.


또 다른 패션 브랜드 'MIU MIU'가 프라다 계열사라는 걸 알고 있었는가? 할아버지 마리오 프라다가 손녀를 부른 애칭 '미우미우'가 프라다보다는 조금 저렴한 가격대로 젊은 여성을 타깃으로 한 세컨드 브랜드를 탄생시켰다.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인공들의 옷을 미우미우에서 제작하여 더 유명해진 계기가 되었다.



| 박영심 디자인씽커 |
디자인 전공이 아니라고 해서 디자인을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지금은 누구나 디자인을 하는 시대이고
이미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부분에서 더 큰 매리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트워킹'(아름답게 제작만 하는 디자인)에서 '디자인을 프로세스로 활용' 하거나 '디자인을 도구로 활용'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디자이너들이 하는 일은 예전에 다루지 못했던 툴을 다루면서 예쁘게만 만들어주는 디자인에서 발전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디자인을 하고  프로젝트에서 '디자인 씽킹'은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비전공자로써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큰 무기이다.
비전을 가지고 남들과 다른 생각으로 그 생각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늘 생각하라.
그러면 길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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