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 for All
디자인은 언제나 누군가의 불편함에서 출발한다.
도시를 바꾸는 건 거대한 예산이나 설계가 아니라, 한 사람의 불편함을 누군가가 진심으로 들어주는 순간이다. 그 불편함이 작든 크든, 한 사람의 삶을 바꾸려는 시도는 결국 세상을 바꾸는 씨앗이 된다. 그것을 바꾸려는 마음 하나가 결국 세상을 움직인다. 이제 그 무대는 도시를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유엔(UN)은 ‘불편함을 해결하는 디자인’을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로 명확히 제시했다.
(SDGs에 대해서 궁금하시다면 아래 글을 참고해 주세요^^)
이 말은 곧 ‘모두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All)’ 과 같은 의미다.
모두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All)
아프리카 케냐의 한 마을에서는 매일 새벽, 아이들이 수 킬로미터 떨어진 강으로 물을 길어 갔다. 깨끗한 물은 생존의 문제였고, 교육보다 우선해야 하는 노동이었다. 한 디자이너가 그 불편함을 바꾸기 위해 하마 물통, 일명 ‘힙포 워터 롤러(Hippo Water Roller)’라는 발명품을 만들었다. 큰 플라스틱 원통에 손잡이를 달아, 아이들이 물통을 굴리며 이동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무거운 물통을 머리에 이지 않아도 되고, 한 번에 다섯 배의 물을 옮길 수 있었다. 이 단순한 발명 하나로 아이들은 학교에 더 오래 머물 수 있었고, 어른들은 물을 나르는 대신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디자인이 물리적 고통을 덜고, 교육의 기회를 만든 것이다.
유엔(UN)의 지속가능발전목표 SDG(SDGs)로 볼 때, SDGs 6 깨끗한 물과 위생을 위한 디자인에 해당되는 예시라고 볼 수 있다.
그 흐름 속에서 20세기 후반 소셜디자이너 빅터 파파넥은 이런 말을 남겼다.
디자인은 단지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어야 한다.
- 빅터 파파넥(Victor Papanek) -
파파넥은 화려한 광고나 제품이 아니라, 세상의 불편함을 해결하는 사회적 디자인을 강조했다. 그에게 디자인은 산업이 아니라 책임이었다. 그가 1970년대에 제시한 생각은, 오늘날 시민이 제안서를 내고, 리빙랩에서 직접 문제를 실험하는 참여디자인의 근원이 되었다. 즉, 지금 우리가 말하는 “시민이 만드는 도시”는 파파넥이 말한 “모두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the Real World)”의 현대적 실천이자, 그의 정신을 이어가는 생활의 실험실인 셈이다.
인도 서부 라자스탄의 한 마을. 기온은 섭씨 45도를 넘고, 학교는 그림자조차 없는 평지에 세워져 있었다. 전기가 끊기면 수업도 멈췄다. 학생들은 너무 더워서 책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때, 한 건축가가 ‘바람과 햇빛만으로 시원해지는 학교’, 즉, 자연 환기형 교실 디자인을 제안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자연 체험 학교가 된 것이다. 교실의 지붕을 높게 만들고, 천장에 바람 통로를 낸 구조였다. 햇빛은 들어오되, 열은 빠져나가게 했다. 벽은 지역의 점토 벽돌로 지어져 낮에는 열을 흡수하고 밤엔 서늘함을 유지했다. 이 학교는 단지 건물이 아니라, 기후를 이해하고 사람을 존중한 디자인의 교과서가 되었다. 더운 나라의 불편함이 ‘지속가능한 건축’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한 것이다.
유엔(UN)의 지속가능발전목표 SDG(SDGs)로 볼 때, SDGs 4 모두를 위한 양질의 교육에 해당되는 예시라고 볼 수 있다.
건축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일어날 삶을 상상하는 일이다.
- 루이스 칸 -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는 빈민가 지역의 아이들이 밤마다 모이는 작은 광장이 있다. 그곳 사람들에게 무엇이 제일 불편하냐고 물었더니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빈민가인데도 불구하고 배고픔이라던지 돈이 부족하다는 말이 아니었다. 즐길 수 있는 장소가 마땅히 없다는 것이었다.
발견했다. 그곳에는 극장이 없다. 아이디어를 내었다. 한 벽면이 ‘이동식 영화관(The Solar Cinema)’ 으로 변한다. 태양광으로 충전한 프로젝터와 배터리를 싣고 디자이너들이 매일 밤 마을을 찾아다닌다. 하얀 천 한 장이 스크린이 되고, 사람들은 거리에 앉아 영화를 본다. 그 밤의 공기는 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영화는 문화가 아닌, 디자인이 만든 ‘함께 있음의 장치’가 된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전기가 없는 지역에서도 예술과 문화에 접근할 권리를 디자인으로 보장한 사례다.
SDG 11, “모두를 위한 지속가능한 도시와 공동체”를 실현한 장면이기도 하다.
방글라데시의 농촌에서는 정전이 잦고, 아이들은 밤에 공부할 수 없었다. 그 불편함에서 탄생한 것이 ‘솔라 램프(Solar Lamp)’ 다. 이 램프는 낮 동안 태양 에너지를 저장해 밤에는 빛을 낸다. 불안정한 전기 대신 태양의 힘을 사용하는 ‘에너지 자립형 디자인’이다. 이 아이디어는 학교와 마을을 넘어, 세계 여러 NGO와 협력해 ‘태양으로 공부하는 아이들(Solar Study Program)’ 로 확산됐다. 불편함이 기술이 되고, 기술이 교육과 자립을 이끄는 변화의 선순환이 된 것이다. SDG 7 & 13 기후와 에너지를 위한 디자인의 아이디어로 미래의 꿈나무들이 자란다.
나이지리아의 한 지역에서는 농작물이 늘 풍년과 흉년 사이를 오갔다. 언젠가 수확한 채소가 금세 썩어버렸다. 냉장고도, 전기도 없었다. 디자이너들은 “기술이 아니라 습관을 바꿀 수 있는 디자인”을 고민했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쿨 포트(Cool Storage Pot)’. 이 단순한 구조로 식재료는 며칠이 아니라 몇 주 동안 보관이 가능해졌다. 전기 없는 냉장고, 그 발명은 한 세대의 기아를 줄였다. 두 개의 항아리 사이에 젖은 모래를 넣고, 증발하는 수분의 냉기를 이용해 식재료를 보관하는 방식이다. 이 단순한 구조는 수천 가정의 식량을 지켰고, 버려지는 음식의 양을 절반으로 줄였다. ‘기아를 줄이는 디자인’ 그 말은 거창한 기술이 아니라, 불편함을 이해한 관찰의 결과였다.
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 같은 결론으로 모인다. 디자인은 화려한 결과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질문의 과정이다. 고통의 현장에서 태어난 디자인, 그늘을 찾지 못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 어둠 속에서도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미소이다. 이 모든 장면은 우리에게 묻는다.
이런 이야기들은 멀리 있는 나라의 얘기 같지만, 사실 우리의 도시에도 같은 질문이 숨어 있다. 비 오는 날 미끄러운 인도, 노약자에게는 너무 높은 버스 계단, 밤길을 걷기 두려운 골목. 이 불편함들을 시민이 스스로 해결해 가는 생활 디자인이 지금 이 도시 곳곳에서 자라고 있다. 시민이 직접 참여한 치안 리빙랩(Shadow Guard Project)이 있다. 밤길이 어두워 불안하다는 의견에서 시작해, 골목길 바닥 타일에 반사 조명을 심었다. 그 빛은 사람의 발걸음을 따라 움직이며 “지금 당신은 안전합니다”라는 메시지를 건넨다.
서울에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촉각 신호 시스템이, 대구에서는 빈 공터를 주민 정원으로 바꾸는 디자인 캠프가 열렸다. 모두 거창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이건 좀 불편해요’라는 말에서 시작된 변화다.
불편함은 세상을 연결한다
케냐의 아이가 물을 굴리고, 인도의 교실이 바람으로 시원해지고, 남아프리카의 거리에 영화가 걸리고, 부산의 골목길이 반짝이듯이 모든 변화는 ‘불편함을 해결하려는 한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됐다. 그 마음이 도시를 만들고, 그 도시가 다시 사람을 바꾼다. 불편함에서 시작된 모든 디자인은 결국 사람을 향한 가장 오래된 배려의 언어다. 디자인은 문제를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게 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의 출발점은 언제나 같다.
“이건 좀 불편해요.”
“ 디자인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
그 답은 어쩌면 단순하다.
‘ 누군가의 불편함을 덜어주는 일 그 자체가 디자인의 시작이다.’
불편함은 세계 어디에서나 존재하지만, 그것을 디자인으로 해결하려는 마음은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서 같았다. 디자인은 결국 ‘살아가기 위한 지혜의 언어’다.
“이 길은 밤에 너무 어두워요.”
“유모차가 지나가기 힘들어요.”
“병원에서 길을 자꾸 잃어요.”
그 작은 목소리들은 종종 사소하게 들리지만, 도시를 조금씩 바꾸는 가장 강력한 신호가 된다.
한 번은 동네 주민이 구청 게시판에 메모를 남겼다.
“비가 올 때 버스정류장 그늘막이 너무 짧아요. 비를 피할 수가 없어요.”
그 메모 한 장은 행정의 눈에는 단순한 민원처럼 보였지만,
한 디자이너의 눈에는 문제 정의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시민과 함께 정류장에 섰다.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는 위치, 비가 들이치는 각도, 햇빛이 드는 시간대를 모두 기록했다.
그 순간, 불편함은 데이터가 되었고, 데이터는 공감으로 바뀌었다.
이런 이야기는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디자인의 역사는 언제나 사람을 위한 개선의 연속이었다. 고대 이집트의 장인들은 벽돌 한 장을 쌓을 때에도 사람이 더 편히 기대어 쉴 수 있는 각도를 연구했다. 그들은 건축 기술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오래 머물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디자인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이자 발명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회화보다 먼저 도시를 설계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스케치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깨끗하고 안전한 도시를 위한 구조도’였다.
그의 관심은 예술이 아니라 삶의 질서였다. 그 시대의 불편함의 혼잡한 거리, 오염된 하수, 비좁은 주거처럼 그 모든 문제를 다빈치는 디자인으로 해결하려 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는 도로의 폭, 창문의 위치, 물이 흐르는 방향, 심지어 도시의 조명과 환기 구조까지도 그가 남긴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사람이 건강하게 살기 위해 도시는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
하드웨어적인 부분도 뒷받침이 되어야 하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서비스와 행정이 디자인되어야 한다.
산업혁명 이후에는 ‘기계의 효율’보다 ‘사람의 안전과 존엄’을 고려한 디자인이 등장했다. 그 시기의 디자이너들은 기계의 모양보다 기계와 사람이 만나는 인터페이스를 고민했다. 버튼의 위치, 손잡이의 곡선, 의자의 높이, 이 모든 것은 ‘한 사람의 불편함’을 줄이기 위한 반복된 실험의 결과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많은 디자인이 지금 우리의 일상 속에서 당연한 것처럼 자리 잡았다. 우리가 하루에도 수십 번 누르는 스위치, 계단 옆의 난간, 공공화장실의 높이 조절 세면대, 모든 ‘당연함’이 과거의 불편함에서 비롯된 디자인의 흔적이다.
얼마 후, 정류장에는 작은 변화가 생겼다.
그늘막이 조금 더 길어졌고, 앉을 수 있는 벤치가 추가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디자인 개선’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저 “이제 편하네.”라고 말했다.
그 짧은 말 한마디 안에는 디자인의 본질이 숨어 있다.
불편함을 편안함으로 바꾸는 마음, 그것이 디자인이다.
디자인은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가 아니다.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오는 생활의 언어다.
그 언어는 전문가의 기술보다, 사람의 마음과 감각으로 쓰인다.
그래서 디자인은 보이지 않게, 그러나 확실하게 도시의 공기를 바꾼다.
도시는 여전히 완성되지 않았다.
불편함은 계속 생기고, 그 속에서 또 다른 디자인이 자란다.
그리고 그 과정의 출발점은 언제나 같다.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의견을 내야 한다.
아이디어 발상의 첫 시작점에서 학생들에게 물었다. 불편한 것이 있으면 말해보자고 했다. 묵묵부답이다.
별로 불편한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불만은 많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디자인은 문제를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게 하는 과정이다.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서로가 더 나은 환경에서 행복 해 질 수 있는지 함께 연구해야 한다.
계속 관찰해 보자. 불편한 부분이 어디인지,
말하는 상황조차 불편하면 안 된다.
자유롭게 그리고 말해보자.
“이건 좀 불편해요.”라고..
불편한 점이 있었다면 댓글 달아주세요^^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