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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으로 안전을 지키다

함께 바라보는 시선으로 만들어지는 도시

by 컬러코드


도시의 안전은 경계선만으로 가능할까?

“안전(safety)”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사고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도시, 기술, 기후, 사회 환경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안전은 ‘위험의 부재(absence of danger)’가 아니라, ‘신뢰와 회복의 상태(presence of resilience)’로 재정의되고 있다.


울타리나 경고문이 아니라, 사람이 머물고 싶어 하는 공간일 때 비로소 안전이 만들어진다. 디자인은 단지 ‘보이는 것’을 바꾸는 일이 아니다. 그 안에서 사람이 어떻게 움직이고, 무엇을 보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를 바꾸는 일이다. 안전은 그 감정의 연장선에서 자란다. 한때 안전은 “예방”의 언어로만 이야기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디자인은, 예방이 아니라 공감으로서의 안전, 즉 ‘사람이 안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그것이 바로 디자인으로 안전을 지키는 일이다.



사람 중심의 안전 디자인 패러다임

스웨덴은 1990년대 말, 기존의 교통안전 개념을 완전히 뒤흔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도입했다. 그 전환의 핵심은 단 하나였다.

“교통체계 속에서 사람이 죽거나 중상을 입는 것을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1997년 스웨덴 의회가 통과시킨 도로교통안전법(Road Traffic Safety Bill)을 통해 공식화되었다. (출처: Media Manager, Trafikverket 스웨덴 교통청) 이 법은 교통사고 사망자 수를 줄이는 목표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과 건강이 어떤 경제적 편익보다 우선한다”는 윤리적 철학을 제시했다.

그래서 차선이 좁아지고, 도심 속도는 낮아졌으며, 교차로 대신 충돌 위험이 적은 라운드어바웃이 도입됐다. 보행자에게는 중간 대피 공간(‘안전섬’)이 만들어지고, 도로는 차량이 아니라 사람의 ‘시야와 반응 시간’을 기준으로 설계되었다.


Vision Zero의 핵심원리는 ‘인간은 실수할 수 있다.’이다. 따라서 교통체계(도로, 차량, 운전자)는 그 실수를 받아낼 수 있어야 한다. 보행자·자전거 이용자·운전자 모두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설계 책임(Design Responsibility)은 시스템 설계자에게 있다. 속도, 시야, 물리적 보호장치 등은 운전자뿐 아니라 모든 이용자의 안전 허용치(tolerance)를 기준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실행전략에는 속도 제한 및 물리적 구조 변경으로 도심 주요 도로의 제한속도를 하향하고, 차로 폭을 좁히며 중앙분리대를 설치해 충돌 강도를 줄였다. 보행자·자전거 이용자 우선 설계를 하였다. 보행자 횡단로에 중앙섬을 설치하고, 대형 교차로 대신 라운드어바웃을 채택하여 ‘걷는 사람’의 시야와 동선을 우위에 두었다. 데이터 기반 위험지역 개선으로 사고 통계를 분석해 고위험 구역을 선제적으로 식별하고, 구조물 개선과 설계 변경을 통해 사망·중상 사고를 예방했다.

성과는 1997년 스웨덴의 교통사고 사망자는 연간 541명이었으나, 2019년에는 221명으로 감소했다. 특히 차량 통행량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수치가 줄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다만 일부 연구에서는 자전거 이용자나 보행약자의 안전 수준이 상대적으로 덜 개선되었다는 비판적 분석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Vision Zero는 ‘교통 = 기계적 문제’에서 ‘교통 = 사람 중심 설계 문제’로 전환한 가장 혁신적인 정책이자 디자인적 접근으로 평가받는다.


안전은 감시나 규제가 아니라, 사람이 머물고 이동하는 모든 공간을 ‘설계와 디자인의 문제’로 전환하는 태도다. 스톡홀름의 경험은 디자인이 보이지 않는 안전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후 네덜란드·노르웨이·캐나다·미국 등으로 확산되며 ‘사람 중심 도시디자인의 세계적 전환점’이 되었다.




미국 타임스퀘어 리디자인 프로젝트는 오래되었지만 '안전'이라는 키워드로 재해석할 수 있다. 2009년 봄, 뉴욕의 심장부 타임스퀘어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교차로 중 하나였다. 하루 40만 명이 이곳을 지나쳤고, 교통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혼잡과 소음, 매연, 신호위반 도시의 속도가 곧 경쟁력이라 믿던 시대였다. 그러나 뉴욕시 교통국(NYC DOT)은 전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자동차의 도시를 사람의 도시로 바꿀 수 있을까?”

그 중심에는 도시디자이너이자 당시 교통국장이던 자넷 사딕 칸(Janette Sadik-Khan)이 있었다. 그녀는 차량 흐름의 효율보다, 사람이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는 도시’를 꿈꿨다. 타임스퀘어 중앙 차선을 과감히 폐쇄하고, 보행자 전용 구역을 조성했다. 노란색 의자와 파란색 가드레일, 대형 화분이 놓였고, 도로 위는 갑자기 ‘거대한 휴식실’이 되었다. “공간을 빼앗는다”는 비판이 거셌지만, 시민들은 놀랍게도 그곳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공연을 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불과 6개월 만에 통계는 놀라웠다.

교통사고 40% 감소, 보행자 체류시간 두 배 증가, 소음 60% 감소, 상점 매출 71% 상승. “자동차가 줄었는데, 오히려 경제가 살아났다”는 분석이 뒤따랐다.(출처: NYC DOT Green Light for Midtown Report (2010), The Atlantic Cities, 2014)

타임스퀘어 거리조성 변경 전 > 후


그 뒤로 도시는 ‘속도’를 재정의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도시보다, 사람이 오래 머물 수 있는 도시가 더 안전하고 지속가능하다는 것.
타임스퀘어의 변화는 단순한 교통정책이 아니라, 도시를 ‘머무름의 심리’로 설계한 공공디자인 실험이었다.

2016년, 임시 설치물이었던 플라스틱 의자와 화분은 최종 리디자인을 통해 영구적 광장 공간(Time Square Plaza)으로 정착했다. 지금 그곳은 뉴욕 시민과 관광객이 함께 공연을 보고, 거리의 예술을 즐기며, 밤에도 “머무를 수 있는 안전”을 체감하는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안전은 두려움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머물 수 있게 하는 일이다
- 자넷 사딕 칸 (Janette Sadik-Khan), NYC DOT 국장 -

이 프로젝트는 이후 세계 여러 도시로 확산됐다. 런던의 옥스퍼드 서커스, 코펜하겐의 스트뢰에 거리, 서울의 세종대로 사람숲길, 부산의 중앙로 보행전용화 사업 등이 모두 타임스퀘어 리디자인의 철학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 철학의 핵심은 단순하다. “사람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순간, 도시도 안전해진다.” 도시의 안전은 울타리가 아니라, 머무를 수 있는 마음에서부터 만들어진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젠더 관점의 도시 디자인(Gendered Urban Design) ‘여성의 발걸음’을 따라 도시의 조명을 다시 켜면서 안전을 지키는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2021년, 바르셀로나 시청의 도시디자인국에는 한 장의 시민 메모가 도착했다.

“밤에 이 골목을 혼자 걸으면 너무 무서워요.”

짧은 문장이었지만, 도시를 바꿀 시작이었다. 바르셀로나 시는 이 메모를 ‘도시의 감정 데이터’로 보기 시작했다. 단순히 조도를 높이거나 CCTV를 늘리는 대신, 사람이 실제로 느끼는 불안의 구조를 디자인으로 분석하기로 했다. 그들은 여성, 노인, 청소년 등 1,200명의 시민에게 “당신이 가장 불안했던 길”을 직접 표시하게 했다. 그렇게 모인 데이터는 “지도 위의 어둠”처럼 드러났다. 안전은 조도의 세기가 아니라 ‘빛의 연속성’의 문제였다. 그래서 도시의 가로등은 다시 설계되었다. 골목의 끝까지 그림자가 끊기지 않게, 모퉁이의 벤치와 화단이 ‘시선이 닿는 거리’ 안에 들어오도록 조정됐다.

조명은 밝은 백색 대신 따뜻한 3,000K의 색온도로 변경되어, 공포 대신 ‘안심의 빛’을 만들었다. 또한 공공화장실, 버스정류장, 공원 입구의 위치 역시 ‘누군가에게 보이는가’라는 기준으로 재배치되었다. 시민이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감각을 느낄 때, 그것은 감시가 아니라 관심의 디자인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젠더 도시계획 담당관(Gender Mainstreaming Officer)’이라는 새로운 직책이 있었다. 건축가, 사회학자, 여성정책 전문가가 협업해 도시의 모든 요소를 ‘사용자의 시선’으로 검토했다. 그들은 “여성의 발걸음은 곧 도시의 리듬”이라 정의했다. 그 결과, 바르셀로나의 야간 보행 안전 체감도는 2년 만에 27% 상승했고, 도시조명 재설계는 공공안전과 사회적 신뢰의 회복 모델로 평가받았다. 2023년, 이 프로젝트는 유럽안전디자인어워드(ESDA)에서 ‘공공안전 혁신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안전은 힘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바라보는 시선으로 만들어진다
- 바르셀로나 시 도시디자인국 보고서(2023) -



캐나다 토론토에서는 세이프 트랜싯 허브(Safe Transit Hub) 공공교통을 ‘심리적으로 안전한 장소’로 리디자인하였다. 2022년, 팬데믹의 여파로 텅 빈 토론토의 지하철역에는 낯선 정적이 깔려 있었다. 사람들은 감염의 두려움보다 “불안한 시선”을 더 두려워했다. 환승 구역에서 혼자 대기하는 시간, 불 꺼진 통로를 지나가는 순간 이 도시는 교통이 아닌 감정의 안전을 잃고 있었다. 토론토시는 이러한 시민의 목소리를 모아 새로운 도시디자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름은 ‘세이프 트랜짓 허브(Safe Transit Hub)’

공공교통을 물리적 이동수단이 아닌 심리적 회복의 공간으로 재설계하는 시도였다. 도시디자이너, 행동심리학자, 조명 전문가, 색채 디자이너, 그리고 시민 자문단이 한 팀이 되어 ‘불안의 지형’을 그렸다. 그들은 수천 건의 인터뷰를 분석해, 사람들이 가장 불안함을 느끼는 요인이 범죄나 구조가 아닌 ‘시선의 단절(visual disconnection)’임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환승 공간의 설계 원칙은 단순했다.

“어디에 있든, 누군가의 시선이 닿아야 한다.”

플랫폼과 통로, 계단, 출구까지 모든 구간이 ‘시각적 연결성(Visual Connectivity)’으로 이어지게 했다.

조명은 기존의 강한 백색광 대신 밝은 청록과 웜화이트 계열을 사용해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 유리 벽면은 빛을 반사시켜 시야를 확장했고, 지하 공간의 천장은 투명 패널로 교체되어 낮처럼 느껴지는 환한 공간이 되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주목받은 요소는 ‘색의 언어’였다. 청록색은 ‘차분한 회복’을, 웜화이트는 ‘인간적인 온도’를 상징했다. 색은 단지 미적 장식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도시의 심리 신호가 되었다.

프로젝트 시행 1년 후, 범죄 발생률은 37% 감소했고, 이용자 만족도는 82%로 상승했다. 무엇보다 시민들이 남긴 한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이제 이곳은 기다리는 곳이 아니라, 숨을 고르는 곳이에요.”

토론토시는 이 실험을 “기술이 아닌 감성으로 설계한 안전”이라 명명했다. 조명, 색채, 구조, 심리 모두가
사람의 불안을 덜어내는 방향으로 조율된 결과였다. 이후 이 모델은 밴쿠버, 몬트리올, 시카고 등 북미 여러 도시로 확산되었고, 2024년 국제디자인연맹(IDA)에서 ‘공공디자인·사회안전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우리는 공간을 지킨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 Toronto Transit Design Office, 2023 -




사람이 서로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디자인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과거 한국의 안전정책은 ‘예방’과 ‘통제’ 중심이었다. 안전을 만드는 주체는 늘 행정이었고, 시민은 보호받는 객체였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도시의 감성·사회 구조·기후·디지털 변화가 겹치면서 안전은 더 이상 지시의 언어가 아니라 참여의 언어로 바뀌었다. ‘안전디자인’은 바로 그 전환의 언어다. 사고를 줄이는 대책에서 사람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감정의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단지 범죄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어둡고 낯선 골목의 감정적 단절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2013년부터 서울시는 기술 중심의 감시 대신 ‘공감 중심의 디자인’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 이름이 바로 CPTED(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 ‘환경을 통한 범죄예방디자인’이다.


디자이너들은 ‘불안의 지도’를 만들었다. 시민들과 함께 밤길을 걸으며, 어둡고 시야가 막히는 지점을 표시했다. 그리고 사람의 눈과 동선, 감정을 기준으로 골목을 다시 설계했다. 담벼락에는 화려한 벽화 대신, 사람이 다가서면 조도가 자동으로 높아지는 센서형 조명이 달렸다. 골목 입구에는 주민이 직접 만든 화분과 이름표가 걸렸다. “이 길은 누군가의 길이다”라는 표식이 생긴 것이다. 어두운 모퉁이에는 반사소재로 된 길안내판을 설치해 낯선 사람도 쉽게 방향을 찾을 수 있게 했다. 벽면은 따뜻한 색으로 칠해 ‘닫힌 공간’을 ‘열린 시선’으로 바꿨다. 이 변화는 시각적 장치 이상의 효과를 냈다. 밤길을 걷던 시민은 이제 누군가의 ‘시선이 닿는 거리’ 안에서 안심을 느꼈다.

밝아진 건 골목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 서울시 CPTED 추진보고서(2022) -


서울시는 그 의견을 반영해, 지역별로 다른 디자인 솔루션을 적용했다. 노원구의 ‘안심골목길’, 성동구의 ‘스마트 조명길’, 마포구의 ‘여성 귀갓길 리디자인’ 등이 그것이다. 이 CPTED 사업은 2022년까지 서울 전역 120여 곳에서 시행되었으며, 범죄율 평균 36% 감소, 체감 안전도 60% 향상이라는 결과를 남겼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시민이 “내가 사는 동네를 내가 지킨다”는 심리적 주인의식이었다. 서울의 CPTED는 더 이상 ‘감시의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보이는 환경’을 만드는 과정이다. 빛, 색, 시선, 표지, 이름 이 모든 디자인 요소가 결국 사람의 감정을 보호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제 서울의 골목은 단순히 범죄를 막는 공간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도시의 감정 네트워크가 되었다.


안전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서로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디자인이다
- 서울디자인재단 CPTED 리빙랩 리포트(2023) -


대구의 한 교차로, 하교 시간대마다 초등학생들이 건너는 횡단보도 앞에는 낯선 빛의 패턴이 깔려 있다. 바닥에는 LED 조명이 점등되고, 보행 신호가 바뀌면 진동이 울리며, AI 센서는 차량과 사람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감지한다. 겉으로 보면 최신 기술의 결정체다. 그러나 대구의 ‘스마트 횡단보도’의 핵심은 “기계의 속도에서 인간의 속도로”라는 철학이었다. 대구시는 교통사고의 40% 이상이 보행자, 특히 노인과 어린이가 횡단 중에 발생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은 기술적 결함보다, ‘내가 늦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설계자들은 신호의 알고리즘을 차량의 흐름이 아니라 사람의 반응 시간에 맞춰 재구성했다. 보행자가 횡단을 시작한 후, 센서가 움직임을 인식하면 신호가 조금 더 길게 유지되도록 설계했다. 노인의 걸음 속도, 어린이의 시야 높이, 시각장애인의 반응 패턴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횡단보도의 경계석은 미세하게 낮춰 휠체어와 유모차가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도록 했고, 발아래에는 ‘빛의 경로’가 깔렸다. 신호가 바뀔 때 LED 바닥선이 점멸하며 “지금은 건너지 마세요”를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야간에는 바닥 조명이 따뜻한 색으로 바뀌고, 주변 조명은 눈부심을 줄이기 위해 간접광 형태로 조정된다. 이 모든 요소는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있다.

“사람이 기술의 기준이 되는 횡단보도.”


휴대폰만 보며 걷는 사람들을 위한 횡단보도라는 말을 일반인들은 많이 한다. 이유야 어쨌든 결론은 좋다.

스마트 횡단보도가 설치된 이후, 해당 구역의 어린이 교통사고는 35% 감소했고, 보행자 신호 위반율은 45% 줄었다. 하지만 더 주목할 만한 변화는 보행자의 태도였다. 사람들은 횡단보도 앞에서 서두르지 않았다. 빛이 반응하고, 공간이 자신을 인식하고 있다는 신뢰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변화는 단순한 기술적 개선이 아니라 ‘안심의 경험’을 디자인으로 구현한 결과였다.


기술은 안전을 지시하지 않는다.
사람의 속도에 맞춰 설계될 때, 비로소 안전이 된다
- 대구 스마트시티 추진단 보고서(2023) -



부산 치안리빙랩, 참여의 가능성과 한계

올해 봄, 나는 부산 자치경찰위원회에서 주관한 ‘치안리빙랩 프로젝트’의 퍼실리테이터로 참여했다. 공고주제는 (지정주제) 청소년 범죄 예방방안, 고령운전자 교통사고 예방 대책 (자유주제) 생활안전, 사회적 약자 보호(아동・청소년・노인・여성・장애인 등) 교통안전 등 자치경찰사무 관련 지역사회 치안문제 개선 방안이었다. 우리 팀의 주제는 부산 동래구의 치안 문제였다. 팀이 선정되는 데에도 무려 22팀의 서류심사를 통해 9개의 팀이 선발되었고, 주제발표를 통하여 5팀이 선정되었다. 리빙랩은 시민이 직접 문제를 제안하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렇게 제안한 시민을 도와 팀을 이끌어나가는 역할이 퍼실리테이터이다.

동래는 부산에서 손꼽히는 학군 지역이자, 온천천을 따라 운동하기 좋은 도시환경을 가진 곳이다. 낮에는 평화롭고 활기차지만, 밤이 되면 풍경은 달라진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는 잘 정비되어 있지만, 재개발 지역 주변에는 빈집과 어두운 골목이 여전히 많다. “운동하기 좋은 도시”와 “위험한 밤길”이 공존하는 모순된 공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제를 이렇게 정했다.

“운동과 치안이 공존하는 도시 모델을 만들어보자.”

시민 참여 워크숍에서는 다양한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조깅 코스를 따라 설치된 스마트 반사조명, 야간 운동자를 위한 SOS 반응 조끼, 청년 자율방범대의 활동이 유난히 활발했으므로 인터뷰를 하고, 동네 운동 동선을 기록하는 치안 앱 프로토타입까지 아이디어는 활발했고, 시민들의 열정은 진심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중간평가에서 우리 팀은 탈락했다. 비록 치안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명확함이 보이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서비스와 정책을 디자인하는 시대에,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시대에 그 이유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결과를 받아들이며 나는 두 가지를 느꼈다.

첫째, 시각화되지 못했다는 이유. 디자인 결과물이 ‘제품화’되지 않으면 평가에서 밀린다는 현실.
둘째,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이유. 시민이 주체적으로 참여했음에도, 프로젝트가 일회성 공모로 끝나버린다는 구조적 한계. 전문가를 앞세워 경쟁하듯이 좋은 결과물을 얻으려는 이기심이 참가한 시민들에게 실망을 가져다줬다. 전문가로서 나도 첫 실패를 맛보았다. 지속가능하지 않은 지원사업을 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또 하나 추가되었다.


치안리빙랩은 시민참여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좋은 시도였지만, 그 가능성이 결과 중심 평가 시스템에서 무너졌다. 정작 중요한 것은 시민이 ‘함께 문제를 본 경험’인데, 그 과정의 가치는 점수로 환산되지 않았다. 특히 모두가 직장이 있는 구성원인데도 진행은 살벌했다.

“해보지도 않고 탈락시키는 시스템은, 시민의 열정을 시험으로 바꾸어버린다.”

사실 리빙랩의 진정한 목적은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함께 바라보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시민이 관찰자에서 참여자로, 참여자에서 실천가로 변하는 그 과정을 디자인하는 일이다.

이번 경험은 나에게 중요한 질문을 남겼다.
“참여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단순한 시제품이나 보고서가 아니라, 시민이 스스로 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구조 즉, ‘자생적 안전 생태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동래의 청년들이 운동을 하며 도시를 지키고, 그들의 데이터가 다음 정책으로 이어지는 구조. 청년들이 좋은 마음으로 자율방범대활동을 꾸준히 잘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부분에 대한 지원 및 활성화 부분에는 신경 쓰지 않는 구조. 이유는 보여주기식의 성과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단정 짓는 답이야말로 사회 구조를 절대 바꿀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치안 디자인’의 방향 아닐까.

이 프로젝트는 끝났지만, 그 실험이 남긴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자율방범대원들은 마음에 우러난 방범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이끌어갈 청년들에게 내가 미안할 정도이다. 자발적인 참여가 더 활발해지기를 응원해야지 권력남용의 테스트장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디자인은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 실패는 언제나 다음 실험을 위한 설계도이기 때문이다.

“진짜 안전은 완벽한 시스템이 아니라, 계속 시도할 수 있는 사회에서 자란다.”



조금 더 첨부하자면,

우리나라의 공공정책 구조는 여전히 ‘성과 중심 단기 지원 모델’에 머물러 있다. 시민 참여나 디자인 리빙랩 같은 프로젝트가 매년 공모 형식으로 운영되지만, 대부분의 사업이 1년 단위 예산 체계 안에서 평가되고 종료된다. 그 결과, 실험이 끝난 뒤에도 시민이 스스로 이어갈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구조(continuity structure)가 부족하다. 문제의 핵심은 예산의 ‘부족’보다 예산의 구조와 시점에 있다.

좋은 아이디어와 초기 실행이 인정받더라도, 이를 사회적 자산으로 확장할 후속 지원(maintenance funding) 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즉, ‘성과를 낸 팀’ 이다음 단계로 성장하기보다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매년 경쟁하는 구조 속에서 소모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시민참여형 디자인이 ‘시민 실험’에서 ‘시민 문화’로 전환될 시간을 확보하기 어렵다. 참여는 지속될 때 의미가 있고, 디자인은 시간이 쌓일 때 사회적 신뢰로 자리 잡는다.
그럼에도 현재의 정책 시스템은 이 “시간의 가치(time capital)”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원이 아니라, 지속성을 설계할 수 있는 행정의 유연성이다. 프로젝트의 완성보다 과정의 변화를 인정하고, 예산의 종료 시점이 아니라 시민의 성장 속도를 기준으로 평가할 때 리빙랩은 비로소 ‘정책 실험’이 아닌 ‘사회적 디자인 플랫폼’으로 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



안전을 위한 디자인은 단순히 ‘좋은 아이디어’를 시각화하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현실의 현장은 훨씬 더 복잡하다. 하나의 조명, 하나의 표지판, 하나의 벤치를 설치하기 위해서도 도로교통법, 소방법, 경찰청의 승인, 지자체의 행정 절차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골목길 조명 높이를 바꾸려면 도로 점용 허가와 교통안전기준을 동시에 충족해야 하고, 벽면 디자인을 수정하려면 소방 통행 확보 규정을 검토해야 한다. 심지어 조명 색상 하나에도 “교통신호 혼동 위험”이라는 이유로 경찰서와 협의를 거쳐야 한다. 디자이너의 의도는 시민의 마음을 밝히는 일이지만, 행정의 언어는 여전히 안전=규제, 디자인=장식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 사이에서 디자인은 자주 오해받고, 종종 지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조율의 과정은 디자인이 제도 안으로 들어오는 성장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많은 도시에서 경찰서, 교통공단, 구청, 시민단체, 디자이너가 함께 모여 하나의 프로젝트를 공동으로 검토한다. “안전을 위해 무엇을 금지할까”에서 “함께 어떻게 만들까”로 언어가 바뀌고 있다.

이 변화는 느리지만, 분명한 진전이다. 제도와 협의는 디자인의 속도를 늦추지만, 그 과정이야말로 도시의 신뢰를 구축하는 공공의 디자인 과정이다. 즉, 디자인은 설계 이전에 대화의 구조이며, 협의의 결과로 완성되는 사회적 합의체다.




한국 안전디자인의 시사점을 네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안전은 기술이 아니라 감정이다.”

조명, 색, 소리, 가구 같은 디자인 요소들이 사람의 불안을 ‘시각화’하고 ‘해소’하는 역할을 한다.

감성적 안정이 곧 사회적 안전으로 이어진다.


둘째, “안전은 참여로 완성된다.”

공공디자인의 중심은 전문가가 아니라 시민이다.

주민이 직접 제안하고, 수정하고, 유지할 때 안전은 정책이 아니라 생활의 문화로 남는다.


셋째, “안전은 복원력(Resilience)이다.”

재난이 없는 상태보다, 재난 이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만드는 것.

디자인은 이 복원력을 ‘형태와 관계의 언어’로 바꿔준다.


넷째, “안전은 관계의 설계다.”

범죄·환경·기술·감정이 분리되지 않는 시대에 디자인은 이들을 엮는 사회적 연결의 매개체가 된다.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고 배려할 수 있는 구조, 그것이 현대 도시가 지향해야 할 진짜 안전이다.



많은 해외사례를 봐도 이제 한국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

안전디자인은 규제와 통제의 시대를 지나, 참여와 공감의 단계로 진화하고 있다.

디자인은 눈에 보이는 방패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잇는 ‘보이지 않는 신뢰의 구조물’이다.
그리고 그 구조를 완성하는 것은 언제나, 도시를 함께 만드는 시민의 마음이다.



내가 안전하다고 느꼈던 공간이나 디자인, 다양한 경험이 있다면 댓글에 자유롭게 말해주세요^^






https://saportareport.com/janette-sadik-khan-change-street-change-world/columnists/maria_saporta/

https://www.c40.org/women4climate/resources/a-better-city-for-everyone-a-case-study-on-barcelonas-gender-ju stice-plan/

https://genderedcity.org/f/not-all-light-is-safe?blogcategory=Feminist+Innovation

https://www.simonsulyma.com/2024/04/keep-toronto-moving-subway.html

https://mediahub.seoul.go.kr/archives/2010060

https://www.kbsm.net/news/view.php?idx=341732

https://www.koi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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